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냥 돌을 쏟은 것뿐이라니까요? 

 

 

 할아버지를 따라서 바둑교실을 갔는데, 너무 지루한 나머지 할아버지한테 졸라서 초콜렛을 사왔다. 바둑기원에 달린 가게라 그런지 초콜렛도 바둑알 모양이네? 신기하게 생각하며 하나씩 아껴 먹고 있는데 누군가 툭 쳐서 초콜렛을 바둑판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오…! 이걸 네가 둔 거니?”

 

 감탄하며 묻는 할아버지에게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대단하구나, 어떻게 이런 수를!”

 

 아니? 아닌데요? 내 말은 씨알도 듣지 않는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도움을 청하려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오! 이건, 도우야 명인의 아들 아키라도 1초 정도는 고민한다는 그 묘수 풀이 아닌가!”

 

 저기요, 그 정도면 고민 안 한 거 아닌가요.

 

 “대단하군! 키요시, 네가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단다.”

 

 눈을 빛내며 내 어깨를 붙잡는 할아버지 덕에 손에 들린 바둑알 초콜렛은 이제 아주 쏟아져버리고 말았다. 어디로? 남이 대국을 두고 있는 바둑판 위로.

 

 우수수 쏟아지는 돌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오… 이렇게 두는 방법이 있다니.”

 

 “아시와라 선생님, 키요시가 둔 수를 좀 보세요!”

 

 “제법이군요! 키요시, 어디서 바둑을 배운 적 있니?”

 

 아뇨. 절대. 네버. 앞으로도 네이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엣헴, 크게 헛기침을 하여 좌중의 이목을 쓸어모았다.

 

 “이 녀석은 2살 때부터 나랑 같이 두었지!”

 

 뭔 헛소리예요, 할아버지. 오목이나 했겠지.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보는데 주변은 왠지 더 소란스러워졌다.

 

 “이거, 도우야 아키라 같은 인재가 또 한 명 탄생하는 겐가!”

 

 아니라니까? 난 바둑의 비읍자도 몰라요, 이 사람들아. 도우야 아키라가 누군데.

 

 “키요시, 이번에 어린이 바둑대회가 열린다던데 나가볼 생각 없니?”

 

 “생각 없는데요.”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 아시와라인지 아쉬워라인지하는 젊은 남자 선생님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응? 상대가 될 애가 없다고?”

 

 저기요, 제 말은 대체 어디로 간 거죠? 상대가 아니라 생각이 없다고요. 내가 아는 거라곤 바둑판이 네모낳다는 것밖에 없다고. 젊은 선생은 벌써부터 귀가 먹은 건지 몇 번이고 내 말을 곡해하여 들었다.

 

 “키요시. 거기 가면 분명 너도 즐겁게 바둑을 둘 수 있을 거야!”

 

 “아뇨,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요.”

 

 “전혀 그럴 상대가 없을 것 같다고?”

 

 나 누구랑 얘기하니? 대화가 안 돼. 이 사람은 글렀어. 다급히 도움을 청하기 위해 두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키요시는 될성부른 애라니까!”

 

 “떡잎부터 남달랐지~!”

 

 하나같이 같은 반응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먹던 초콜렛이 목에 걸린 채로 대화하는 것 같은 괴로움을 계속 느껴야할 것 같아서 울며 겨자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렁뚱땅 대회 당일이 되었다. 진짜 얼렁뚱땅.

 

 “힘내라, 키요시!”

 

 “그래, 키요시! 너라면 할 수 있단다!”

 

 아뇨. 전혀 못할 것 같은데요. 마주한 아이의 눈동자가 아주 불타올라서 찔끔했다. 대회가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부담 가는 어른들의 말소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절대 안 질 거야.”

 

 두 주먹을 불끈 쥐는 녀석의 시선을 회피했다. 부디 제발 그래주라.

 

 까만 것은 돌이요, 하얀 것도 돌이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멍하니 바둑판을 보았다. 다행히 내가 까만 돌은 아니라서 먼저 둘 일도 없다. 잠자코 녀석이 두는 것을 지켜보다가 대충 따라두었다.

 

 이쯤인가? 아니면 이쯤 두면 되나? 어디다 던져야 잘 던졌다고 소문이 날까? 이리저리 손을 방황하는데 옆에서 앞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꼬맹이가 아쉽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 아깝다. 그 위에 둬야지!”

 

 “어?”

 

 아니, 이 자식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채 입을 틀어막는 녀석이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꼬마야! 무슨 짓이니!?”

 

 잘했어. 굿보이, 굿보이. 저 멀리 시험관에게 끌려가는 아이를 따듯하게 바라보았다.

 

 

 

 

 아까 그 아이가 훈수를 두는 바람에 나는 다시 처음부터 바둑을 두어야했다. 물론 나는 돌을 둔 게 아니다. 던졌지.

 

 “졌습니다. 우씨, 아까 이길 수 있었는데…….”

 

 근데 왜 네가 고개를 숙이냐. 푹 수그려진 고개에 심지어 분하다는 듯 울먹이며 팔로 얼굴을 문대는 녀석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뭔데. 왜 갑자기 포기하는데.

 

 “키요시, 역시 네가 이길 줄 알았단다!”

 

 “아니….”

 

 난 바둑은 내팽개치고 오목 두고 있었다고? 곁에서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장하다며 나를 얼싸안았다. 떨떠름하게 할아버지를 밀어내자 무슨 오해인지 할아버지는 기특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차! 아직 대국이 끝나지 않은 아이도 있는데 내가 너무했구나. 알려줘서 고맙다, 키요시.”

 

 납득시키길 포기하고 나는 내가 거의 던지듯 두었던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아, 하나만 더 두면 다섯 개 채우는 건데. 입맛을 다시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속닥속닥 귓속말을 걸어왔다.

 

 “키요시, 다음 대국도 자신 있니?”

 

 아뇨. 이번에도 오목 둘 건데요. 귀에 바람이 들어가 간지러워서 손으로 벅벅 긁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 할아버지를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하하! 그래,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거지? 기대하마.”

 

 아니? 이 할아버지가? 꽉 내 손을 붙잡고 가는 통에 손사래도 못치고 끌려갔다. 금방이라도 손을 빼내고 싶었지만 이따가 핫도그를 사주기로 할아버지의 지갑과 약속했기 때문에 얌전히 있었다.

 

 

 

 

 속았다. 할아버지가 다음 대국을 두려면 머리를 잘 굴려야한다며 낫토집에 데려왔다. 머리 잘 굴리는 거랑 낫토랑 대체 뭔 상관인데.

 

 으적으적 낫토를 씹으며 썩은 표정을 했다.

 

 “긴장할 필요 없어, 키요시 네 실력이라면 우승까지도 문제 없다.”

 

 저기요, 여기 대국장 근처 음식점이라서 대회 참가하는 부모님들 다 모여있거든요. 슬쩍 눈을 굴리니 아니나 다를까 눈에 불을 켜고 이쪽을 보는 사람들 때문에 켁하고 사레가 들렸다. 최대한 시선을 모으지 않기 위해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크게 웃는 바람에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하하하, 코웃음을 칠 정도라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아, 제발. 손주 지금 숨 넘어가게 생겼거든요.

 

 

 

 

 낫토라니. 낫토라니. 게다가 그것마저도 다 못먹었다. 먹은 거 같지 않은 밥을 핫도그 대신 먹고, 차마 할아버지를 노려볼 수는 없어서 할아버지 지갑이 있을 바지주머니를 열심히 노려보았다.

 

 “기합이 잔뜩 들어갔군. 역시 대회에 데려오길 잘했어.”

 

 뭐라고요? 이게 대회 때문인 걸로 보여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들었는데 한 아저씨랑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앗. 아까 그 꼬마애 혼내던 아저씨다.

 

 “흠….”

 

 그 굿보이는 어디로 갔을까 의아해서 가만히 쳐다봤더니 아저씨가 의미심장하게 안경을 쓸어올렸다. 그런 아저씨한테 살집이 좀 더 있는 아저씨가 다가와서 무어라고 속삭였다.

 

 “오가타 선생님, 저 아입니다.”

 

 “그렇군요… 유심히 봐야겠습니다.”

 

 두 아저씨가 속닥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눈이 썩을 거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으 보기만 해도 덥다, 더워. 질린 얼굴로 이리저리 대회장을 둘러보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밀었다.

 

 “키요시, 키요시. 자, 저기를 보렴.”

 

 뭐야. 왜 밀어요. 떨떠름하게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눈을 빛내며 한쪽을 삿대질하고 있었다.

 

 “다음 대국은 저 자리에서 저 아이와 두게 될 거란다. 어서 가렴.”

 

 아니, 또 두라고? 한 번만 두는 게 아니었어? 질색하며 반박하려는데 퍽퍽 할아버지의 매운 손이 등을 쓰다듬는다. 켁, 또 사레가 들려서 헛숨을 삼키자 할아버지는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밀었다.

 

 “이 정도는 우습단 거로구나.”

 

 뭔소리예요. 햄스터가 해바라기씨 껍데기 까먹는 소린가. 하하. 이 넋이 내 넋인가 남의 넋인가 허허롭게 웃었다. 그걸 뭐라고 생각했는지 할아버지는 뿌듯해하였다.

 

 “역시 우승까지 가야 우리 키요시가 만족하겠지?”

 

 우승이라니. 그게 바둑알 초콜렛 먹기 대회라면 생각해볼게요. 하지만 이건 아니지. 질린 얼굴로 다시 눈앞에 당도한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주한 아이의 눈을 슬쩍 회피했다.

 

 “이겨주겠어…!”

 

 뭐야. 살려줘. 어린애 눈이 왜 이렇게 살벌해요.

