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바둑왕] 마지막 현신, 그리고 다시.
다시 만난다면요, 히카루. 그때도 저는 당신을…….
“사이, 만약 다음에 또 붙어야한다면 누구에게 붙고 싶어? 역시 아키라같은 아이겠지? 나같이 바둑 모르는 애 말고.”
[음, 글쎄요…….]
히카루의 물음에 사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키라 같은 아이라면, 좋기야 할 거다. 물론 토라지로처럼 제게 두게 해주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워낙에 승부욕이 강한 데다, 재능도 있고 노력파이기까지 하니까……. 제법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 사이의 모습에 히카루가 뚱하니 사이를 흘겼다. 빈말로라도 ‘아니에요, 히카루가 제일이에요!’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아부라곤 뭐에 쓰려고도 없는 녀석이다. 히카루가 칫하고 못마땅하게 입을 삐죽이는 틈에 사이의 입이 열렸다.
[‘10년 후의 아키라’라면.]
“10년 후의 아키라?”
그 입이 내뱉은 것은 상상도 못해봤던 답이었다. 히카루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머릿속에 무엇을 그리는지 사이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네. 10년 후의 아키라요. 그가 얼마나 어떻게 성장했을지도 궁금하고……. 호호.]
“뭐야. 왜 그렇게 웃는 거야, 사이?”
갑자기 말하다말고 의미심장하게 웃는 사이의 모습에 히카루가 얼굴을 구기며 슬쩍 그에게서 물러선다. 사이는 아니에요, 하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이가 속으로 생각했던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았다. 히카루의 시선에서 매번 보았던 아키라가 아닌, 아키라의 시선에서 보는 히카루는 어떠한 느낌일까? 무심코 떠올려본 것인데 꽤나 흥미진진하다. 10년 후, 히카루의 성장을 히카루의 뒤편이 아닌 건너편에서 ‘대국자’의 입장으로서 본다면…….
그것보다 즐거운 것이 또 있을까? 물론 히카루의 뒤편에서 아키라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겠지만 아주 색다른 느낌일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느낌에 사이가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히카루의 시선이 부채 속 가리어진 사이의 입을 찝찝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문득 들었던 생각을 정리하고 눈길을 돌렸을 때, 사이는 딱 맞닥뜨린 히카루의 눈동자에 다시 한 번 웃었다.
히카루. 무언가 기분이 나빴는지 삐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사이는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하나하나, 지금으로선 그 어떤 모습도 빼놓지 않고서 담고 싶었다. 놓쳐버린 지난 세월은 아쉽지만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그래, 앞으로 자신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사이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슬픔을 억누르듯 그의 눈이 지그시 감긴다.
‘만약 제게 다음이 있다면, 히카루의 곁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부디 당신의 성장을 볼 수 있는 자리였으면 좋겠어요. 히카루.’
속으로 히카루를 향해 말을 건네어 보지만 닿을 리가 없었다. 사이는 제게서 휙하니 돌아서버린 히카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신께 바랐다.
신이여. 아주 잠시라도 좋습니다. 단 일국만이라도, 히카루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사이가 기도하던 것을 멈추고 다시 질끈 눈을 감았다. 심경이 복잡하게 얽혀들어 깨끗하지 못한 자신의 마음에 더욱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이미 천년의 세월을 거슬렀는데, 여기서 자신이 더 욕심을 내어 바란다면 그것은 아니 될 일이라고 사이는 뒤늦게 제 자신을 다독인다.
사이의 몸 속 ‘모래시계’는 지금도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키라는 당황했다. 눈앞의 여인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본디 미래란 것은 수백수천 무한의 갈래가 보여야하는데, 이상하게 당신의 미래는 하나밖에 보이지 않아요.”
두 눈을 깜빡이는 아키라에게 여인이 말한다.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당신의 곁에 누가 있죠?”
여인의 새카만 눈이 벙 찐 아키라를 직시한다.
“제… 곁에요?”
속내까지 꿰뚫어 볼 듯한 그 눈동자에 아키라가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떼어 물었다. 못 가봤지 않느냐고, 한 번 가보자는 아시와라의 성화에 못 이겨 등 떠밀리듯 점집에 들어오게 된 아키라였다. 그러나 용하다는 이 점집여인이 하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녀의 말을 수십 수백 번씩 되짚어보며 혹여나 그 말이 설마 ‘자신의 곁에 소름끼치는 무언가가 붙어있다’는 그런 초인적인 이야기는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아키라는 괜스레 슬쩍 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제자리에 두었을 때, 여인은 여전히 아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곁에 무언가가…….”
