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바둑왕 패러디] 비상(飛上)


 날았으면 떨어질 날도 있는 거지.

 

 


 은퇴라니. 말도 안 돼. 아키라가 중얼거렸다. 빠르게 걷는가 싶던 그의 보폭은 어느새 더 넓어져 이제는 뛰다시피 했다. 그 걸음은 어느 한 곳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오가타 씨!”

 

 수많은 기자들과 바둑기사들 틈 사이에서 금발머리 사내가 아키라를 돌아보았다. 사내의 갈색 눈동자가 덤덤하게 아키라를 향했다. 아키라가 믿고 싶지 않은 얼굴로 사내를 보았다. 오가타 씨가 은퇴라니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구와바라 씨도 나이 먹을 대로 먹은 뒤에나야 했던 은퇴다. 자신의 아버지도 모든 머리가 하얗게 새고 나서야 했던 그것이 바로 은퇴란 말이다. 그런데 그 은퇴를, 지금의 오가타 씨가 하다니. 말도 안 된다. 아키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 오가타는 아키라와 덤덤하게 눈을 맞추었다. 마치 지금껏 해왔던 눈인사와 같았다. 아키라는 턱하니 숨통이 막혔다.

 

 “왔냐, 아키라. 너도 소식 듣고 왔나보구나. 이것 참. 아직 기자회견도 안 했는데 말이야.”

 

 난감하다는 듯 인상을 쓰는 오가타의 모습이 마치 그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한 마냥 보여서 아키라는 울컥 소리치고 말았다.

 

 “도망가시는 겁니까?”

 

 아키라의 말에 오가타가 그 자리에 멈춘다. 가만히 있는 듯싶던 그가 픽하니 웃으며 입을 뗐다.

 

 “그래.”

 

 어쩌면, 도망일지도 모르지. 오가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에 아키라가 꺼내려던 말을 채 내뱉지 못하고 그 뒷모습만을 보았다. 오가타는 끝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자들 틈사이로 사라졌다. 남겨진 아키라의 손만이 애꿎게 허공을 붙잡은 꼴이 되었다.

 

 혼란스런 표정으로 아키라는 자신의 두 눈에 하염없이 오가타를 담았다. 어느새 본격적으로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는지 기자들의 난잡한 음성이 시끄러이 아키라의 귓가를 파고들고 있었다.

 

 [오가타 10단! 여기를 봐주십시요! 갑자기 은퇴하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요즘 승률이 많이 떨어지셨는데, 그것 때문이라 봐도 무방한지요?]

 

 [그렇지만 아직 ‘10단’ 타이틀을 쥐고 계신데, 정말 이대로 은퇴하시는 겁니까?]

 

 아키라는 그러한 기자들과 같이 속으로 외쳤다. 아직. 아직 젊으시잖아요. 저희들과 견주어야할 자리가 많이 남아 있잖아요. 아키라는 오가타를 상대로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가 많다고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그러니 제발. 마음을 졸이는 아키라와는 반대로 오가타는 태연한 얼굴로 기자들이 건네는 마이크를 붙잡으며 입을 떼었다.

 

 “그렇군요. ‘10단’은…….”

 

 바로 이어지지 않고 늘어진 그 음성에 아키라가 입술을 깨문다. 제발, 오가타 씨. 오가타는 기자들 사이로 보이는 아키라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줄곧 제 뒤를 따라다니던 아키라의 시선을 이미 알아채기라도 했던 마냥, 오가타가 슬쩍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안타깝지만 제게선 영원히 빼앗을 수 없겠군요.”

 

 타이틀을 쥔 채로 자리에서 내려오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결심을 무를 생각이 없단 이야기였다. 아키라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 입술이 지르물렸다. 아키라의 마음은 절절하였으나 오가타에게는 닿지 못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사람들은 오가타에게 그간의 회포를 풀자며 술자리를 권해왔다. 오는 술 마다않는 오가타이니만큼 거절은 하지 않았으나, 당장은 아니었다. 그들과는 차일의 약속 잡고서 모든 이들의 관심에 상응하는 응대를 해주고 나서야 비로소 오가타는 홀로 남을 수 있었다. 주변이 조용하니 잠들어있던 사색이 떠오른다. 이제 바둑과 관련된 공식적인 일정은 정말 안녕이었다. 즉 더 이상 바둑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으며, 더는 바둑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가 아니게 되었다는 선포이기도 했다. 오가타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돌 말고는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빈손이다.