 

 

 

 

 뭔가 고심하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하는 애들 앞에서 난 기가 다 빨려서 안색이 해쓱해졌다. 난 죽겠는데 할아버지가 또 사고를 쳤다.

 

 “흠… 역시 우리 키요시를 이길 아이는 여기 없나보군”

 

 광역 어그로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손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 주변에 있던 수백 명이 갑자기 나를 눈빛으로 죽일 듯 쳐다본다.

 

 “할아버지….”

 

 제발. 울먹이며 할아버지를 불렀다. 그런데 그걸 또 어떻게 오해한 건지 할아버지는 나를 들어안으며 토닥였다.

 

 “키요시의 실력을 더 펼칠 곳이 필요하겠어. 그래! 이번 3월에 원생 시험이 있댔지! 거기서 네 실력을 보여주자꾸나.”

 

 실력 그런 거 없고요. 일단 있대도 안 보여줘도 되는데요…. 내뱉지 못한 말이 할아버지의 웃음소리에 파묻혀 사라져갔다.

 

 

 

 

 기어코 할아버지가 날 원생시험엘 데리고 왔다. 무슨 기보 세 개를 적어서 제출하라는데 주변에 바둑 두는 애가 없다고 했더니 이미 원생인 애들 세 명에게 양해를 구해 대국을 둬달라고 한 모양이다. 처음 보는 얼굴이 셋이나 몰려들었다.

 

 “네가 이번 어린이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애니?”

 

 얼떨결에 바둑판 두고 마주한 애 하나, 구경하려고 양쪽에 앉은 애 둘. 얘네도 애들이긴 한데 나보다 나이가 적어보이진 않아서 형이라고 불러야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애들은 지들끼리 맞나보다고 속닥거렸다.

 

 “얘가 그 모든 대국을 불계승했다는 애구나!”

 

 “실력이 기대되는걸.”

 

 “듣기로는 백 수 이상 둔 적이 없다던데.”

 

 “오, 대단한데?”

 

 그게 뭐야. 백? 백숙? 닭이 왜 여기서 나와. 멍하니 녀석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내 앞에 주어지는 돌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백을 쥘게. 너는 아직 원생이 아니니까.”

 

 “그래, 실력을 좀 볼까?”

 

 “걔네들이랑 우리랑은 실력이 천지차이라고!”

 

 지네들끼리 주거니받거니하며 빨리 돌을 놓으라느니 어쩌니하는데…. 까만 돌을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먼저야?”

 

 난 내가 먼저 시작한 적이 없다고? 시작을 어떻게 두어야할지 몰라 떨떠름하게 묻자 애들이 멈칫했다.

 

 “그래.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하지만 쉽지 않을걸.”

 

 아니, 난 그냥 물어봤잖아요.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앞에 앉은 녀석의 눈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며 대국장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으. 할아버지의 광역 어그로에 살벌한 눈길을 받아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바람에 눈가를 비볐다.

 

 “이래봬도 나는 1군이니까.”

 

 1군이든 2군이든 난 모르겠고. 일단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아무데나 돌을 내던졌다. 탁한 소리를 내며 대충 집어든 돌이 바둑판 위에 올라갔다.

 

 어라, 중간이네. 하긴 오목의 선점은 역시 중앙이지.

 

 머리를 긁적이며 빨리 다음 수를 두라고 하려는데 고개를 들어 마주한 애들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천원에 뒀어…….”

 

 “이 자식…!”

 

 예? 제가 뭘 잘못했나요? 너무 세게 던졌나요? 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와서 덜덜 떨며 애들을 살폈다. 나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는데.

 

 “코웃음? 너, 우릴 보고 코웃음 친거냐?”

 

 얘넨 또 뭐라니. 콧물이 나서 훌쩍인 건데요.

 

 “대국이 끝나고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흠칫하고 어깨가 들썩였다. 와, 눈에서 빛이 나. 내 표정이 진짜 울상이 되자 애들은 또 무슨 생각인지 씨근덕거리면서 바둑판에 집중한다. 따악, 백돌이 흉흉한 기세로 바둑판 위에 올라간다. 그리고 빨리 다음을 두라는 듯이 나를 보았다.

 

 아 몰라. 대충 둬. 나는 이제 생각하길 관뒀다.

 

 어디다 둬야할지 모르겠으니 흑돌을 쥐고 눈을 감았다 뜨면 보이는 곳에 두기로 했다.

 

 몇 번을 그랬을까 애들이 말이 없어졌다.

 

 들켰나. 막 둔 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왼쪽부터 한 명씩 차례대로 눈치를 보는데 맨 마지막에 있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졌습니다….”

 

 예? 누가요? 제가요? 동시에 내 앞에 앉은 애가 푹 고갤 숙였다.

 

 “너 진짜 세구나…. 하지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좋지 않아.”

 

 “그래. 나는 이 형보다 등수가 더 높아. 이번엔 이겨주마.”

 

 흥 콧김을 뿜는 두 번째 아이의 모습에 나는 정리되어지는 돌을 슬프게 내려다보았다. 한 판에 이렇게 오래 걸린다니. 금방 끝난다면서요 할아버지…….

 

 이따가 이거 끝나고 컴퓨터 게임하려고 했는데. 4시에 아이템 무료나눔 이벤트 한댔는데!

 

 글렀다. 글렀어. 우씨. 갑자기 화가 나서 씩씩 치솟은 화를 속으로 삼켰다.

 

 “그래. 긴장하라고. 난 저 형보다 강하니까.”

 

 이번에도 핫도그 사준다는 약속 안 지키기만 해봐라. 할아버지고 뭐고 다 삐져버릴거야. 애들이 앞에서 뭐라고 쫑알댔지만 나는 손에 쥔 돌을 핫도그 막대를 그러쥐듯 꼬옥 붙들었다.

 

 “이번엔 네가 백돌이다.”

 

 차라리 이게 초콜렛이었으면 와그작와그작 먹고 나가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번에 내 앞에 들이밀어진 백돌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지들끼리 꿍덕대며 세 번째 아이까지 내 앞에서 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졌다고 시무룩하게 말하고서 종이를 내밀었다.

 

 “자. 기보는 네가 적는 거야. 너… 건방지긴 하지만 실력은 진짜니까.”

 

 “원생으로 들어오길 기다릴게.”

 

 아니. 그럴 일 절대 없을걸. 거절의 눈으로 아이들을 보고 어느새 손에 들린 종잇장을 대충 가방에 쑤셔넣었다.

 

 “그럼 또 보자.”

 

 뭐? 또 보자고? 나는 그게 현실이 될까봐 필사의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함께해서 안 즐거웠고 우리 다신 보지 말자.

 

 

 

 

 캬, 내가 또 색칠공부 하나는 끝내주지. 모눈종이에 흑백을 다닥다닥 동그라미를 그려넣고 아무렇게나 색칠했다.

 

 뭔 숫자를 쓰라는데 아까 눈 깜빡인 횟수만큼 쓰면 되는건가 싶어서 대충 그린 동그라미 위에 눈을 깜빡인 횟수를 적었다. 음! 완벽해!

 

 “…좀 악필이긴 하지만 알아볼 수는 있으니. 3국 모두 불계승이로군요. 원생 아이들을 상대로 대단합니다!”

 

 여튼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빛내는 아저씨의 말에 할아버지가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든다.

 

 “키요시! 원생으로 합격이…!”

 

 예? 합격? 그 말에 필사의 도리도리스킬을 시전했다. 합격이란 말은 이딴 곳을 또 와야한다는 얘기잖아! 질린 내 표정을 보고 할아버지가 하던 말을 멈추고 더 밝은 표정을 지었다.

 

 “키요시, 이 녀석! 바로 프로 시험이 보고 싶은 게로구나!”

 

 아니? 어떻게 하면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요?

 

 “흠! 좀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이 아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저기, 선생님.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렇습니까? 하하! 역시, 그렇다면 키요시. 다음 프로 시험에…….”

 

 프로? 프으로오? 저기요, 어르신들. 저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인데요. 나만 빼고 언급되어지는 내 미래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두 어른을 바라보았다.

 

 “장차 명인이 될 수도 있겠구나!”

 

 “포부가 커다란 게 아주 사내대장부답군! 든든한 손주를 두셨습니다.”

 

 제 꿈은요? 제 황금백수라는 원대한 꿈은요? 내 절망스런 외침은 두 어른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아니, 이게 몇 번째야!

 

 

 

 

 나는 공기다.

 

 나는 먼지다.

 

 할아버지 손에 붙잡혀 끌려온 프로시험 대기실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험을 시작한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다들 시험장으로 부산하게 이동했다.

 

 좋아. 다들 패기가 넘쳐. 이대로라면 내가 빨리 지고 끝날 수 있겠지. 그래!

 

 “일단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

 

 빨리 가서 게임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근데 왠지 주변이 싸늘한데, 혹시 에어컨 온도가 몇이죠? 여름인데 왜 이렇게 춥지. 으슬으슬한 팔뚝을 쓸어내려는데 누가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갔다.

 

 “비켜!”

 

 바가지머리의 어린애가 나를 노려보곤 씩씩대면서 시험장으로 들어간다. 아주 위풍당당하구만. 역시 빨리 집에 갈 수 있겠어! 샐쭉 웃으며 팔을 쓰다듬었다. 으, 추워.

 

 

 

 

 나는 누구보다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할애비는 우리 키요시가 해낼 줄 알았단다!”

 

 “가을에나 심사가 끝나겠지만 이제 거의 확정 아닙니까, 아버지?”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는 어디. 여긴 누구. 멍하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니, 프로기사가 뉘집 개이름도 아니고.