그녀는 마치 무언가 보일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아키라를 바라보다, 멈칫하고 두 눈을 치켜떴다. 깜빡깜빡 그녀의 눈꺼풀이 몇 번이고 감겼다 뜨이더니, 곧 당황한 기색으로 아키라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젓는다.
“아. 아니. 아닙니다. 잊으십시요. 방금 제가 했던 말.”
그리고는 서둘러 벌여놓았던 카드를 모아 담고 손사래를 친다. 그녀가 그렇게 쓸어 담은 카드들은 아키라의 점괘가 담긴 것들이었다. 당황해서 굳은 아키라에게 그녀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딱딱한 얼굴로 제 할 말만을 내뱉었다.
“끝났습니다. 더 궁금한 것 없으시죠? 그럼 나가세요.”
“예? 아니.”
갑작스런 상황에 아시와라가 입을 열었다. 넋 나간 아키라를 대신해 한 마디 꺼내려던 것이었다. 점집이 처음인 아키라와는 달리 아시와라는 여자친구와 몇 번 온 적 있었기 때문에 본래 이런 식으로 허겁지겁 끝내는 점집이 많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천원이라도 괜찮으니 빨리 복채 내놓고 가버려요.”
그래서 그녀의 ‘이상함’을 이야기하려 했더니만, 그녀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그 둘을 쫓아내었다. 그녀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아시와라도 더 이상 무어라하지 못하고 점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홀린 듯 점집을 빠져나온 아키라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생각했다. 설마 제 곁에 정말로 귀신이라도 붙어있어서 그 여인이 재빨리 저를 내쫓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아키라가 아시와라에게 물었다.
“아시와라 씨. 혹시 제 주변에 뭐가 보이세요?”
“뭐? 무, 무슨 말이야. 무섭게…….”
신경 안 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시와라도 여인의 말이 꽤나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아키라가 묻자마자 아시와라는 질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울상과 닮은 그 얼굴표정에 아키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걸음을 뗐다.
그런데 진짜 무슨 얘기였을까? 자신 곁에 뭐가 있다니. 아시와라를 따라 걸으며 아키라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제 주변을 보았을 때엔 아무것도 없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시와라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고, 해서 아키라는 혹여나 그 여인의 눈에만 보였던 건 아닐까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부터해서 오른쪽, 뒤편까지 모두 보았으나 역시 눈에 밟히는 건 없다. 아키라가 의뭉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갸울이는데 문득 이상한 소리가 아키라의 귓가에 들렸다.
[깜짝 놀랐네요. 아키라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녀한테 물어봤을 텐데.]
아키라의 걸음이 멈추었다. 약간 들뜬 청년의 음성이 이어지고, 눈앞에 하얀 천이 흘러내린다.
[어떻게 저를 깨운 거냐고요. 그나저나 토라지로나 히카루에게 붙었을 때하고는 느낌이 달라서 신기하군요.]
아키라의 숨이 멎었다. 혼잣말하듯 주절거리던 청년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아키라를 보았다.
[앗. 아키라! 제가 보이세요?]
새하얀 옷을 입은 귀신이 아키라의 머리맡에 둥둥 떠서 와아, 소리지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키라는 아시와라와 헤어지고 사이와 함께 귀가했다. 아키라가 정신이 없어보였기 때문에 사이는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 떠들었다. 집에 들어설 때까지 사이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아키라는 금방 말문을 텄다. 제 이야기를 아키라가 쉽사리 믿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믿어주는 탓에 사이는 놀랐다. 아키라에게 들어보니 지금 아키라의 나이는 스물다섯. 자신이 사라지고 딱 10년 후였다. 사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십여 년쯤 전 히카루와 함께 했을 때 자신이 바라고 또 바랐던 일.
‘귀신으로써 다른 이에게 붙는다면 10년 후의 아키라에게 한 번 붙어보고 싶다’고 했던가. 사이는 히카루와 이야기하며 거의 지나가듯 했던 자신의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때 지었던 히카루의 삐친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선히 그려진다. 히카루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당장이라도 히카루를 보고 싶어서 사이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지금 곁에 있는 것은 아키라였다. 사이의 눈이 기대에 차 반짝이며 아키라의 이곳저곳을 훑었다.
[몰라보게 자랐군요? 아키라!]
아키라는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키라가 이렇게 멋지게 성장했다면 히카루도 만만찮게 성창했으리라. 사이가 바동거리며 중얼거렸다.
[얼른 히카루도 보고 싶은 걸요~]
“저…….”
아키라는 난감한 표정으로 사이를 보았다. 아키라의 난감함을 느꼈는지 사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한다.
[괜찮아요, 아키라.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히카루가 얼마나 성장했을지 너무나 기대돼서… 호호.]