 

 오가타는 그제야 실감이 났다. 바둑은 이제, 끝이었다.

 

 ‘도망가시는 겁니까?’

 

 아키라의 음성이 떠올랐다. 녀석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가타 자신에게선 이제 얻을 것이 없을 터인데, 녀석은 옛정 때문인지 오가타를 끈질기게 붙잡았다.

 

 도망이라?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실제로 최근 녀석과 대국을 두면 버거웠다. 기쁘지도 않고, 저 홀로 낭떠러지 끝에 걸쳐져 끝없이 추락하기만을 반복하는 기분이라 버겁다못해 슬프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성장할 때, 더는 함께 나아가지 못하고 도태되는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 아니, 참담함일까.

 

 그래도 예전엔 안 그랬는데, 근래 들어서는 녀석이 아니라 그 누구와 바둑을 두어도 매번 실력뿐 아니라 기분 또한 예전 같지 않았다. 체력이 부쳐 날로 실수가 늘어가고 집중력도 떨어져 가는 거다. 그것은 바둑기사로서의 명을 다했다는 것을 뜻했다.

 

 한숨이 오가타에게서 흐른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처음 깨달은 것은, 사실 오래되었지만 지금껏 애써 부정하며 억지로 버텨온 것이다. 그러다 결국 명인에 이어 혼인보까지 도우야 아키라와 신도우 히카루 두 꼬맹이에게 빼앗겨버리니 더는 오기만 부릴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연달은 타이틀 상실로 끝내 되도 않을 오기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끝끝내 열심히 한다면야 서서히 잃어가는 것들을 조금쯤은 붙잡을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엔 어린 친구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어야할 터. 오가타는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 아니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은 그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자신이 바둑계를 떠난다면?

 

 오가타가 멈칫했다. 과연 앞으로 무엇을 하며 마음을 바치고, 열정을 다할 수 있을까. 오가타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느낌이 이상했다. 지금까지의 인생 대부분을 바둑에 투자하며 살았는데, 갑자기 그것을 버리고 다른 생각을 하니 말이다. 이제 바둑 신의 안배는 끝났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보다 어린 친구들의 것이었다. 구라타라던가 제 또래의 몇몇 녀석들은 아직 창창한 척 하지만 저가 보기엔 그들도 곧이다.

 

 완전히 잃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사랑했던 바둑을 남에게 빼앗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오가타는 가슴 한 구석이 휑해졌다.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둑뿐이던 오가타지만 그로서는 많은 세월을 겪었다. 바둑이 아닌 다른 것도 이 세상에는 충분히 존재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무언가, 또 다른 무언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바둑은 놓기 힘들 것이다. 오가타는 애써 생각을 돌리며 저 자신을 달랬다. 분명 바둑이 아닌 다른 것도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끝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가타는 주먹을 쥐었다. 손아귀에 잡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오래 살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남은 생을 재미없게 살 생각은 더더욱 없다. 오가타는 입에 문 담배를 빨아들이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림을 그려볼까.

 

 컴퓨터도 컴퓨터였지만 그림도 꽤나 좋아했던 취미다. 그 외로는 열대어 키우는 것 정도가 있지만 그건 열대어가 움직이는 거지 자신이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사실 꼽아보자면 그 중에 제일은 바둑이었지만……. 오가타가 고개를 틀며 눈을 감았다. 정말 간간히 재능 있단 이야기를 들었던 그림그리기도 싫어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리고 싶은 것도 떠올랐고.

 

 오가타는 기억 속 남아있는 잔재를 꺼냈다. 지금은 잘 꾸지 않는 꿈이지만, 한창 바둑실력이 최정점을 찍고 ‘한 인물’의 바둑에 아주 푹 빠져 있을 적엔 매일같이 꾸었던 꿈이 있다. 그 꿈은 뚜렷치 않고 무척이나 추상적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함만이 오가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전부다. 하지만 오가타는 그것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림이라면.