 

 밥을 먹는 식탁 위에 떠억하니 얹어진 대전표를 보고 나는 말을 잃었다.

 

 “연승무패라니, 도우야 아키라도 이렇지는 못할 게다!”

 

 저기, 전부터 자꾸 도우야 아키라 도우야 아키라 하시는데 그게 대체 뉘신지요. 따지고 싶은 것을 참고, 꾸역구역 넘어가지 않는 밥을 입속에 우겨넣었다. 더 이상은 여기 있을 자신이 없다! 난 나가겠어!

 

 그래봤자 초등학생이, 아니 어느새 중학생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어린애인 내가 홀로 갈 곳이라고는 집 안에있는 내 방뿐이었다.

 

 흑흑. 난 왜 행복할 수가 없어.

 

 

 

 

 어영부영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특활부를 정하라는데 뭐가 뭔지 몰라서 이리저리 둘러볼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한 교실을 지나치는데 하필이면 그게 바둑부여서 질색을 하며 거기서 몸을 떨어뜨렸다.

 

 으. 바둑… 바둑…!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아서 와그작 얼굴을 구기고 재빨리 갈 길을 가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어. 왜 불안하지. 어라. 왜 이렇게 몸이 떨리냐. 딱딱하게 굳어서 고개를 들었다.

 

 “넌… 이번에 프로가 됐다는 그 아이구나.”

 

 안경을 쓴 차가운 표정의 남학생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키 차이로 보나 포스로 보나 3학년인가? 왕창 선배인 것인가? 나는 그런 사람에게 찍힌 거고?

 

 “우리도 진지해. 그렇게 비웃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이번에 들어온 도우야 아키라도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만…….”

 

 아니, 근데 비웃지 않았거든요. 겁먹은 거거든요. 입을 열어서 변명을 하려는데 이 놈의 남학생은 또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보다가 교실 안쪽 한켠에서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과 대국하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 저 단발머리 애가 그 도우야 아키라야?

 

 내 눈이 이글거렸다. 잡았다 요놈. 내 평생의 원수. 저 녀석 때문에 바둑의 비읍자도 모르는 내가 할아버지한테 아주 그냥 달달 볶였다. 까득 이를 갈자 옆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너도 도우야에게는 관심이 있나보지? 역시 저 녀석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예? 찾아오다뇨? 길을 잃은 것뿐인데요. 나는 멍청하게 선배로 보이는 남학생을 올려다봤다. 얘 혼자 뭐라는 거니. 나는 당장 저 아키란지 뭔지를 피해서 줄행랑 칠 예정이거든요.

 

 “그래, 어쩌면 너라면 도우야 아키라에게 상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팔든? 방금 뭐시라? 내가 입을 떡 벌리든 말든 남학생은 안경을 고쳐쓰고 사나운 기세를 줄이고 말했다.

 

 “지금은 선생님과 대국하고 있는 중이니까 다음에 녀석을 만나면 우리를 대신해서 한 방 먹여주도록 해.”

 

 음. 그 한 방이 딱콩으로 알밤을 때리는 거라면 최대한 가능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때리고 도망쳐야지. 두 손을 꽉 쥐었다. 좋아. 혹이 남을 정도로만 살짝 치고 튀는 거다!

 

 

 

 

 비록 도우야 아키라 녀석에게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기 때문에 딱콩 해주진 못했지만 방금 아주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다.

 

 “프로가 되면 학교를 많이 빠지게 될 건데, 정말 괜찮니 키요시?”

 

 “네.”

 

 아무렴요.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데. 나는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좋아졌다.

 

 “역시, 바둑에 진심이구나. 이 할애비는 우리 키요시를 진심으로 응원하마.”

 

 아니아니, 그건 아니죠. 창백해진 얼굴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떡하니 마주친 눈에는 희망과 꿈이 가득해서 부담스러운 마음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래! 어서 올라가서 바둑공부를 하렴!”

 

 아니라고요! 가서 게임 할 거야! 공부 싫어! 속으로 울며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이 상황은 뭐지? 두 눈을 깜빡이며 낡은 바둑부 창고에서 옹기종기 모인 네 명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옹기종기 모인 셋과 동떨어진 채 책을 정리하고 있는 한 아이를. 저거 도우야 아키라 아닌가.

 

 “뭐야.”

 

 설마 왕따? 괴롭히는 거야? 와씨. 와. 진짜 비겁하다. 그거 가지고 되겠냐! 싸움은 17대 1이어야지! 물론 나는 17쪽이고. 근데 여기 왜케…….

 

 “더러워.”

 

 켈록. 흩날리는 먼지를 손으로 젓고 질색하는 눈으로 창고 안을 훑었다. 그러자마자 몰려있던 세 명의 아이들이 희번뜩한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는… 후지사키 키요시?”

 

 “더럽다고 했냐, 지금?”

 

 예? 갑자기 왜 눈이 그렇게 살벌해지시죠. 반면에 도우야 아키라로 보이는 아이가 아련한 눈빛으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보았다. 뭔데. 뭐야. 왜 다들 그렇게 봐. 이건 뭔가 익숙한 각인데. 서늘한 감각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안 돼. 싫어요. 하지 마세요…!

 

 “너도 이 자식처럼 실력 있다고 우릴 무시하는 거냐?”

 

 아… 각이 왔다. 망조각.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제멋대로 결정짓고는 세 명의 아이들은 씩씩댔다. 아니, 벌떡 일어나서 다가오는 걸 보니까 키가 나보다 크다.

 

 하하. 아이가 아니라 선배님들이셨군요. 제가 몰라봤습니다. 일개 중생은 이만 물러나도 될까요?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나려는데 입가가 파르르 떨릴 뿐 웃어지지가 않는다.

 

 “너, 이…!”

 

 심오한 작업을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저는 이만….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려는데 누군가와 부딪혔다. 고개를 돌리자 깔끔한 숏컷을 단정히 빗어내린, 엄청 멋있는 여자 선배가 나를 보았다. 헉, 살았다. 선생님, 아니 선배님 살려주세요.

 

 “어, 너는… 그런데. 이게 무슨… 너희 뭐하고 있는 거야?”

 

 나를 아는 척하려던 선배는 이내 창고 안을 보더니 살벌한 표정으로 세 명의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나를 압박하던 애들은 어느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히익 비명을 삼켰다.

 

 “멍청이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런 치사한… 세 명이서 도우야를 괴롭히고 있었다니.”

 

 기어코 선배에게서 엄호령이 떨어졌다.

 

 “도우야, 네 머린 장식이니? 이 뻔한 괴롭힘을! 여긴 내가 치울 테니까, 너는 정정당당하게 둬. 그리고 박살내버려!”

 

 뭔지는 모르겠지만 옳소! 선배님 말씀이라면 다 옳지. 아무렴. 고개를 주억이며 뒤로 물러났다. 잔뜩 화를 내던 선배가 뒤늦게 나를 돌아보았다. 앗차… 빨리 도망갔어야하는데. 싸움 구경이 너무 재밌어서 그만. 뒤늦게 달아나기 위해 한 걸음 떼려는데 선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하아… 말려줘서 고마워, 후지사키 키요시랬나?”

 

 이, 이러면 빼도박도 못하는데.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안다냐. 멍청히 눈을 껌뻑이며 선배를 보자 그는 전과는 달리 상냥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울컥 그 상냥함에 눈물이 났다. 엄청 무서웠어요….

 

 “실력만큼이나 마음씨도 착하구나. 이래저래 말이 많긴 하지만, 일단은 도우야도 우리 부원이니까. 우리 부원을 신경써줘서 고마워.”

 

 예? 아니, 신경을… 제가… 그, 고맙다고 하셔서 고맙긴 한데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당황해서 선배를 올려다보니 아주 자애로운 미소로 내 등을 떠밀어주었다.

 

 “이제 나한테 맡기고 너는 가도 돼. 고마웠어.”

 

 아싸.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그 자리에서 날랐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후지사키!”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아, 불길한데. 삐그덕거리며 돌아보니 무려 도우야 아키라가 나를 보고 있었다. 끼야아아악! 도우야 아키라라니!

 

 “고마워. 네 이름, 기억할게.”

 

 아니아니아니, 기억하지 마. 질겁하며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소름이 돋은 팔을 소중하게 감싸안으면서 말이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다들 중간에 졌다며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정말로 할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던 ‘전승으로 프로시험 합격’을 해버렸다. 그러고 나니 신초단이니 뭐니 뭔가 시끌시끌해졌다.

 

 “우리 키요시, 가서 떨지 말고 잘 해야한다.”

 

 음… 할아버지 손이 더 떨리는데요. 멀쩡한 내 옷깃을 여민답시고 막 당기시는데 엄마가 다려준 하나뿐인 정장이 다 구겨져버렸다. 챙겨준다고 챙겨주시는 거니까 차마 그 손길을 거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뭐가 뭔지 몰라서 긴장을 할 일도, 할 수도 없었다.

 

 신초단이 뭔데. 내가 아는 거라고는 내 상대로 우리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어떤 영감님이 나온다는 것뿐이었다.

 

 구와바라인지 구해줘요인지 TV에만 나오면 저사람이 그렇게 대단하다며 할아버지가 칭송을 마다않던 그 영감님 말이지. 흠. 머리를 긁적이며 유… 뭐시기 방에 들어섰다. 한쪽 벽에는 무슨 심오한, 이치가… 뭐? 무슨 방? 여튼 어려운 방이라고 적혀있었다.

 

 멀뚱멀뚱 주변을 구경하는데 나를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착석하세요.”

