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렙차 때문에 발구르기 한 번 잘못하면 지축이 다 뒤집어지게 생겼네.

 

 

 

 

한 게임을 15년 이상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정도면 게임의 모든 컨텐츠를 누려보았을 거라는 것과, 대부분의 능력치나 스킬이 거의 끝을 찍었을 수 있겠단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저가 아무리 게으른 유저일지라도 웬만한 NPC의 스텟보다는 몇 천, 몇 만 배는 높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걸 예측했어야 한다.

 

[NPC '8대 마왕'이 사망하였습니다.]

 

적어도 나만큼은 알았어야 했다.

 

내 앞에 쓰러진 '매우 약함' 상태의 NPC들을 보았다. 멀쩡한 눈을 몇 번 깜빡여도 똑같은 알림이 눈앞에 떠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먼저 공격하기에 톡 쳤을 뿐이다. 일반적인 선공몹인가 했지.

 

[히든 필드 퀘스트를 완료하여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게 이렇게...

 

[8대 마왕을 쓰러뜨리고 9대 마왕이 되었습니다.]

 

빅 이벤트가 될 줄 알았냐고! 아니, 보통 이렇게 중요한 NPC는 무적 패시브를 심어놓지 않나?

 

[당신의 상태는 최상입니다. 당신의 필드는 '마계'입니다. 마계의 환경이 새로운 마왕의 상태와 비례하여 재구성됩니다.]

 

[필드 '마계'의 상태가 갱신됩니다. 45단계 상승하여 필드 레벨이 최대치(LV50)에 도달합니다. 당신이 죽지 않는 이상 필드의 상태는 지속될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의 글귀를 읽으며 넋을 놓았다. 주위에서 '마왕이 습격당했고, 새로운 마왕이 등극했다'며 아주 시끄러워졌다. 아마도 NPC들이겠지. 그들은 나를 두려워하면서도 필드가 성장하며 풍족해지는 주변 마력을 느꼈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이전의 왕을 버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새로운 마왕으로 추켜세우려 했다. 아니, 이미 타이틀이 9대 마왕으로 바뀌어 있었으므로 내게 거부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가.

 

이 나이에 게임 캐릭터가 된 꿈을 꾸고 있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막상 닥친 상황도 아주 난리다. 골이 아파 머리를 짚었다.

 

다행히 NPC들은 풍족해진 환경에 호들갑을 떨면서도 내게 다가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본의 아니게 죽여버린 전대 마왕의 사체는 바스러져 사라졌고, 그들은 나를 환영하면서도 가까지 오지 않고 멀리서 겁먹은 채 있을 뿐이었다. 내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기 때문일 테지.

 

한참이 지나자 그나마 강해 보이는 NPC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의 그는 역시나 '매우 약함'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새로이 마왕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당신을 따르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가 입을 떼자 다른 이들도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삽시간에 나를 향하던 눈길이 바닥을 향한다. 여기도 저기도 땅바닥에 조아린 뒤통수만 보였다. 한숨을 삼켰다. 식은땀으로 등 뒤가 축축하다. 너무 부담스러워 아무 말도 못 꺼내고 있는데 제일 먼저 말을 걸었던 인물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다. 이, 이건... 분명.

 

[퀘스트 : '아르카난'을 당신의 수족으로 임명하세요!]

마계 이인자였던 아르카난이 당신의 강함에 경이를 표합니다. 이에 보답하여 그를 수족으로 임명하는 축복을 내리십시오.

 

보상 : 수족-아르카난

실패 시 페널티 : 마계인들의 두려움 30% 상승

 

그래, 불경한 퀘스트의 느낌이다. 까득 이가 갈렸다.

 

'이 불친절한 시스템 같으니라고...!'

 

불쾌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는지 눈앞의 NPC 아르카난은 초롱초롱했던 눈길을 서둘러 바닥에 떨구었다. 내가 불쾌한 것이 저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천천히 한숨을 쉬며 눈앞에 드리운 TIP 영상을 응시했다. 허리춤에 찬 칼로 그의 양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면 된다는데.......

 

'시발, 손으로 툭 친 거 한 방에 마왕이 죽었는데 그렇게 하면 어깨가 뽀사지겠지, 개 같은 시스템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결국 내가 내린 결정은 그들을 모두 물리는 것이었다.

 

"꺼져봐."