 

 그림이라면 그 꿈을 표현해내는 가능할지도.

 

 오가타가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떠올려보았다. 당시엔 직접 그와 바둑을 두겠노라 두 발 걷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현재, 지금은. 지그시 감은 눈 위로 캄캄한 캔버스가 떠오른다. 그때와 같이 아련한 풍경이 덧그려졌다. 오가타의 두 눈이 빛났다.

 

 그래. 그려보자.

 

 만약 ‘그’가 나타난다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그때의 저가 당신의 바둑을 얼마나 좋아했으며 또 얼마나 당신과 두고 싶어 했었는지 알 수 있도록. 오가타는 그때의 제 마음을 ‘그’가 알아주길 바랐다.

 

 


 오가타가 은퇴 후, 아키라에게서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히카루는 벙 쪘었다. 오가타 그가 은퇴라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은퇴 후 그림’이라니? 그런 그의 반응에 아키라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별 말 못했다. 히카루는 오가타가 바둑을 두지 않는 모습도, 심지어 그림을 그리는 모습도 전혀 상상이 가질 않아서 결국 그를 찾아오고야 말았다.

 

 히카루는 아키라가 알려준 오가타의 주소를 찾아가, 직접 그 건물을 보고 난 뒤에야 그 주소가 오가타의 화실 주소라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 아예 살고 있기 때문인지 어쩐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가타가 요즘엔 주로 이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한다. 때문에 이곳으로 가야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아키라가 말했었다.

 

 사실은 오가타가 그림을 그린다고 해봤자 제대로 그릴 거란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만, 히카루는 오가타의 화실을 둘러보며 자신의 생각을 빠르게 정정했다. 제법 넓은 화실 안에 난잡스레 늘어져 있는 화구들을 보니 아주 본격적인 모양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서 그리는 그림이라면 왠지 대충 그려도 오징어는 안 나올 것 같았다.

 

 신기한 마음에 이리저리 화실 안을 훑던 히카루의 시선이, 홀로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캔버스로 향한다. 다른 캔버스들은 완성이 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게 바닥에 버려져 있었는데 이것만은 달랐다. 멀찍이서 보니 제법 잘 그린 것 같아 슬금슬금 그림 앞으로 다가가던 히카루가 곧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히카루의 숨이 멎었다. 멍하니 뒷목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히카루의 입이 뻐끔뻐끔 열렸다.

 

 “사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그 이름을 부른 것은.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라, 히카루는 혼란스런 얼굴을 하고서 서둘러 그림 가까이 다가가 그림의 전체를 훑었다. 사이, 어째서 사이가 여기에. 히카루는 저 홀로 그림을 보며 멘붕에 빠졌다.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보기만 하려했던 히카루의 손은 어느새 그림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그것을 저지하듯, 히카루의 뒤에서 갑작스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안 말랐어. 만지면 안 돼.”

 

 언제 왔는지 오가타가 히카루의 손을 덥석 잡으며 입가에 문 담배를 손에 빼들곤 말했다. 놀란 히카루가 뻗었던 손을 떼며 어정쩡하게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그… 그림이…….”

 

 “아니, 괜찮아. 그나저나 알아보겠나?”

 

 어물대며 나 당황했소 하는 모양새로 히카루는 허둥거렸다. 오가타는 히카루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자신의 그림을 한 번 훑었다. 마치 그림이 무사한지 점검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괜스레 찔려 한차례 몸을 움츠렸던 히카루는 곧 고개를 갸울였다. 알아보겠냐니? 히카루가 무슨 이야긴지 몰라 멀뚱히 오가타를 보는 사이 오가타가 다시 담배를 한 입 삼키곤 말한다.

 

 “방금 ‘Sai’라고 했잖아.”