 

 아니꼬운 눈으로 나를 보는 게 무서워서 시무룩한 얼굴로 영감님 앞에 앉았다. 언제 들어와서 앉았대, 이 영감님은. TV로만 보던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신기해서 요리조리 바라보자, 구와… 여튼 혼인보라고 했던 그 영감님이 껄껄대며 웃었다.

 

 “프로 시험에서 전승을 했다지? 꼬마야. 기대하마.”

 

 네? 영감님이 제 시험 성적을 어떻게 아세요? 동네방네 다 소문이 난 거야? 아니 근데 저보다 키가 작으신 거 같은데 꼬마라니요. 어느새 쑥쑥 자란 나는 동산위에 올라서면 언 듯 160cm는 될 거다. 그러니까 꼬마라고 하기엔 다 컸다 이말씀. 뚱한 얼굴로 영감님을 노려보았다.

 

 어른에겐 실례니까 쬐끔만 노려보았다.

 

 그리고 시작된 시합은 얼렁뚱땅 끝났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두는 와중에 갑자기 할아버지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쳐다봐서 후다닥 눈을 피한다는 게 푹 고개를 숙인 게 됐다.

 

 덕분에 자동으로 패배 처리가 되어서 신초단인가 뭔가하는 거창한 이름의 대국은 금세 끝나버렸다.

 

 휴. 집 가야지. 빨리 끝나서 기분이 좋다. 가벼운 걸음으로 룰루랄라 방을 나서는데 뒤에서 영감님이 나를 불렀다.

 

 “꼬마야. 네 이름이 무엇인고?”

 

 꼬마 아니라니깐요. 쒸익쒸익 절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꾹 참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후지사키 키요시입니다.”

 

 그래도 어른한텐 예의 바르게 해야지. 노인공… 뭐더라. 대충 얼버무리듯 이름을 내뱉고 꾸벅 인사하고는 마저 걸음을 떼었다. 오늘은 힘들었으니까 엄마한테 게임 한 시간만 더 하면 안 되냐고 허락 받아야지.

 

 

 

 

 뭔가 통지서? 무슨 통보가 날라왔다. 대시합 어쩌구 하는데. 이게 뭐지. 걍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대충 바둑알 두면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이기면 이길수록 대국을 더 많이 해야된다네?

 

 나 안 해.

 

 최대한 대충 빨리 두고 적당한 때 졌다고 하고 끝내버려야지. 좋았어. 두 주먹을 불끈 뒤고 빠르게 돌을 막 놓았다. 근데 내가 둘 때마다 맞은 편에 앉은 사람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아니, 왜? 설마 또 졌다고 하려고? 안 돼! 내가 먼저 할 거야!

 

 두려던 돌을 내려놓고 재빨리 고개를 숙이려는데 늦었다.

 

 “졌….”

 

 “졌습니다…!”

 

 제길. 새치기 당했어. 울며 겨자먹기로 승패결과를 시험관에게 보고하러 갔다.

 

 “연승이라며? 몇 번째야? 20번? 22번?”

 

 “24연승이래. 조금 있으면 구라타 4단의 기록도 깨겠어.”

 

 쑥덕거리는 소리에 더 울 것 같았다. 이러다 게임할 시간도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눈물이 나오려는지 입이 자꾸 비죽여서 손으로 막았다.

 

 “웃는 것 좀 봐. 진짜 얄밉다. 누가 확, 저 건방진 꼬맹이 코 좀 꺾어줬으면 좋겠다.”

 

 “그래봤자 도우야 아키라만하겠냐.”

 

 뭔가 익숙한 이름이 들린 거 같은데. 슬쩍 고개를 들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뭐야. 왜. 뭔데. 나도 알려줘.

 

 

 

 

 단수가 2단으로 올라갔다. 나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둬야하는 대국 수도 늘어갔고 행사랍시고 이리저리 치여버렸다. 지도기를 둬달라는데 뭔 지도기예요, 선생님. 저는 지도도 제대로 못 외웠어요. 일본 옆에 한국이 있고 그 옆에 중국이 있다는 것만 간신히 안다고.

 

 “저는….”

 

 식은땀을 흘리며 내빼려는데 뭔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지사키?”

 

 뭐지. 뭔데 쎄하지. 끼긱거리는 고개를 돌려 불안한 마음과 떨리는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끼야아아악! 도우야 뭐시깽이다! 도망, 도망쳐야 해!

 

 질겁하며 뒤로 내빼는데 그런 내 손을 녀석이 덥썩 잡았다.

 

 “반가워. 너도 지도기를 두러 왔구나. 너라면 분명 차분히 하나씩 둬주면서 잘 알려주겠지.”

 

 으응, 그런 거 아닌데 일단 내 손 좀 놔줄래. 꼬옥 붙잡힌 손목에서 한가닥한가닥 녀석의 손을 떼어내고 도망….

 

 “지도기도 좋지만, 나랑 한 번 두지 않을래?”

 

 치지 못했다. 히익 새된 비명을 삼키며 절규했다. 차라리 지도인지 지도긴지 그걸 두겠어! 내 표정을 대체 뭐라고 생각했는지 이 놈의 웬수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이끌었다.

 

 “떨리는구나? 나도 기대된다. 저쪽으로 가자. 구와바라 선생님께서 네 얘길 한 적이 있어. 구와바라 선생님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두었다며?”

 

 뭔 소리예요. 구와… 뭐? 누구요? 전에 나한테 키 작다고 놀리던 그 영감님 말하는 건가. 아니 근데 불안하게시리 내 얘기를 왜 나 없는 데서 해! 속으로 원망의 말을 내뱉으며 울상을 짓는데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오오, 작은 도우야 선생님과 후지사키 선생님이 붙는 건가!”

 

 “오, 떠오르는 두 신성들이!”

 

 “나는 도우야 아키라 2단에게 걸겠네.”

 

 “나는 후지사키 키요시 2단에게!”

 

 갑자기 뭔데. 뭔데 이 분위기. 초조한 나와는 달리 아키란지 뭔지하는 녀석은 익숙하다는 듯이 웃으며 바둑판 앞에 앉았다.

 

 “자, 두자. 너와는 늘 둬보고 싶었어.”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근데 눈이… 저기요, 혹시 눈에서 불을 뿜는 초능력이라도? 거절하고 싶었으나 두려움으로 입가가 파르르 떨려와서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

 

 “웃는 걸 보니 자신 있나보네. 돌부터 가를까?”

 

 살려줘. 눈이 더 무서워졌어…….

 

 

 

 

 음. 내 눈앞에 숙여진 이게 정수리겠지. 누구 정수리냐고?

 

 “오오… 후지사키 2단이…….”

 

 “도우야 2단이 지다니.”

 

 “아쉽군, 공식 대국이었다면 더 멋진 승부가 되었을 텐데.”

 

 도우야 아키라. 녀석의 정수리였다. 단발머리 소년의 정수리가 눈앞에 한참을 숙여져 있다가 들렸다.

 

 “후지사키. 그거 알고 있니?”

 

 아니아니아니. 잠깐만. 눈이 왜 더 살벌해졌죠? 근데 뭘 알아? 섬뜩한 느낌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나 갑자기 울고 싶어졌는데. 다들 나가주시면 안 될까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다음 대시합에서는 내가 네 상대라는 거.”

 

 이글거리며 내뱉는 그 말 덕에 주변이 더 시끄러워졌다. 어느새 다른 프로기사들까지 몰려와서 쑥덕대서 숨 쉬기가 힘들어졌을 지경이었다. 간신히 입을 벌려서 숨을 크게 쉬었는데 녀석이 헛소리를 했다.

 

 “하품을 할 정도라고? 그땐, 이렇게 지지는 않을 거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후지사키.”

 

 뭐라는 거야 이 웬수야. 노려봐주고 싶었으나 그 눈빛이 정말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찔끔이다. 많이는 안 났다. 진짜다.

 

 

 

 

 저기, 이거 기권하면 안 되나요?

 

 “드디어 다시 너와 두는구나.”

 

 살벌한 아키라의 목소리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는데, 그거보다 더 큰 것은 녀석이 돌그릇을 쏟는 소리였다.

 

 와장창.

 

 와. 바닥을 구르는 까만 돌들의 향연에 입맛을 다셨다. 갑자기 바둑알 초콜릿이 먹고싶네. 1층에 팔던데 이따 사먹어야지.

 

 좋아. 대충 두다가 빨리 고개 숙이고 졌다고 하면 금방 사먹으러 갈 수 있다!

 

 빨리 대국을 끝내기 위해 바닥에 널브러진 녀석의 돌을 재빨리 주워주었다.

 

 “…너는 상냥한 건지, 건방진 건지 모르겠어.”

 

 뭐시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거리며 들려왔는데 내용이 분간이 안 가서 귀를 후볐다. 녀석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웃어. 무섭게.

 

 

 

 

 이번엔 기필코 저 녀석보다 먼저 졌다고 할 테다. 굳은 결심으로 바둑판을 노려보았다. 녀석이 머뭇거리는 낌새가 보이면 바로 고개를 숙이는 거야!

 

 “봐줄 생각은 하지 마.”

 

 힉. 정곡이 찔려서 나도 모르게 크게 어깨를 들썩였다.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고 녀석을 봤더니 녀석의 눈이 아주 살벌했다.

 

 “나도 저번처럼 순순하지 않을 거야. 끝까지 둬.”

 

 역시 초능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 마른침을 삼키며 녀석의 눈길을 피했다.

 

 

 

 

 음. 맛있다. 까드득 까드득 바둑알을… 아니 바둑알 초콜릿을 씹으며 기원을 나서는데 등 뒤가 싸늘하다. 뭔가 싶어서 뒤를 돌아봤는데.

 

 힉.

