내가 어릴 적이었다. 특별히 뭐가 기억나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꿈결처럼 흐릿하게 남아있는 내 기억 한 켠에는 컴컴한 밤하늘에 별 박히듯 강렬하게 찍혀있는 몇몇의 기억들이 있다.

 하나, 배구를 잘하는 언니.

 아니, 사실은 배구를 잘했는지 피구를 잘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은 분명히 그녀가 든 것은 배구공이었고, 종종 집 주변에서 홀로 놀고 있을 때면 그녀가 피구를 가르쳐주었다. 아니, 피구공을 받는 법을 알려주었다는 것이 맞겠지. 그녀는 집 앞 계단에 앉아 일정모양으로 줄이 그어져있는 하얀 배구공을 내게 던졌고, 나는 반대편 건물 앞에서 그걸 받았다. 내가 다시 언니에게 던져주면, 언닌 또 내게 그걸 아주 세게 던졌다. 그걸 난 용케 잘 잡았고.

 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아니, 중학교 다닐 무렵까지 피구를 제법 잘했던 것은 그 언니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 언니의 얼굴은 하얗고 예뻤으나 기억나지 않았고,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으며, 키도 크고 날씬했다. 물론 내가 어릴 때라 키가 커보였던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둘, 라면.

 라면을 부숴서 언니랑 몰래먹었다가 엄마한테 들켜서 된통 혼났던 기억이 있다. 당시 엄마가 그걸 어찌 알았는지 우린 신기해했지만 나중에 물어보니 라면 갯수까지 다 세어 꿰고 있었다며 다 큰 우리에게 웃으며 말했었다. 우린 다 큰 뒤에 엄마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귀신같은 기억력’이라며. 물론 세월이 지난 지금, 어머닌 자주 깜빡깜빡하시고 수요일을 월요일로 알아듣기도 하시며 씁쓸해하신다. 그 신통방통하던 머리가 이렇게 됐다며…….

 셋, 수영장.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엔 유치원인지 유아원인지 모를 곳, 항상 낮잠을 자던 곳, 어느 한 공간에 거대한 수영장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들어간 기억도, 내가 아닌 사람이 있는 기억도 아닌 텅 빈 푸른 타일 투성이의 고요한 수영장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 기억 속의 그것은 마치 ‘사진’이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허공에서 본 텅 빈 수영장일 뿐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 기억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다.

 넷, 콩벌레.

 커버린 지금은 그곳에 들어가 쪼그려 앉지도 못할 정도로 자그맣게 있던 뒷마당엔 항상 콩벌레가 두어 마리씩 있었다. 그래서 장난감그릇에 모레를 담고 콩벌레를 건드려 등을 말게 한 다음 그 위에 올렸다. “오늘은 콩밥이야! 식사하세요!”

 어릴 땐 벌도 빨대로 가지고 놀았을 정도로 그렇게 겁이 없었는데, 지금은 왜 이런지.

 다섯, 구급차 소리.

 한 아이가 다쳤다고 했다. 바로 옆 건물의 창에서 놀다가 떨어졌다는데, 지금 어떻게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소식은 못 들었다. 그저 내가 본 것은 엄청난 소란과, 바닥에 남은 피와, 깨진 창문조각들과, 그 아이가 떨어진 가지들뿐이다.

 소리가 그렇게 요란했는데도 나는 정작 구급차도 보지 못했다. 어리다면서 보호받은 거겠지.

 여섯, 할머니.

 사실 얼굴은 사진으로만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목 아래의 기억뿐. 할머니가 돌아가실 정도로 아팠는데도 난 병원에 갔던 기억조차 없는데, 엄마는 다 기억하고 있더라. 신기했다.

 어느 날 나는 울었고, 집엔 할머니가 사라졌으며, 어머닌 말했다.

 “돌아가셨어.”

 일곱, 개.

 집 바로 뒤편, 성인인 지금은 언덕이라기 뭐하지만 어릴 적엔 몸집이 작았으니 언덕이라 하겠다. 그 자그마한 언덕을 내려가면 커다란 개가 있었다. 무서워서 가까이 가진 못하고 구경만 했다. 생각해보면 그 개랑 그 배구 언니랑 가족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느 순간 언니가 사라졌을 때에, 개도 사라졌으니까.

 여덟, 봉숭아.

 요 얼마 전에 갔을 때, 어느 집 화분에 봉숭아가 가득한 것을 보았다. 어렸을 때 우리가 뜯고 놀았던 게 저 집 것은 아닌가 싶어 조금 미안해졌다. 아직까지 여기 살고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게 끝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돌아보며 느낀 건데, 어쩜 슬픔도 기쁨도 잘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잘 울고 잘 웃는 아이였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걸까. 나는 기쁨도 슬픔도 잘 느끼지 못하는 건가. 아니, 슬픔은 잘 느끼는데. 지금도 느끼고 있는 게 슬픔 아닌가.

 실은 그것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 그런 게 있는지.

2014. 8. 12. 1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