 

 아. 그 얘기구나. 히카루가 뒤늦게 깨달으며 그림을 한 번 보고, 다시 오가타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히카루는 그제야 상황판단력이 돌아왔다. 동시에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입을 움직여 마른침을 삼키며 기억을 더듬어본다. 분명 어릴 적 자신과 함께했던 사이는 히카루 자신의 눈에만 보였을 텐데, 어째서 사이의 모습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히카루의 눈이 다시 한 번 캔버스를 향했다. 어둑한 배경 안에 새하얗고 까만 바둑돌과… ‘사이’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선명하진 않았지만 분명 사이다. 히카루는 이젠 희미하기만 한 사이의 모습을 간신히 떠올리며 푸석푸석해진 재차 자신의 입술을 축였다. 어떻게 오가타가 이렇게나 비슷하게 사이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것인지 히카루는 알 수 없었다. 초초한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가타는 덤덤하게 말했다.

 

 “알아보라고 그리긴 했지만 정말로 네 녀석이 알아볼 줄은 몰랐다. 보다시피, 형태가 명확한 건 아니지 않냐.”

 

 그러곤 어깨를 으쓱이며 담배 든 손으로 캔버스를 가리키고 다시 담배를 문다. 그런 오가타를 바라보던 히카루가 뒤늦게야 긴장한 자신을 발견하곤 애써 다독였다. 벌써 십 수 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지금에 와서 추궁당할 리는…….

 

 “그래. 너는 ‘Sai’가 누군지 그때도 알고 있었지. 이제는 말해줄 수 있나? 신도우 히카루.”

 

 아주 없진 않았구나. 잊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히카루는 오가타의 어마무시한 기억력에 새삼 두려워진 한 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다는 것은 히카루에게 있어 기쁨이라면 기쁨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말하기 힘든 건 말하기 힘든 거였다. 히카루가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어느새 히카루의 몸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가타가 픽하니 웃음을 터트렸다.

 

 “됐다. 바라지도 않아.”

 

 그 옛날의 히카루는 ‘Sai’에 대해 아무리 캐물어도 알려주지 않았었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그 입을 조금 열어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 히카루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혼자만 알고 알려주지도 않고 계속 고집만 피우는 것이 괘씸하여 오가타가 들으란 듯 궁시렁거렸다.

 

 “쪼꼬만 게 옛날부터 쓸 데 없이 입만 무거워서는. 그래, 어디 죽을 때까지 닫고 살아봐라.”

 

 그것을 들었어도 못 들은 척할 법도 하건만, 히카루는 난감한 표정으로 오가타 앞에 그 속내를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오가타의 눈치를 살피며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는 것이 누가 봐도 그것을 다 들은 모양새니 말이다.

 

 “이제는 저 쪼끄맣지도 않은데… 그나저나 잘, 그리셨는데요? 근데 얼굴에 물감 묻으셨어요.”

 

 말 돌릴 거리를 찾던 히카루가 그제야 오가타의 차림새를 제대로 보았다. 그는 조금 전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는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으며, 입고 있는 와이셔츠하며 살갗이며 이곳저곳이 알록달록했다. 유화였던가. 히카루가 새삼스럽게 오가타를 보았다. 물감이 묻었다는 말에 오가타는 그러냐며 덤덤하게 본인 손에 눈길을 준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히카루의 시선이, 다시 그림을 향했다.

 

 “오가타 씨. 만약에요.”

 

 히카루는 문득 생각난 것을 말했다. ‘만약에’. 그래,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사이가 오가타의 앞에 나타난다면? 그런다면 그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옛날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달려들까? 아니면, 이제와선 필요 없다고 부정당할까. 왜인지 히카루는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졌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사이를 만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그가 여지껏 사이를 기억해주었다는 것에 대한, 감상 때문일까. 히카루는 다시 오가타를 보았다. ‘그’를 묻는 히카루에 오가타는 멈칫했다. 사이. 사이를 지금 만난다면.

 

 “글쎄. 그때하곤 느낌이 많이 다르겠군.”

 

 생각에 잠겼던 그가 곧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에 히카루가 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미 말라붙어 지워지지 않을 테지만 오가타는 손과 팔뚝에 묻은 물감을 매만졌다. 역시나 벗겨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가타는 매만지던 손을 떼고,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았던 담배를 다시 베어 물며 떠올렸다.

 

 “‘Sai’…….”

 

 오가타가 그 이름을 읊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그의 갈색 눈동자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오가타의 바로 눈앞엔 그의 한 수 한 수가 떠올랐다. 마치 하늘의 별을 수놓는 것 같았던 눈부신 한 수 한 수가. 그림을 그렸을 때와 같은 까마득한 느낌이 오가타를 에워쌌다.