 

 괴기 영화처럼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는 어르신의 시선에서 아까 마주했던 도우야 아키라의 살벌함에 배는 되어보이는 살기가 느껴졌다.

 

 “너구나. 아키라를 이겼다는 아이가.”

 

 누… 누구세요? 딱딱하게 굳어서 올려다보는데 차디찬 눈으로 아키라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 설마… 설마설마…….

 

 도우야 아키라네 아버지야? 가서 일러바친 거야? 졌다고? 너어, 도우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이 자식. 이번에는 내가 후다닥 졌다고 고개까지 숙여줬는데 이러기 있냐! 씩씩거리며 화를 삭혔다.

 

 “아키라를 이길 수 있는 또래의 아이가 그 아이 말고 또 있을 줄이야.”

 

 뭔데. 또 누군데. 도우야 아키라가 뭔데 자꾸 이래. 아, 그럼 나 말고 그 애한테 가세요. 강한 거부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물러서는데 감히 도망칠 수 없는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네 실력을 보고 싶구나.”

 

 실력이요. 그런 거 없는데요…. 당장이라도 달려나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걸음을 옮기는 어르신을 따라갔다. 여기서 도망쳤다가는 금방이라도 목이 뎅강 썰릴 거 같았다.

 

 “도우야 선생님, 잠시….”

 

 그런 나를 구해주는 이가 있었으니. 누군가 아키라네 아버지를 불러세우곤 무어라무어라 말을 건네었다. 힐끔 나를 보던 어르신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침음하였다.

 

 “흠… 아쉽게 되었구나.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헉, 살았다! 나를 두고 돌아서는 두 사람에,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크게 숨을 들이켜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들고 있던 초콜릿으로 시선을 두었다.

 

 “아.”

 

 제길. 다 녹았어. 울먹이며 손 안에서 눌러붙은 초콜릿의 사체를 보았다. 먹을 수 없겠지…. 낙심하며 그것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역시, 재수없어. 저런 애가 그런 바둑을 둔다니.”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는데 내용은 또 안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누군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소년이었는데, 머리가 삐죽삐죽하였다. 와, 일부러 왁스 한 통을 다 써도 저렇게는 안 되겠다. 그게 신기해서 빤하게 바라보니 소년은 와락 얼굴을 구기며 쿵쿵대는 걸음으로 건물 안쪽으로 사라졌다.

 

 뭐야. 왜 다들 나만 보면 저래. 시무룩해서 건물을 빠져나왔다. 빨리 집 가서 게임할래…….

 

 

 

 

 저번에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오늘 새로 산 바둑알 초콜릿을 입안에 막 집어넣으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후지사키 키요시.”

 

 도우야 아키라였다. 역시 이 녀석은 내 철천지 원수다. 바둑알을 입에 넣으려던 손을 턱하니 붙잡는 녀석의 손길을 나는 빤하게 노려보았다. 이거 안 놓냐? 힘을 주어 뿌리치려는데 도리어 녀석이 화가 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저번 승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아.”

 

 고개를 드니 도우야 아키라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번에 봤던 이 녀석 아버지랑 똑같은 눈이다. 뭐야… 난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그냥 납득해주면 안 될까. 괜스레 찔끔해서 시선을 피하는데 녀석이 내 어깨를 턱하니 붙잡아돌렸다.

 

 “왜 중간에 돌을 던진 거야? 누가 봐도 네가 이기고 있었는데!”

 

 화가 났는지 그 목소리가 커졌다. 아, 글쎄 이기고 지고 난 그런 거 잘 모른다니까. 차라리 오목을 두고 말지.

 

 “차라리 오목을 두고 말지.”

 

 아. 잠깐. 나 지금…. 온몸이 싸하게 식었다. 입밖으로 속마음 내뱉은 건 아니겠지. 설마. 하하. 서늘한 감각에 끼긱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시야에 담긴 아키라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진심이 아닙니다. 제 입이 방정이었습니다. 살려주세요.

 

 

 

 

 내 초콜릿은 또 사망했다. 도우야 녀석이 아주 거칠게 나를 이끌고 기원으로 향하는 바람에 바닥에 널부러졌던 내 소중한 바둑알 초콜릿을 아련하게 떠올렸다.

 

 “이번엔 제대로 둬.”

 

 “아니….”

 

 사납게 말하는 녀석 탓에 거절하려고 입을 떼었는데 녀석이 더 무섭게 노려보았다. 눈에서 죽여버린다빔이 나올 것 같았다.

 

 “이번엔… 이번엔 제대로 이겨줄 테니.”

 

 네. 조용히 하겠습니다. 또 저번처럼 말실수를 할까봐 입을 다물고 힐끔힐끔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녀석은 사납게 돌을 가리고 내게 백돌을 건네었다. 녀석의 무서운 눈과 또 마주쳤다. 호다닥 그 시선을 피했다. 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아니, 방심할 실력이 없다니까. 우물쭈물하며 돌을 쥐었다. 녀석의 흑돌이 거세게 바둑판 위에 내려앉았다. 그 소리가 심장을 철렁하게 하여 화들짝 고개를 들었더니 나는 아직 두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벌써 돌을 쥐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날 죽여라. 한숨을 쉬며 아무데나 돌을 놓았다. 곧장 달려드는 흑돌에 나도 바로 백을 던졌다. 이번에도 녀석의 손은 빠르게 내 다음 수를 이었다.

 

 난 몰라.

 

 고개를 젓고 나 또한 그 속도에 맞추어 대충 돌을 놓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까만 건 칼이요 하얀 건 내 마음이다. 죽어라 내 백돌들아.

 

 넋을 날려보내며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녀석의 바람대로 먼저 고개를 숙이지는 않기로 했다. 그랬다가는 진짜 지구 끝까지 쫓아올 것 같으니까. 대신 녀석이 하는대로 빠른 속도에 맞추어 눈에 띄는 곳에 톡톡 돌을 놓아주었다. 내 엉터리 같은 돌을 녀석이 모두 잡아줄 때까지 기다리면서. 좋아. 이 정도면 대충 바둑알 쏟은 것보다도 엉망진창이다. 만족하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내 돌을 잡기는커녕 약올리듯 피해간다.

 

 아니? 이 자식이? 날 놀리는 건가 싶어서 녀석을 보니 녀석의 표정은 진지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느려지던 녀석의 손은 이내 완전히 멈춘 채였다. 돌을 내려놓고 녀석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졌습니다.”

 

 아니. 왜. 뭔데.

 

 

 

 

 학교를 합법적으로 땡땡이 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게임방에서 이것저것 오락기를 가지고 놀다가 만족스럽게 길을 나섰다. 슬슬 다음 대국이 있을 시간이었다. 이번 대국은 뭐… 타이틀전 예선이라는데 여튼 할아버지가 타이틀전이란 타이틀전은 다 해봐야지! 하면서 강제로 신청해가지고 별의 별 대국 일정은 다 잡혔다.

 

 물론 지면 빨리 일정이 없어질 거라는 말에 의욕을 가지고 임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고개를 숙여야지.

 

 그렇게 결심한 것은 모두 허사가 되었다.

 

 “졌….”

 

 “졌습니다.”

 

 젠장. 또 늦었어. 이대로라면 이틀에 한 번은 대국하게 생겼다고! 울상으로 한숨을 삼키며 원망의 눈으로 상대를 보았다. 상대는 나를 본 척도 하지 않으며 밖으로 나섰다. 나빴다. 진짜 나빴어. 졌다고 말 좀 하게 해주지 왜들 이렇게 입이 빠른 거야.

 

 씩씩대며 돌을 정리하고 서둘러 대국실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게임할 시간을 벌기 위해 집까지 달려간다. 잠 대신 게임이다…!

 

 

 

 

 ***

 

 

 

 

 후지사키 키요시.

 

 명인 도우야 고요의 아들 도우야 아키라와 함께 새로이 떠오르는 유망주로서 유일하게 그 또래의 라이벌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였던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도우야 아키라보다도 월등한 실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의미하기도 했으나, 그 뛰어난 실력에 반비례하여 성격이 가망이 소위 말해 예의를 밥 말아먹은듯 무시를 일삼았기 때문에 그를 좋게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보아라, 지금도 말이다.

 

 가차없이 처참하게 짓뭉개버린 대국을 두고서 간신히 버틸 궁리를 하고 있는 상대에게 그가 천천히 입을 뗀다. 그 입에서 흘러나올 법한 것은 무엇일까. 언제인가는 비웃음이었고, 언제인가는 패배를 시인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졌습니다.”

 

 후지사키 키요시의 입술이 이내 완전히 열리고, 무언가를 내뱉으려할 때. 이번에는 또 어떠한 칼날이 날아들 지 몰라서 그의 상대인 야마노 4단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같은 프로라지만, 아무리 전도유망한 아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처참히 무너져버린 바둑으로는 비소든 압박이든 그 어떠한 것도 견딜 수 없었기에.

 

 야마노 4단은 기억한다. 후지사키 키요시가 도우야 아키라 2단에게서 ‘졌다’고 고개를 숙이며 씩 웃던 입매를. 상대를 우롱하듯이, 누가 보아도 그의 승리가 확실한 바둑을 두어놓고.

 

 당신들의 간절한 승리따위는 흔쾌히 넘겨줄 수 있다는 듯이 한없이 가볍던 그 행태를 말이다.

 

 그 외에도 원생들을 무시하고 그 싹을 처참히 짓밟아버렸다던가,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나이로 처음 치르는 프로기사채용시험에서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고 지루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던가하는 후지사키 키요시의 일화는 유명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추가된 일화에는 도우야 아키라와 대국을 두느니 ‘차라리 오목을 두고 말지’라며 상대를 무시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야마노 4단은 마주한 아이의 눈을 보고 그것이 거짓이 아님임을 확신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눈동자는 결코 어린아이의 순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까만 눈동자가 저를 짓누르는 듯하여 야마노 4단은 서둘러 돌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후지사키 키요시를 상대로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차마 삼키지 못하였던 마른침을 뒤늦게야 삼켜내며 숨을 골랐다.