갑자기 나타나서는 빨리 히카루에게 가자고 하면 과연 누가 순순히 응해줄까? 사이는 옛날 히카루와 토라지로의 경우를 떠올리며, 당황했을 아키라를 배려했다. 머뭇거리는 듯싶던 아키라가 말을 꺼낸다.
“그럼 히카루와 두었던 대국이라도 복기해드릴까요?”
사이는 아주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라는 가장 최근 두었던 것부터 차근차근, 사이가 원하는 만큼 히카루와의 대국을 복기해주었다. 히카루가 했던 말이라던가, 두 개의 수를 가지고 둘이 다투었던 일이라던가, 결국 내렸던 결론이라던가, 아키라는 잊지 않은 모든 것을 사이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사이도 아키라에게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했다. 10년도 더 된 것 같은 그 옛날, 심지어 아키라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의 사소한 이야기까지 말이다. 사이가 웃을 때마다 어색한 미소만 짓던 아키라도 조금씩 자연스러운 웃음을 띠게 되었다. 그 또한 어린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릴 때 히카루는 그랬었지, 자신 또한 그만큼 어렸었지, 이것저것 추억을 떠올려보던 아키라가 가벼운 숨을 돌린다. 아키라의 시선은 사이에게 닿아 있었다.
히카루가 저런 사이를 본다면 무척이나 좋아하겠지. 한창 히카루의 바둑에 집중한 사이를 바라보며, 아키라는 히카루가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사이를 다시 만난다면, 그에게 그의 바둑을 더 둘 수 있게끔 해주고 싶어. 난 아직도 가끔씩 그게 후회 돼.’
“사이 씨.”
아키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네? 네. 아키라.]
얼마나 집중했던지 사이는 떠듬떠듬 답한다. 아키라는 뒷말을 이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다 보시면, 저하고 대국할까요?”
[엇, 정말요? 와아! 돌은 아키라가 둬주셔야 하는데요!]
아키라의 말에 사이는 정말 기뻐서 방방 뛰었다. 아키라는 ‘어찌 보면 강아지 같다’던 히카루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히카루한테 들었어요. 두고 싶으실 때 말씀해주세요.”
[지금, 지금 둬요!]
환하게 웃음이 핀 사이를 따라 아키라가 웃었다. 호들갑스런 사이의 음성에 못 이겨 아키라의 손은 벌써 아까부터 바둑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키라도 히카루도 모두 많이 성장했군요……. 뿌듯하네요!]
한 수 한 수 집중해서 두던 사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키라는 마저 한 수를 두며 말없이 웃을 뿐이다.
[둘 모두 제가 못 본 사이 많은 대국을 해왔겠죠.]
그 과정을 보지 못해 아쉽다며 입가를 가리고 입맛을 다시는 사이의 모습에 아키라는 말문을 열었다.
“히카루는 작년에 오가타 씨에게 이겼어요. 그래서 10단 타이틀도 땄고, 저하곤 왕좌 자리를 두고 대결하기도 했습니다.”
[와! 그게 정말인가요, 아키라? 더 기대되는걸요, 히카루를 만날 것이.]
사이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아직 대국이 끝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아키라는 사이가 가리키는 곳에 돌을 놓고, 또 자신을 수를 두었다. 대국은 서서히 끝을 드러냈다. 아키라는 다시 사이의 흑돌을 매만지며, 그가 다음 수를 두길 기다렸다. 그러며 말했다.
“명인의 타이틀을 따면, 히카루는 당신에게 그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했지요.”
사이가 아키라의 말에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키라는 아직 두지 못한 돌을 그러쥐며 뒷말을 이었다.
“히카루는 당신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아키라는 기억한다. 히카루는 항상 말하곤 했다. ‘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히카루는, 만약 당신을 만나게 되면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요. ‘미안해, 사이.’”
그 사람은 자신의 아주 절친했던 벗이자.
“‘그리고 고마워.’”
존경해 마지않았던 스승이었다고. 아키라는 히카루를 대신하여 사이를 보았다. 그는 아키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아키라 또한 아직도 히카루가 제 곁에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아키라는 사이의 눈을 마주본 채 말했다.
사이는 불현듯 스치는 불안감에 말을 잇지 못하고 아키라를 응시했다. 모든 것이 멈춘 세상에서 아키라의 입술만이 떼어지는 것 같았다.
“히카루는…….”
아키라가 눈을 감았다. 사이의 저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자면, 그렇게도 ‘사이사이’ 노래를 부르던 히카루가 떠올랐다. 잠시 멈춘 아키라의 음성에 사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덩달아 그의 숨이 멈추었다.