 

 

 

 돌을 이렇게 하루 종일 만지지도 않았던 적이 대체 몇 년 만이더라. 오가타는 바둑알을 매만지며 새삼스런 감촉에 손을 떼지 못했다. 맨 처음 바둑을 배운 뒤로는 거의 매일같이 쥐었던 돌이니 한 30년쯤 될까……. 차갑고 매끈한 돌의 감촉이 매력적이라 결국 참지 못하고 바둑판 위에 돌을 얹었다.

 

 은퇴 이후 바둑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때문에 실제로 바둑을 아이에 두지 못한 것은 이번 그림을 마무리하기 위해 불태웠던 단 하루뿐이다. 실로 간만에 두는 것만 같은 착각에 오가타가 맥없이 웃었다. 마음만은 바둑 없인 한 시도 살 수 없을 것 같았었는데.

 

 바둑을 향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돌을 만짐으로써 돌을 수놓고 싶은 마음이 다시 활활 불타올랐다. 탁탁 저 홀로 백돌과 흑돌을 번갈아 얹으며 오가타가 의욕을 불태웠다. 예전과도 같은 매서운 눈빛이 그의 눈동자를 타고 되살아난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가타가 한참을 바둑판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그의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인영이 오가타의 시야에 들어왔다. 긴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내리고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청년, 아키라였다. 오가타가 놀란 표정으로 아키라와 눈을 마주했다.

 

 “아키라. 언제 왔냐.”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던 듯, 아키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좀 전에 왔다고 이야기했다. 아키라의 시선은 화실 이곳저곳을 향하기도 했지만 특히 오가타의 손끝에 있는 바둑판을 많이 향하고 있었다. 언제 왔냐에 이어, 왜 왔냐는 오가타의 시니컬한 음성이 아키라의 귓가를 때린다. 아키라는 머쓱한 음성으로 답했다.

 

 “오랜만에 오가타 씨와 대국하고 싶어서요.”

 

 오가타는 피곤한 몸을 모른 척하고 그 대국 제의를 곧장 받아들였다.

 

 

 


 바둑판 위엔 한참 치열한 부딪힘이 있었다. 아키라가 흑이었고, 오가타가 백이었다. 초반엔 괜찮은가 싶던 흑백의 형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한쪽으로 치우쳤다. 이번엔 흑, 아키라의 차례. 아키라가 한참이나 바둑판을 바라보다가 돌을 놓는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오가타는 결국 한 마디를 뱉었다.

 

 “봐줄 필요 없다. 제대로 둬.”

 

 아키라가 멈칫했다. 힐끔 아키라의 시선이 오가타를 향했다. 오가타의 표정은 피곤해 보이면 피곤해 보였지 어두운 기색 따윈 없었다. 콕 집힌 제 마음에 아키라가 슬쩍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돌을 두기 전 머뭇거렸던 자신의 손을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 마음을 너무나도 쉽게 간파해버리는 그만의 촉이 자신의 본심을 간파해낸 것일까.

 

 그가 두는 수의 날카로움은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의 촉만큼은 여전히 매서웠다. 그것을 아키라 저 또한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일 테지. 아키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다시 돌을 들어 본래 두려던 곳으로 옮겨 두었다.

 

 오가타의 시선이 뚫어져라 그 위에 고정된다. 아키라가 슬쩍슬쩍 그 눈치를 살피는 사이,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있던 오가타가 결국에 돌을 던졌다.

 

 “졌습니다.”

 

 눈앞에 드리워진 오가타의 정수리에 아키라가 얼굴 마주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아키라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오가타가 툭하니 말을 내뱉었다.

 

 “복기는, 나중에 하지. 이틀 내내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해.”

 

 아. 그래서 더 실수가 많았던 걸까? 아키라는 그제야 가시방석 같았던 얼굴 위에 걱정을 담았다. 방금 둔 바둑을 되짚어본다면, 아키라가 느끼기에도 오가타의 바둑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한숨을 쉬며 눈가를 짚는 오가타의 모습에 아키라가 돌을 정리하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오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그저 간만에 만난 것이기 때문에 좀 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픈 마음이 있었을 뿐.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오가타로서는 거의 정신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좀 자야겠어.”