 

 ‘후지사키 2단에게 바둑은 그저 남을 깔아뭉개는 수단밖에 되지 않는 것만 같다.’

 

 알고 지내던 누군가가 얼마 전 술자리에서 중얼거렸던 그 말이 야마노 4단의 뇌리에 스쳤다.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어린애가 뭘 알겠냐고, 그냥 버릇이 없는 것 아니냐고 헛웃음을 들이켰지만 그는 이제 그 의견에 동의하였고, 더하여 말을 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후지사키 키요시는 평범한 어린애가 아니다. 악령에 씌인 바둑의 신이라면 모를까.

 

 

 

 

 ***

 

 

 

 

 “장난하냐?”

 

 꾸벅 졸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두 눈을 치떴다. 새빨개진 채로 나를 노려보는 상대의 시선에 아차하고 고개를 내렸다.

 

 “아.”

 

 거기에는 내가 졸다가 흐트려놓고 만 바둑알들이 잔뜩이었다. 으. 어제 연계 퀘스트하다가 새벽 6시에 잤더니 한 시간밖에 못 자서 깜빡 졸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지금 고개를 숙이고 졌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겠지?

 

 “졌습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잠에 취한 몸을 일으켜서 헤롱대며 대국실을 나섰다. 뒤에서 뭔가 우지끈, 험악한 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라 돌아보니 조금 전 내 상대였던 남성이 내게 달려와 멱살을 쥐었다.

 

 “바둑을 우습게 알아도 유분수지!”

 

 덕분에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두려움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을 못 자서 퀭한 눈에 지진이 일었고 노곤노곤하던 몸에 갑자기 충격이 가해져서 저릿저릿한 고통이 뒤따른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때였다. 덜덜 떨고 있는 내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뻗어왔다. 내 멱살을 잡은 남성의 손을 누군가가 꽉 쥐어 떨어뜨리고서 비틀거리는 내 어깨를 잡아주었다.

 

 “폭력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며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안경을 쓴 누군가는 내 멱살을 잡은 남성에게 냉랭하게 말을 던졌다. 와. 무서워. 아니, 근데 왜 눈은 나를 보세요. 마주친 안경너머의 눈동자가 정말 너무너무 무서워서 찔끔하며 눈을 회피했다.

 

 “오가타 9단…! 하지만, 이 건방진 녀석이!”

 

 “바둑에는, 바둑으로 보여주어야지요.”

 

 그 사이에 안경 쓴 사람에게 붙들린 남성이 무어라무어라 잔뜩 성을 냈다. 나를 도와준 사람이 남성을 다독였다. 무슨 말을 했는지 순식간에 화를 가라앉힌 남성은 이내 나를 보고 썩은 미소를 짓고는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잠을 자지 못해서 잠겼는데, 방금 멱살까지 잡혀서 걸걸해진 목소리로 그 사람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근데요, 선생님. 선생님도 좀 무서운 거 같은데 저 도망 좀 쳐도 되겠습니까?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꼬마야… 아니, 후지사키 2단이라고 해야겠군.”

 

 얼핏 듣기로 오가타 9단이라고 했던 사람이 나를 끌고 빈 기원으로 왔다. 옥상으로 따라와의 바둑버전인가. 무서워! 무섭다고! 속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까만 돌이 담긴 통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네 실력을 좀 봐야겠어.”

 

 예? 이렇게 갑자기요? 저 지금 잠깐 놀라서 잠이 깨긴 했는데요. 툭 치면 그대로 기절잠 할 거 같거든요. 제 충혈된 눈이 보이지 않으신가요.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탁소리가 나게 백돌이 담긴 그릇을 자신 쪽으로 가져가며 지그시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돌을 깔 필요는 없겠지. 아키라에게 ‘오목이나 두라’고 했을 정도니까.”

 

 아뇨. 그런 말 안 했는데요…. 까만돌과, 하얀돌과, 무서운 그 눈을 번갈아 보다가 못 견디겠어서 입을 열었다.

 

 싫은데요. 싫어요. 하지마세요. 안 할래요.

 

 여러 가지 거절의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으나 볼을 찌를 듯한 그 시선에 나는 결국 울상으로 돌을 쥐었다. 그래도 한 마디 하기는 했다.

 

 “속기로 해주세요.”

 

 이것만큼은 나도 양보할 수 없다. 빨리 돌 던지고 자러 갈거니까. 울음을 삼키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할아버지가 바둑바둑 노래만 안 불렀어도 이러지 않았을 거 같은데. 문뜩 ‘할 수 있단다, 키요시!’하고 호탕하게 웃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이게 주마등인가. 할아버지, 손주 졸려 죽어요….

 

 

 

 

 호다닥 돌을 얹어놓으면서 문득 내가 이 사람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경… 안경 쓴 사람… 어디서 봤지? 고개를 갸울이며 기억을 더듬는데 퍼뜩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아, 할아버지랑 어린이바둑대회 나갔을 때 잠깐 마주쳤던 사람.

 

 “역시, 그냥 운은 아니라는 건가.”

 

 턱을 쓸며 그는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손이 멈춘 것을 보아하니 진짜 돌 던져도 되겠지? 머리를 긁적이며 읊조렸다.

 

 “졌습니….”

 

 “아니. 끝까지 두도록 해.”

 

 어딜 도망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희번뜩한 눈으로 그가 나를 보았다. 히익. 말하던 것을 삼키고 딸꾹질을 했다.

 

 “겁먹은 척해도 소용 없다.”

 

 따악,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바로 코앞에 두어지는 백돌의 소리에 울상을 지었다. 척이 아니라 진짜 겁먹은 거 맞거든요. 뭣보다 졸려 죽을 거 같아요…. 두 손으로 꾹 얼굴을 눌렀다가 크게 숨을 골랐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진짜 속기다.

 

 굳게 결심하며 빠르게 돌을 쥐었다. 대충 오른쪽에 몇 번 두다가 가운데에 삼삼 만들고 끝내야지.

 

 

 

 

 오가탄지 이가탄인지 그 사람한테는 진짜로 진짜로 더 못 두겠다고 사정사정을 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와. 진짜 졸려 죽을 거 같애. 다음에 또 다시 밤 새서 게임하나봐라. 내가 사람이 아니지.

 

 그리고 나는 멍청이를 하기로 했다.

 

 응, 사람 아니야. 그러고도 이틀 밤 레이드를 달리다니. 때꾼한 눈으로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와. 우와. 바둑판이 막 빨랫줄처럼 흔들려. 엄마한테 안 들키려고 바둑 공부했다고 거짓말하고 게임한 거긴 한데 이건 좀 양심에 찔린다.

 

 좋아. 진심으로 둬볼까. 어떻게 두는 거랬지?

 

 처음으로 돌을 쥐고 진심으로 고민했다. 근데 진짜 진심으로 제대로 둔다는 게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구기고 일렁이는 바둑판을 노려보는데 갑자기 눈앞에 정수리가 들이밀어졌다.

 

 “졌습니다….”

 

 뭔데. 나 아직 시도도 못해봤다고.

 

 

 

 

 언제더라. 게임하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방에 들어와서 급히 인터넷으로 바둑공부하는 척하며 인터넷바둑 사이트를 켜놓은 적 있는데 그게 오늘도 필요할 것 같다.

 

 “키요시, 오늘은 네가 공부하는 거 구경해도 되겠니?”

 

 “네?”

 

 “우리 키요시가 어떻게 공부하는지 궁금해서 그렇지.”

 

 엄마야…. 아니, 엄마는 지금 내 앞에 계시지. 당황해서 눈만 굴리고 있는데 옆에서 할아버지가 왜 그러냐며 엄마를 말렸다.

 

 “왜 그러냐. 컴퓨터로 바둑이라도 두겠지. 방해하지 말거라.”

 

 “그치만, 아버님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어험험.”

 

 왜 말리다 마세요, 할아버지. 어째서 은근슬쩍 엄마랑 같이 저한테 오시는 거예요. 주춤거리는 나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서는 두 분 덕분에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숨겨놓았던 게임창을 슥삭 꺼버리곤 페이크용으로 올려두었던 바둑 사이트에 로그인했다.

 

 아이디가 뭐였더라. 급해서 한 손으로 막 만들었던 거 같은데. 머리를 긁적이며 1초정도 고민하다가 손이 닿는대로 대충 쳐보았다. 뭐, 그때도 이렇게 만들었을 테니까.

 

 ‘sad’

 

 로그인 된 아이디에 놀라서 황급히 뭐라도 눌러댔다. ‘sad’라니 중2병도 아니고 뭐야. 아니, 일단 중학생이기는 한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혹시라도 봤을까봐 엄마랑 할아버지 눈치를 살짝 봤는데 못 본 모양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모니터를 봤더니… 어라? 나 대국 시작 버튼 안 눌렀는뎁쇼.

 

 “어머, 바둑 두는 걸 보여주려는 거니?”

 

 이, 이게 아닌데. 휑하니 펼쳐진 격자무늬 바둑판에 나는 어물쩡거리며 변명도 못하고 굳었다. 급해서 누른다는 게 아무한테나 대국신청을 해버린 모양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그냥 수락하는 사람이 어딨냐 상대편 양반아!

 

 “그래, 어서 실력을 보여줘봐라! 얼마나 컸는지 보자!”