 

일단 생각 좀 하자. 혹여라도 잘못해서 발 구르기 스킬이라도 써져서 여기 있는 모두가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조심조심 걸음을 돌려 유일하게 멀쩡한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 심장 떨려. 내쉬는 모든 숨이 한숨이 되어 나왔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어수선하게 방을 빠져나가는 NPC 무리를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급 피곤해졌다. 당혹스러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겠지만 지금은 남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이곳은 그냥 방이 아니다. 마계의 임원들이 회의를 하던 회의장이었고, 그곳엔 당연히 마계의 왕도 그의 수족도 함께였다. 그런데 순식간에 마왕과 그의 수족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건 갑자기 나타난 나 때문이고.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퀘스트만 믿고 따라가야 하는 게 정상인데, 시스템은 말도 안 되는 거지 같은 팁만 내어주고 있다.

 

거지 같은 꿈은 빨리 깰 생각을 않고, 나 또한 이 이상 무엇을 할 생각을 잃었다. 자칫하면 생물체 하나가 께꼬닥 하는 판에 여기서 무얼 하겠는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란 얘기였다.

 

 

 

 

아르카난은 딱딱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새로운 왕 때문이다. 누군가를 수족으로 삼지도, 어떠한 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어수선해진 마계를 통치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왕좌에 앉아 가만히 눈만 감고 있을 따름이었으니까.

 

그래, 왕좌. 아르카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좌에 앉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들었는가.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떨어져내린다. 새로운 왕이 되고, 회의장에서 잠이 든 지 며칠. 움직이지 않는 왕 때문에 그는 꽤나 애먹었다. 왕실의 왕좌는 비워놓고 회의장에만 앉아있는 왕이라니? 그를 설득하여 왕좌에 앉히기까지 아르카난은 엄청난 인내심 혹은 두려움과 싸워야만 했다.

 

다행히 새로운 왕은 짜증스러워하면서도 아주 느긋하게 왕좌에 앉았다. 그 후의 행동은 똑같았다. 그저 눈을 감고 있는 것뿐이었단 말이다.

 

누가 보면 동상인 줄 알 정도로 숨소리조차 고요하여, 어떤 겁 없는 이는 잠이 든 줄 알고 그에게 칼을 겨누기도 하였다. 딱 한 번. 딱 한 번이었는데...

 

왕의 눈이 떠졌다. 마력의 파장이 울렸으며, 상대는 순식간에 소멸했다. 당시 아르카난은 조금 멀리 있어서, 살았으나... 그 파장에 한 명만 죽인 것이 아니었다. 주변 인물이 모두 그 통제 아래 있었다.

 

겁 없이 나댄 벌레 한 마리 때문에 새로운 왕께 어떻게 해볼까 얼쩡거리던 수십 마리의 벌레들이 마력 하나에 질식하여 숨을 거두었다.

 

아르카난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날 살아남은 이는 가장 멀리 있었던 마계의 강자 다섯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멀리서 마왕의 일을 대신하여 처리하고, 그가 불쾌해 하지 않게 다른 이들을 물리는 수밖에.

 

그의 강함에 머리를 조아렸으나 아르카난은 슬슬 의구심이 들었다. 이게 과연 왕인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면 어째서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인가? 아르카난은 여러모로 불만이었지만 단 하나는 인정했다.

 

마계의 생활 반경이 늘어남으로 인해 더욱 풍족해진 자원과 마력. 이것은 지난 몇 백 년 몇 세기에 걸쳐서도 없었던, 마계의 전성기였다.

 

 

 

 

마왕이 됐다. 그러고 나서 수십 번의 퀘스트가 떴다. 다 무시했다.

 

집무를 보라고? 난독증 있는 사람한테 서류작업을 하라고? 그게 말이야 똥이야. 퀘스트 실패로 인해 주변 인물들의 두려움이 상승하였다.

 

사람들을 통치하라? 마나 실드 한 번 잘못 쳤다가 근처에 있던 애들 다 죽어버렸는데 여기서 뭘 하라고? 이 또한 실패 처리되어 아르카난의 반감도가 증가하였다.

 

젠장할. 다시 생각하면 빡이 쳐서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눈만 마주쳐도 바들바들 떠는 게 보여서 눈 감고 멍 때리거나 어서 잠에서 깨기만을 바랐다. 다행인 것은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는 것이고 불행인 것은 꿈이다 보니 잠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제였지. 얼마 전에 누군가 내게 칼을 던졌다. 막긴 막아야 하니까 고민을 했다. 손짓하나 잘못하여 죽어버린 전대 마왕이 떠올랐다. 그래서였다, 마력을 둘러 방패를 만든 것은. 나는 그냥 검만 튕겨져나갈 줄 알았지 누가 그렇게...