 

 엊저녁부터는 정말 한 숨도 못 잔 상태라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아키라와는 간만이라 대국을 받아들이긴 했는데, 후반부가서는 아예 돌을 빨리 던져버리고 싶었을 정도로 간신히 두었다. 젊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버티기가 힘들다. 오가타가 손에 얼굴을 묻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왔는데 미안하게 됐군. 차라도 내줬어야하는 건데.”

 

 대국이 끝나자 거의 잠결에 내뱉듯 이야기하는 오가타의 모습에 아키라가 빠르게 도리질을 했다.

 

 “아뇨. 주무세요. 저는 가볼게요. 쉬세요, 오가타 씨.”

 

 돌 정리를 마친 아키라가 서둘러 인사한 뒤 화실을 빠져나갔다. 밍기적거리며 아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가타 그에게 폐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덕택에 오가타는 아키라를 말릴 새도 없었거니와 그에게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었다.

 

 오가타는 아키라에게 제대로 눈길도 주지 못한 채, 잘 가라는 한마디로 그를 보내고는 몸을 옮겼다. 그의 몸이 비틀거리며 화실 한 켠에 딸린 침실로 향한다. 조금 더 지체했다가는 화실 바닥에 그대로 자버릴 지도 몰랐다.

 

 그 와중에도 쓸데없는 생각이 스친 것은 늙은이 특유의 생각 많은 버릇 때문일까.

 

 이젠 정말 늙은 모양이다. 오가타가 침대에 겨우겨우 몸을 파묻으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천근만근 같은 몸이 스펀지처럼 이불보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지그시 감긴 그의 눈앞에 문뜩 두 청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화실에 들어와 자신의 그림을 보자마자 사이를 떠올리고, 연신 그에 대해 이야기하다 갔던 히카루. 반대로 그림에는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자신의 바둑에 몰두했던 아키라.

 

 상반되었던 두 청년에 대해 생각해보던 오가타가 곧 캄캄한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진다. 잠들기 전 했던 생각의 영향일까. 그는 간만에 꿈을 꾸었다. 옛부터 자주 꾸어왔던 ‘Sai’의 꿈을.

 

 

 


 잠에서 깼을 때, 오가타는 찌뿌등한 몸을 일으키며 신음을 삼켰다. 고작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잔 것뿐인데 체력이 팍 깎인 기분이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찜찜함과 삐걱거림에 오가타가 침대에 걸쳐 앉은 몸을 움직여 이곳저곳 굳은 근육을 풀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어느 정도 몸이 풀렸다. 오가타는 그제야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얼마나 잤는지를 가늠하기위하여 오가타는 걸음을 떼어 화실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아직 잠기운이 남은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새삼 꾸었던 꿈을 상기해보았다. 예전이면 몰라도 최근엔 꿈을 잘 꾸지 못했기 때문에 ‘그’ 꿈을 꾸는 것도 정말로 오랜만의 일이다. 피곤해서 푹 잤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침내 그림을 다 그렸기 때문에 기념이라도 하기 위하여 꿈속에서나마 ‘그’가 나타났던 것일까. 오가타는 옛날에 제법 많이 꾸었던 꿈이지만서도 꿈의 여파에서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화실 안쪽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화실로 들어서던 오가타의 걸음이 그대로 멈추었다. 잠에 취해 있던 그의 갈색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변하고, 그 숨이 크게 들이켜진다. 오가타의 입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벌어졌다. 설마. 오가타는 몇 번이고 숨을 헛삼켰다.

 

 캄캄한 화실 안, 창문너머 흘러드는 달빛 사이로 희미한 인영이 비친다. 새하얀 옷을 입고, 까만 밤하늘과 같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반투명한 빛깔의 사내. 마치 꿈속에서 보았던…….

 

 “’Sai’?”

 

 그래, Sai. 그것은 오가타가 꿈에서 그렸던 그의 모습과 아주 똑 닮아있었다. 오가타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빤하게 오가타의 그림을 바라보던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사내의 얼굴이 드러난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그 눈동자가 오가타의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곤 휘둥그렇게 변했다.