 

 어음. 할아버지. 키 말씀하시는 거라면 10센티는 컸어요. 그런데 실력은 원래 없어서 클 건덕지가 없걸랑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만 재촉하는 엄마랑 할아버지 덕분에 눈물을 삼키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보자… 이름이….”

 

 할아버지가 좀 더 제대로 보고 싶으셨는지 모니터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닉네임칸에 있는 아이디와 대국 설명에 대한 것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서 할아버지를 말리려는데 이미 다 봐버린 뒤였다.

 

 “‘sai’? ‘sad’? 어떤 게 키요시 네 이름이니?”

 

 sai는 또 뭐야. sad건 sai건 둘 다 이상해. 나 같이 대충 짓는 애가 또 있다니.

 

 “음… ‘sai’가 네 이름이니? 무슨 뜻이냐? 코뿔소?”

 

 뭐야, 나도 몰라요. 알아도 말 안 할래요.

 

 

 

 

 그 후로 가끔씩 엄마한테 게임하는 걸 들킬 거 같으면 그 인터넷바둑 사이트를 애용하고는 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고, 하필이면 그 상대가 겁나게 유명한 사람이 걸려버렸고, 또 그게 입소문을 타서 관전자 수가 엄청나졌다.

 

 뭐 이런 거지 같은 우연이 다 있담.

 

 어떻게 해야 게임을 빨리 끝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빨리 끝내야 엄마를 밖으로 내보내고 하다만 퀘스트를 깰 텐데. 순간 대국포기버튼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잠깐 그 쪽으로 손이 갔다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전에 대충 돌 던졌다가 글로벌언어로 욕을 들어버려서 함부로 포기버튼도 못 누르겠다. 딸깍딸깍 대충 돌을 놓으며 심란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았다.

 

 ‘toya koyo’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거 그, 도우야 아키라네 아버지 이름 같은데.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아….”

 

 애써 부정하다가 갑자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치솟아서 머리를 짚었다. 뭐가 ‘아니겠지’야? 진짜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왔지! 아오. 엄마 앞이라서 몸부림을 칠 수도 없고. 속으로 씩씩대며 한숨을 쉬는데 옆에서 엄마가 미안한 음성으로 말을 걸어오셨다.

 

 “왜 그러니? 생각보다 어려운 상대인가보구나. 엄마가 방해가 된다면 나가줄까?”

 

 ‘나가줄까?’ 그 말에 나는 앞말이고 뒷말이고 듣지 못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고 나가셨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 대충 끝내고 게임 할 수 있다!

 

 신나서 마우스를 클릭했다. 우다다다 두고 바둑판의 공백이 반도 남지 않았을 즈음, 이쯤이면 돌을 던져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겠지싶어서 홀딱 포기버튼을 누르고 넷바둑을 종료했다.

 

 “아.”

 

 그리고 다시 켠 게임을 보며 다시 한 번 이마를 부여잡고 탄식했다. 마을에서 종료 안 해서 죽어버렸다. 내 소중한 장비까지 떨구고… 레벨까지…….

 

 절망하며 게임을 끄고 책상 위에 엎드려 울음을 삼켰다. 그리곤 씩씩대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도우야 아키라는 두 번 다시 없을 내 원수다. 다음에 만나면 진짜 꿀밤 먹여주고 튈 거야…!

 

 

 

 

 “아버지와 어제 대국했다면서.”

 

 아니? 갑자기 뭔 소리야, 다짜고짜. 뜬금포로 내가 대국하는 장소를 찾아와 말을 걸어오는 도우야 아키라를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바라보았다.

 

 이 말은 즉, 어제 그 ‘toya koyo’가 이 녀석 아버지가 맞았다는 거고 그거를 이 녀석은 봤다는 거고 그리고 이 녀석은 그 상대 ‘sad’가 나라는 걸 알고 있다는 말인데.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맞나보네. 후지사키, 네가 ‘sad’지?”

 

 아니나 다를까, 그 입에서 들려오는 확신에 찬 목소리에 곧장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머리를 쥐어 뜯을 듯이 움켜쥐었다.

 

 괴로워. 쪽팔려. 내 닉네임 구려. 진짜 구려어어어!

 

 “아버지는 말씀해주지 않으셔. 대체 왜 네가 거기서 돌을 던진 건지.”

 

 왜 던지기는, 게임하려고 던졌지. 쪽팔리니까 이제 가줄래…? 내게 계속 뭐라고 말을 걸어오는 녀석에게 나는 손짓했다. 훠이훠이. 부끄러우니까 얼굴은 꼭꼭 숨긴 채였다. 하지만 녀석은 굳이 내가 쪽팔린 걸 보고 싶었나보다.

 

 “말해줘. 어디까지, 뭘 봤기에 거기서 돌을 던졌….”

 

 내 팔을 탁 낚아채고 나와 눈을 맞추며, 눈빛으로 나를 짓누를 것처럼 노려보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 손을 뿌리치며 빽 소리쳤다.

 

 “다 죽게 생겼는데 그럼 어떡하냐!”

 

 씩씩거리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마주친 녀석의 눈이 놀람으로 휘동그래졌지만 알 게 뭐냐. 내 아이템…. 우씨.

 

 

 

 

 억울하다. 녀석이 멍때리고 있을 때 딱콩을 해줬어야하는데. 얼마 전 일을 떠올리며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그리곤 버스에서 내려 오락실을 가기 위해 넷카페를 지나가려는데….

 

 ‘sai’

 

 내 눈이 잘못됐나. 아닌데. 나 눈 완전 쌩쌩한데. 양안 2.0이란말야. 멍청하게 창너머로 보이는 내 또래 아이의 컴퓨터화면을 바라보았다.

 

 저 쪽팔린 이름을 대놓고 넷카페에서 쓴다고?

 

 입을 쩍 벌리고 그 아이를 바라보는데 문득 이상한 것과 눈이 마주쳤다. 뭐지? 신기룬가? 눈을 비비고 다시 깜빡이는 사이 내가 보고 있던 아이가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정면으로 마주친 아이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뭐지. 엄청 뻣뻣하게 다시 컴퓨터를 보고 슬쩍 다른 창을 켜는데….

 

 다 봤다, 임마. 내 눈이 얼마나 좋은데. 부모님 몰래 게임하기 스킬 만렙인 나한테 통하겠냐. 가소로워서 코웃음을 쳐주었다.

 

 

 

 

 “저기, 혹시 봤어?”

 

 불안하게 나를 쫓아오는 노란앞머리, 그러니까 자기 말로는 신도우 뭐시깽이라고 했던 애를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어 쫓아냈다.

 

 “그래, 다 봤어. 봤으니까 저리 가. 시끄러워.”

 

 “그…!”

 

 내가 대답해주면 순순히 나가떨어져주기를 바랐는데, 녀석은 도리어 더 안절부절하며 더 필사적으로 나를 따라왔다.

 

 아니, 나 오락 좀 하자고. 지금 신기록 갱신이 코앞인데, 너 때문에 간발의 차로 2등이라고! 짜증스럽게 녀석을 흘겼다.

 

 “내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할까봐 그러냐? 그게 협박할 거리라도….”

 

 되겠냐? 좀 창피한 닉네임이긴 한데 그 정도는 아니지. 웃겨서 입가를 씰룩이며 궁시렁거리는데 갑자기 녀석이 창백한 안색으로 내 어깨를 덥썩 붙들었다. 아. 아아… 1점… 1점이… 1점 남았는데……. 멍하니 오락기 화면을 바라보는 내게 녀석이 다급히 외쳤다.

 

 “협박?! 둬달라는대로 둬줄 테니까 협박만은…!”

 

 뭐라고? 장난 똥때리나. 두기는 뭘 둬. 질색하는 표정을 하며 녀석의 손을 쳐냈다.

 

 “싫어.”

 

 바둑은 싫다, 이 악귀야. 물럿거라.

 

 

 

 

 내가 왜 여기에. 넋을 놓고 끌려온 곳에서, 넋을 놓고 내 앞에 놓인 바둑판과 돌을 바라보았다.

 

 “대신, 비밀이야. 도우야나 오가타 선생님이나… 여튼, 다른 사람들한테 내가 ‘sai’라고 절대 말하지 마. 알겠지? 후지사키 키요시.”

 

 너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데. 그보다 네가 다 불고 있거든요. 여기 사람 많아요, 이 녀석아. 자기 닉네임이 쪽팔린 줄은 아나보네.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이 못마땅하여 썩은 표정으로 녀석을 보다가 바둑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아니….”

 

 근데 여기까지 와서 바둑을 두자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타이틀예선에서 도망쳤는데? 대국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하려는데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반사적으로 부르르 떨며 고개를 드니 사나운 기세로 변한 녀석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뭐야. 너 눈깔을 왜 그렇게 떠.

 

 “잘 부탁합니다.”

 

 아니, 난 잘 부탁 못하겠는데. 강제로 쥐여진 까만 돌을 울며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대시합 일국 끝내고 간신히 도망쳐 나왔는데 또 바둑이냐. 나 운다. 울 거야.

 

 

 

 

 하얗게 불태웠다…. 바둑판 위에 놓인 흑과 백의 돌을 바라보다가 내가 왜 이걸 두고 있지? 싶은 마음에 짜증스럽게 돌을 회수하였다.

 

 “그만하자.”

 

 그리고는 남은 돌을 쓸어모아 정리하고 탁소리가 날 정도로 돌그릇을 내려놓았다.

 

 “이기든 지든 나는 말 안 해.”

 

 이렇게까지 억척스럽게 들러붙지 않아도 나는 남의 비밀 따위 동네방네 소문 내고 다니는 성격 아니라니까. 아씨.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인지 신도우라는 아이는 내가 돌을 두던 것을 멈추었을 때부터, 녀석의 돌까지 모조리 치울 때까지도 미동조차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뭐야. 왜 이래. 그렇게 걱정되나, 내가 말할까봐? 신경쓰여서 더듬더듬 입을 떼었다.