 

"허억...!"

 

다 기절해버릴 줄 알았나. 내 근처에 있던 사람부터 해서 제법 멀리 있던 사람까지, 실내의 80% 이상이 창백하게 질리며 쓰러졌다. 그리곤 사라져버렸다.

 

나는 할 말을 잃었었다. 도망친 건지 죽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불편해진 것만은 확실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 한숨밖에 나오는 것이 없어서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빨리 깨라, 응? 망할 꿈같으니라고.

 

그러나 이 빌어먹을 꿈은 한달이 지나도록 깨지 않았다.

 

먼저 지쳐 나가떨어진 것은 꿈이 아니라 나였다.

 

한 달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찌뿌둥하여 팔을 한 번 돌렸는데 잘못해서 왕좌에 부딪혔다. 뒤돌아보니 와장창 부서진 그 모양새에 그것을 외면하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시발, 어떡하지. 꿈에서 못 깨어난다면 배워야 한다. 힘조절. 힘조절. 와중에 또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았다가 왕실 문이랍시고 화려했던 거대한 문 한쪽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시바아아알. 누가 좀 알려줘! 내가 어떡하면 돼? 응? 얼굴이 울상으로 구겨졌다. 주변에 있던 인물들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호다닥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담스럽다. 제발 모른 척해 줘. 그냥 지나만 갈게. 제발.

 

 

 

 

천계와 인간계 필드에서는 난리가 났다. 전대 마왕이 죽었고, 새로운 마왕이 탄생했다고. 전대 마왕은 천계와 인간계에 반감을 가진 인물이었다. 천계와 인간계는 겨우 LV3의 필드를 구축하였고 마계는 LV5의 필드를 구축하였다. 그래서 함께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마계의 공격에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였다.

 

필드의 지도자가 바뀌었다. 필드는 지도자의 상태에 때라 반경이 탄탄해지고 자원이 풍성해진다.

 

하루아침에 마계의 필드 레벨이 LV50이 되었다. 천계와 인간계는 믿을 수 없는 레벨의 간극에 좌절하였고, 반면에 몇몇은 작은 희망을 피웠다. 어쩌면 그가 그들에게 우호적일 것이라는 그런 희망.

 

그 희망은 금세 꺾이고 말았다.

 

마왕이 인간계에 강림하였다. 대기하고 있던 천계와 인간계의 동맹군은 그의 움직임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땅을 박차는 발길질 한 번에 수천의 병사가 나가떨어졌다.

 

이길 수 없다. 우리의 세계는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순간 거대한 파장이 그들을 뒤덮었다가 사라졌다. 모든 이들이 숨조차 죽이고 있던 그때, 누군가 말했다.

 

"마왕이, 돌아갔어..."

 

맥 빠진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아직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이야기도 곳곳에서 나왔으나 이내 그 말은 사실이었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10분, 30분이 지나도 다음 공격은 없었기 때문이다. 짧았던 전투였지만 강렬하였다.

 

마왕이 다시 나타난다면, 그때는 전멸이다. 천계와 인간계는 마지막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동맹관계를 더욱더 견고히 했다.

 

 

 

 

자리를 벗어난 것은 좋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르카난인가 뭔가가 추천해서 이동한 곳이 웬 인간들이 바글바글한 곳이었다는 게 문지지.

 

'대체 내가 뭘 어떡해야돼?'

 

갑자기 마구 달려들기에 당황하여 가벼운 넉백 스킬을 사용했다. 그 조차도 레벨 차이가 많이 나는 초보자들과 대련해줄 때 썼던 아주 약한 스킬이었단 말이다. 스킬을 제대로 쓴 것도 아니고, 원래라면 대미지 1이나 뜰법한 것에 우르르 무너지는 방어선을 보며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빠르게 순간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력파장에 사람들이 휘날리든지 말든지, 이렇게 계속 몇 천씩 나동그라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일단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 숲이라고 검색하여 나오는 아무 곳으로 재빨리 이동하니, 눈앞이 흔들리며 새하얀 무언가가 나타났다.