 

 [설마… 오가타 씨?]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첫 마디는, 당사자인 오가타로선 알려준 적도 없었던 제 이름이었다. 오가타가 벙 찐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오가타를 향해 환하게 웃음을 띠었다.

 

 [저예요, 기억하시겠습니까? 저 후지와라노… 아니, 인터넷 바둑의 ‘Sai’입니다!]

 

 직접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가타가 알 리가 없는데도 사이는 열심히 자기 자신을 설명했다. 당신이 그렇게나 함께 대국하고 싶어 했던, 이란 말을 그의 입에서 직접 듣고 나서야 오가타는 정신을 차렸다. ‘Sai’, 그 이름에 그는 반응했다. 설마 이 자가 정말 ‘Sai’란 말인가? 오가타의 표정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는 되레 방긋방긋 웃은 채로 오가타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기억해준 오가타가 정말로 고맙다는 듯 스스럼없이 그 앞에 다가와선 말했다.

 

 [제 본명은 후지와라노 사이. 결국 당신과는 제대로 두지 못한 채 떠나고 말았었지요……. 당신이 저를 기억해주고, 이렇게 ‘그려’주었기에 저는 이렇게나마 당신 앞에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의 저는 성불을 하고 남은 잔재에 불과하지만요.]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사이의 하얀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잔잔한 사이의 음성이 오가타에게 닿았다. 오가타는 그런 그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납득할 수 없다는 그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사이는 입가를 감싸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저는 히카루에게 붙은 귀신이었답니다. 그래서 히카루가, 당신에게 제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거예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와락 찡그려진 오가타의 미간이 보인다. 어처구니없는 진실에 화가 났을 법도 하고 헛소리 말라며 따질 법도 하건만 오가타는 여전히 입도 뻥긋하지 않은 채다. 말을 끊는 자가 없으니 사이는 천천히 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히카루를 처음 만났던 때의 이야기. 그 아이와 지내며 있었던 이야기들과 그 와중에 오가타를 만났던 것, 그러나 결국 제대로 두지 못해 아쉬웠었단 이야기와 또 마지막으로 히카루와 지내며 아쉬웠던 점들. 끝으로 자신이 히카루에게서 떠나갈 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떠나고 말았었다는 이야기까지. 사이는 말하던 도중 제 발이 저린 사람처럼 퍼뜩 놀라서 변명하듯 입을 뗐다.

 

 [아, 물론 나중엔 히카루 본인의 진짜 실력이었답니다! 히카루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했었지요. 참, 오가타 씨가 이렇게 늙었다면 히카루도 많이 컸겠군요? 오가타 씨, 히카루는 어떤가요? 히카루라면 제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이 성장했겠지요?]

 

 넋이 나가서였는지 아니면 진실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는지, 오가타는 사이가 멈출 때까지 가만히 사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사이는 어느새 입가에 띠었던 호들갑스런 웃음을 지운 채 그와 눈을 맞추고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오가타의 눈이 피하지 않고 사이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그래. 저 눈이 좋았던 거였다. 오가타의 저 곧은 눈빛 때문에, 사이는 제 호승심을 불태웠던 거였다.

 

 [오가타 씨. 괜찮다면, 저와 일국 하시겠습니까?]

 

 늦었다면 늦었다고 생각되지만, 사이는 그런 오가타와 다시 한 번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바랐으나 이루지 못했던, 지난 시간동안의 이야기들을 말이다.

 

 “…좋습니다.”

 

 오가타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앉아 오가타가 돌을 놓았다. 사이, 그는 귀신인지라 물건을 잡을 수 없기에 오가타가 흑과 백 모두 두어 주어야했다. 자연스럽게 오가타가 돌을 쥐었다. 챠르륵 매끄러운 돌 몇 알이 오가타의 손에 들어온다. 돌을 쥐는 것이 아닌 ‘홀’하고 들려오는 사이의 음성에 오가타가 손바닥을 폈다.

 

 [제가 백이네요.]

 

 사이가 부채를 입가로 가져가며 웃었다. 전에 히카루 덕분에 한 번 두었던 적이 있었으나 제대로는 아니었으므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그와의 첫 번째 대국이 될 테다. 사이는 오가타를 상대로 백이라면 조금 더 긴장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주절주절 제 생각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며 신나했다.