“그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년 전 5월 5일, 히카루 그가 스물넷이 되던 해.
“히카루는 이제 만날 수 없어요, 사이 씨.”
그는 이생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믿을 수 없다는 사이의 표정에 아키라의 목이 메인다. 아키라는 쓰게 웃었다.
“사이, 만약 다음에 또 붙어야한다면 누구에게 붙고 싶어? 역시 아키라같은 아이겠지? 나같이 바둑 모르는 애 말고.”
[음, 글쎄요…….]
히카루의 물음에 사이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제법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 사이의 모습에 히카루가 뚱하니 사이를 흘겼다. 빈말로라도 ‘아니에요, 히카루가 제일이에요!’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아부라곤 뭐에 쓰려고도 없는 녀석이다. 사이에게 바둑이 싫다는 둥 화를 냈던 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은가. 히카루가 괜스레 칫하고 못마땅하게 입을 삐죽이는 틈에 사이의 입이 열린다.
[‘10년 후의 아키라’라면.]
“10년 후의 아키라?”
히카루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머릿속에 무엇을 그리는지 사이는 설핏 미소를 짓는다. 히카루는 그런 사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10년 후의 아키라요. 그가 얼마나 어떻게 성장했을지도 궁금하고…….]
생각에 잠긴 사이는 어딘가 슬퍼보였다. 히카루는 가만히 사이를 지켜보다 곧 그의 입가에 흐르는 이상한 웃음에 와락 얼굴을 구겼다.
“뭐야. 왜 그렇게 웃는 거야, 사이?”
그러며 슬쩍 물었다. 그 본심이 무엇인지, 히카루는 내심 궁금했다. 하지만 사이는 아니에요, 하고 고개를 저으며 웃기만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모르겠어서 히카루는 게슴츠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를 가린 저 부채가 이렇게나 거슬릴 줄이야. 삐친 마음을 풀지 못하고 속으로 꿍얼대던 히카루가 다시 사이와 눈을 마주쳤다. 사이는 웃었다.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히카루는 팩하니 고개를 돌리고는 가던 길을 갔다.
그래. 억울하고 분하지만 만약 다음이 있다면, 히카루 또한 ‘사이에겐 자신이 아니라 아키라 같은 아이가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히카루는 그가 사라지고 다시 만나게 될 그 날까지 매일처럼 바랐다.
신이여. 부디 그의 바람을 들어주세요.
신은 그런 히카루의 바람을 이루어주셨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노라, 사이는 눈물을 흘렸다. 끊긴 듯한 기억 속에서 아키라의 음성이 멀어지고, 그는 다시 살아있는 영혼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만 것을 알았지만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사이는 다시 한 번 바랐다.
떠나간 인연을 잡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히카루를 처음 만났던 그때로 다시 되돌리고 싶다고.
사이는 눈을 감았다. 그때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이, 빨리 와~ 안 그러면 두고 간다~”
귀신도 꿈을 꿀 수 있을까? 아이의 음성에 사이가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모습에 그는 숨을 멈추고, 그토록 그리웠던 이름을 불러보았다.
[히카루?]
아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왜? 사이?”
당연한 듯 들려오는 그 음성에 사이는 아이를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내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되뇌는 사이의 모습에 아이는 어리둥절해하였지만 사이는 그저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잊지 않으려 지금의 기억을 꼭꼭 마음 속에 눌러담았다.
이것이 한낱 신의 변덕이라 하여도, 그래서 다시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져버릴 꿈이라 할지라도, 그는 이 신기루와 같은 기적이 그저 감사하였다.
[히카루.]
“으응.”
[히카루….]
“아잇, 왜 자꾸 불러?”
몇 번이고 돌아오는 대답에 사이는 연신 웃음꽃을 피웠다. 그가 기분이 좋아보이니 다행이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그가 이상행동을 보이니 떨떠름한 모양이다. 그래도 좋았다. 사이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그날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답을 아이에게 해주었다.
[히카루, 기억하시나요? 저번에 제게 물었던 거요.]
아이는 답이 없었다. 그래도 사이는 입을 뗐다.
[다시 만난다면 누구와 함께하고 싶냐고 하셨지요?]
진심을 담아서. 사이의 눈동자가 히카루의 말간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만약에… 만약에 다시 만난다면요, 히카루.]
그렇게 아이의 눈동자를 담아내며 사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도 저는 당신을…….]
사라져가는 아이의 모습을 향해, 지나간 추억을 향해.
[당신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히카루.]
간절히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이제는 잡을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사이의 귓가에 멤돈다.
‘역시 그렇지? 내가 최고지, 사이?’
[히카루…….]
다시 불러보아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사이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