 

도착한 곳은 새하얀 단풍나무가 있는 울창한 숲속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숲. 그저 나무만 가득할 뿐인 공기 좋은 곳.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한숨처럼 내뱉으며 그 나무에 손을 짚고 기대었다. 그렇게 안도하기는 이 꿈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고, 나는 그래서는 안됐다.

 

"아...?"

 

손으로 짚었던 커다란 나무의 일부분이 바스러지며 서서히 기울어졌다. 내가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우르르 몰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세계수가...! 마왕이 세계수를 죽였다!"

 

"감히 세계수를......."

 

아. 눈앞에 나타난 수많은 생명체에 탄식이 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상대가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이 커다랗고 하얬던 단풍나무가 세계수였고 너네는 뭐냐. 이 숲에 살던 엘프냐? 허탈하게 그들을 돌아보니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병장기를 쥔 채 긴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다.

 

시발. 이번엔 어디로 도망쳐야 돼? 나는 다시 절망에 빠졌다.

 

 

 

 

아르카난은 바스러지며 열리는 왕실의 문에 긴장한 상태로 그의 동태를 살피었다. 살벌한 눈이 잠시 아르카난과 주변을 향하였다. 서둘러 몸을 숙이니 그제야 그는 입을 떼었다.

 

" 어딘가 산책할 곳이."

 

중간에 말이 잘렸다. 아니, 그 스스로 고민하듯 멈춘 것이다.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새 왕께서는... 아르카난이 그가 걸어온 길을 보았다. 왕좌는 부서졌고 지난 일로 인하여 실내는 제대로 치우지 못해 엉망이었다. 보통의 힘으론 쉽게 열리지도 않던 왕실의 문조차 먼지처럼 부서졌다.

 

그래, 그는 지금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다. 힘을 분출할 곳이 필요한 것이다!

 

아르카난은 마침 적당한 곳을 알고 있다며 그를 워프게이트로 이끌었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아르카난의 안내를 따랐다.

 

아르카난이 향한 곳은, 전투를 치를 때 사용할 예정이었던 천계와 인간계 사이의 일방통행용 워프게이트였다.

 

이제 왕의 분이 풀리고 나면 제대로 통치를 시작하시겠지. 들뜬 마음에 아르카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는 절망했다. 자리를 옮긴 곳은 이번엔 절벽으로 검색해 아무곳으로나 이동하였다. 마가다 절벽인가 왠지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선택한 곳이었고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하지만 생명체는 존재했다.

 

-와, 강한 인간이야!

-아니야, 마계인들이 얘기해줬어, 마왕이야!

-그치만 귀가 뾰족한걸? 엘프 아니야?

 

시끄럽지만, 왠지 울컥하였다. 그들에게는 내 물리력이 작용하지 않아 내가 무심코 손을 휘둘러도 날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토록 무해한 존재라니. 감동하여 숨을 삼키자 자그맣고 반투명한 생명체들이 우르르 내게 다가왔다. 주위를 멤돌며 그들은 물었다.

 

-너는 누구니?

-인간이지? 인간의 영혼이 느껴져!

-아니야, 마왕이지? 엄청 강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렇게 부르잖아?

-엘프지? 그렇지? 아니면 우리가 이렇게 보일 리 없어. 외형도 그렇구 자연 친화력도 마력도 엘프들처럼 우릴 볼 수 있을 만큼 높은걸!

 

정신없이 속살거리는 음성이 시끄럽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 처음 들어보는 긍정적인 음성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꿈에서 나는 엘프이자 마왕이며, 그 속에 든 영혼은 인간이라고.

 

그들은 자신들이 맞추었다고 기뻐하며 나를 절벽에서 이끌어 반투명한 꽃들이 가득한 들판으로 안내했다.

 

긴장이 풀려 털썩 주저않자 주변으로 가벼운 파동이 일었다. 흠칫하여 그들과 주변의 꽃을 살폈으나 형체부터가 분명하지 않았던 그들은 그것을 가벼운 바람으로만 느낀 듯했다. 꽃은 가벼이 흔들렸고 그들은 꺄르륵 즐거운듯 웃으며 날아다녔다.

 

드디어 안식을 찾았다. 내가 있을 수 있는 곳. 감격의 눈물이 났다.

 

[필드에서 벗어났습니다. 강제 귀환까지 48시간 남았습니다. 귀환에 거부할 시 필드에 강력한 제재가 주어집니다.]

 

시발. 나를 좀 놔둬주라.

 

 

 

 

 

 

 

 

2019. 11. 30.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