 

 신이 난 것은,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그가 예전보다 경험도 실력도 더 늘었을 테니 흥미로운 대국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취해있지도 않다. 들뜬 사이를 뒤로한 채 오가타가 먼저 흑돌을 놓았다. 사이의 부채가 기다렸단 듯이 바둑판 위로 얹어졌다.

 

 [히카루는 항상 저와 이렇게 두었습니다.]

 

 “번거롭군.”

 

 [하하. 그런가요? 그래서 히카루도 저와 바둑을 두자고 하면 많이 귀찮아했지요.]

 

 사이의 들뜬 마음이 그 목소리에서도 묻어난다. 오가타는 사이의 이야기에 처음으로 대꾸를 했다. 사이의 많은 이야기 탓인지 오가타는 어느새 친근감을 느끼기라도 한 마냥 말을 놓았다. 그래서인지 말을 뱉는 것도 딱히 거리낌이 없어보였다. 착수방식이 번거롭다는 불평과도 같은 오가타의 말에 사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줄곧 이어지던 사이의 목소리가 잠시 끊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가타는 뒷말을 덧붙였다.

 

 “그렇지만 알겠어.”

 

 [예?]

 

 무엇을? 두서없는 말에 사이가 두 눈을 깜빡이며 오가타를 보았다. 오가타는 자신의 수를 두고, 이어서 사이의 수를 놓으며 말을 잇는다.

 

 “신도우 히카루의 바둑이 너와 비슷한 이유. 그리고, 바둑에 관심 없었다는 그 녀석이 이 바둑계에 들어오게 된 계기와 그 실력까지.”

 

 ‘사이’의 수엔 담겨져 있는 것이 있었다. 오가타는 조금 전 놓았던 백돌들을 하나하나씩 훑어보았다.

 

 “네 수를 이렇게 수십 수백 번씩 직접 둠으로써 네 생각을 읽은 거겠지.”

 

 사이의 수를 둘 때마다 손끝을 타고 사이의 생각이 흘러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수를 두며 어떤 생각을 하고, 그 다음은 어떻게 그리고 있으며, 해서 어떻게 하려하는지. 또한 바둑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까지……. 오가타는 다시 한 번 사이의 돌을 놓아주며 생각했던 것을 말했다.

 

 “여기엔 ‘후지와라노 사이’, 너의 전부가 담겨 있어.”

 

 천여 년이 넘도록 바둑 하나만을 보고서 버텨온 그의 전부가, 그 속에 담겨져 있다. 그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그러한 증거가 모조리 이 수에 담겨져 있다.

 

 […오가…….]

 

 바둑판에 빠질 듯이 집중해있던 오가타가 문득 들려온 소리에 멈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음성은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뜨문뜨문하게 들렸다. 사이의 씁쓸한 눈동자가 오가타를 향한다. 오가타가 하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그를 보았다. 사이의 몸은 어느새 흐릿하게 변하여 사라지고 있었다. 오가타의 갈색 눈동자 속에 사이의 모습이 담긴다. 사라지던 사이의 입술이, 마주했던 그의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그 부드러운 미소로 사이는 오가타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오가타 씨.]

 

 오가타가 바라보던 곳은 텅하니 비었다. 사이가 사라진 그 공간을 바라보며 돌연 그런 생각이 스친다. 사실 ‘후지와라노 사이’는 그 무엇도 아닌, 그의 존재 자체가 ‘신의 한 수’였던 건 아니었을까.

 

 오가타의 시선이 두다 만 바둑판에 떨어졌다. 사이가 두었던 백돌이 흐름조차 뚝 끊긴 채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오가타의 귓가에 사이가 주절거렸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전에 성불할 때 히카루와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떠나야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었는데. 오가타의 귓가에 사라지고 없을 사이의 음성이 들린다.

 

 [이번에는 인사를 하고 갈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에요.]

 

 환한 그의 웃음이 눈앞에 선히 그려졌다.

 

 


 


 

 [비상(飛上) -完-]


 

 

 

 

 


 

 

2020. 11. 24. 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