 

 “말 안 할 거니까. 그러니…….”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진짜 미친듯이 오글거려서 입을 다물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아. 내 닉네임도 ‘sad’인 주제에 뭘 위로하고 앉았냐. 아, 왕창 부끄러워!

 

 

 

 

 ***

 

 

 

 

 명인 도우야 고요는 도우야 아키라 자신의 아버지였다. 타이틀을 무려 다섯 개나 지닌 5관왕의 최정상급의 프로기사였고, 그 침착하고 능수능란한 바둑을 이길 자는 거의 없었다. 백전백승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한 승률을 자랑하는 상당한 실력의 기사라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런데 그가 인터넷바둑의 ‘sai’에게 졌다?

 

 그것은 상당히 화제가 되었다. 그래, 그 전에 치러진 ‘누군가’와의 대국이 새카맣게 잊혀졌을 정도로 말이다.

 

 아키라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sai’를? 아니다. 그 또한 잊을 수 없지만 아키라로서는 앞선 대국이 더 충격적이었다.

 

 ‘sad’

 

 컴퓨터 화면에 고정되어있던 아키라의 눈이 번뜩였다. 아키라의 손이 빠르게 그 이름을 클릭하여 대국신청을 걸었으나 계속해서 거절당하였다. 아키라가 손톱을 깨물며 초조한 마음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sad’와 ‘sai’ 단 한 글자 차이지만 기풍은 엄연히 달랐고, 상황도 완전히 달랐으며, 아키라가 생각하는 인물 또한 달랐다. ‘sai’는 워낙에 부정확한 심증만 있는지라 짐작 대상에게 코치코치 캐물어댈 수도 없다. 하지만 ‘sad’는 누구인지 거의 확신하였을 정도였으니까, 직접 가서 다그쳐 물으면 그만이었다. 다만…. 아키라의 머릿속에 두 명의 인물이 스쳤다.

 

 ‘sai’… 신도우 히카루 그 아이는, 아키라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혼란스럽고 복잡하였다. 대체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인지 정말로 ‘sai’가 맞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키라의 눈앞에 이번에는 후지사키 키요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매가 사나워서, 말투가 좋지 않아, 성격도 유순하지 못하여 항상 틈만 나면 시비가 걸리기 십상인 아이. ‘sad’라는 이름을 가지고 인터넷 바둑에서 ‘sai’를 꺾어내기까지 했던 아이. 그 사실은 ‘sai’가 자신의 아버지인 도우야 고요를 꺾음으로써 잊혀졌지만 아키라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진실이었다.

 

 아버지와 직접 두었을 때는 먼저 돌을 던졌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꺾은 ‘sai’를 꺾어냈던 ‘sad’이기 때문에… 그래, 그래서일까? 궁금했다. 대체 그 아이가 ‘sad’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바둑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난 성격으로 인하여 마음 속에 울분이 차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가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단순히 아이라서?

 

 내막은 모르겠으나 그 아이의 바둑은 그 성격만큼이나 거칠었다. 그렇다고 실력이 없다거나 허술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잔뜩 날이 서려있어서, 한 수 한 수가 위협적이라는 말이었다. 아키라는 다시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가 그 아이… ‘sad’와 두었을 때 그렇게나 공격적으로 두었던 것은 그래서였을까?

 

 지금껏 본 적 없는 아버지의 기풍이었다. 오가타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아주 옛날에는 종종 보이고는 했던 기풍이라하셨지만, 2살 무렵부터 아버지와 늘 매일같이 아침마다 대국해왔던 아키라로서는 믿을 수도 믿기지도 않았다. 아버지에게 그런 바둑을 두게끔 하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이지…. 아키라가 입가를 감싸쥐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대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아버지는 그 일국에서 그러한 수를 두어 상대를 몰아붙였을까?

 

 ‘다 죽게 생겼는데 그럼 어떡하냐!’

 

 상대가 그 아이라는 것을 아버지도 아셨을 텐데. 아키라의 두 눈이 감겼다. 후지사키 키요시 특유의 독특한 기풍은 아키라가 아버지에게 몇 번이고 그 아이의 바둑을 복기하며 이야기해왔던 것이었으므로. 뚝뚝 분에 찬 눈물을 흘리며 저를 노려보던 그 아이의 눈이, 목소리가, 제 손을 쳐내었던 그 손끝의 잔떨림이.

 

 아키라는 아직도 선명하였다. 그 아이에게 바둑은 무엇일까. 신도우 히카루와는 다른 의미로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오목을 두고 말지.’

 

 아키라 자신을 비꼬던 그 아이의 음성을 기억한다. 그런 걸 보고 있자면 그 아이는 스스로가 바둑을 두는 것을 그리 기꺼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면에 아키라 자신이 쏟아버린 돌을 저보다도 먼저 바닥에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손에 생채기까지 내어가면서 망설임없이 선뜻 주워주던 그 행동 또한 기억했다. 그에 자신은 어떻게 말했더라. 아키라가 매마른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너는 상냥한 건지, 건방진 건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했을 때, 그 아이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었다. 왜였을까? 아키라는 그 찰나에 그 아이에게서 언뜻 따듯함을 느꼈다. 아, 어쩌면 바둑을 싫어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키라가 나직하게 탄식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싫은 걸까? 아니면, 바둑의 일부분이 꺼려지는 걸지도…….

 

 문뜩 아키라의 뇌리에 아이의 과거 행동들과 익히 들어온 소문들이 스쳤다. 원생들을 무시하고 그 싹을 처참히 짓밟아버렸다던가, 그 아이에게 바둑은 그저 남을 깔아뭉개는 수단밖에 되지 않는 것만 같다던가하는 하나같이 안 좋은 소문들 말이다.

 

 아키라는 그 아이와 두었던 대국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날이 선, 공격적인 수들. 그에 처참히 짓뭉개졌던 자신의 수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 어쩌면. 아키라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숨을 삼켰다.

 

 프로채용시험 도중에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고 했던 것도, 그러한 본인의 바둑을 두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오목을 두고 말지’라고 했던 것도, 아키라 자신의 바둑을 모조리 짓밟아버린 것이 내키지 않아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수를….

 

 ‘다 죽게 생겼는데’ 라고 했지.

 

 그를 처참하게 부수어버린 것에 본인이 상처를 받아서.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말이 없으셨던 것도 이해가 간다. 아버지도 그 아이가 왜 돌을 던졌는지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셨을 테니까. 저가 질 것이 아니라, 상대가 질 것을 우려하여 돌을 던지다니. 아키라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 아이는 왜 프로기사가 되었을까? 그런 식으로 두는 바둑이 싫다면, 왜 계속 그런 바둑을 두는 것일까?

 

 바둑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기풍을 싫어하는 아이.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아도 아키라에게 후지사키 키요시라는 아이는 참으로 이상한 아이였다.

 

 

 

 

 ***

 

 

 

 

 타이틀전 예선를 치르면서 중간에 점심시간이 걸려 시켜놓은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데 뒤통수가 따갑다. 뭔가싶어서 돌아보니까 도우야 아키라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힉.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후지사키.”

 

 오지마. 오지말라고. 젓가락을 내려놓고, 곧장 도시락을 들고날르려는데 녀석이 대놓고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부담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왜… 바둑을 두기 시작했어?”

 

 갑자기 그런 심오한 질문이라니요. 무슨 생각이야. 떨떠름하게 녀석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바라셨어.”

 

 맞아. 이 원흉! 도우야 아키라라는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달달 볶았지. 아련한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제 딱콩해주겠다는 결심은 포기했다. 어떻게 누굴 때리겠어….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물론 학교 안 가는 건 좋은데 바둑 두는 건 진짜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지.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사색을 마치고 고개를 드니 녀석이 부담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자리도 못 옮기고 우물쭈물하다가 도시락을 덮었다. 더 먹었다간 체하겠다. 젠장. 내가 좋하는 소시진데.

 

 “그것뿐이야?”

 

 뭐가 더 필요한데. 의미심장하게 되묻는 녀석을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저렇게 본담. 섬뜩하게… 아, 왜 섬뜩한지 알겠다. 저거 할아버지가 옛날부터 날 볼 때마다 보여줬던 눈초린데.

 

 “네가, 알아서 뭐하게.”

 

 또 뭔 오해를 하려고. 불안감에 다급히 입을 열었다. 더듬었나. 더듬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호다닥 등을 돌렸다.

 

 “후지사키!”

 

 도망치기 위해서였는데 내 이름을 크게 외치는 녀석 탓에 화들짝 놀라며 멈춰섰다. 그러나 돌아보면 돌이킬 수 없는 후폭풍이 되돌아올 것 같아서 시선은 바닥에 고정하였다. 제발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아주라. 제발 헛소리는 이제 그만 스탑….

 

 “너는 바둑을 왜… 그렇게 두는 거니?”

 

 뭐라고? 나도 모르게 홱하니 녀석을 쳐다봤다. 뭐야. 이상한 물음이 아니잖아. 아니, 이상한 건가. 다짜고짜 왜 그렇게 두냐니. 설마?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벅찬 마음으로 숨을 삼켰다.

 

 내가 겁나 대충 두고 막 던진 거 알아챈 건가.

 

 기대감에 들뜬 것도 잠시였다. 문뜩 이상하다는 생각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졌다느니 뭐라느니 한 거냐?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응시하고 있자니 녀석이 긴장한 모양새로 마른침을 삼켰다.

 

 “싫다면, 그렇게 두는 게 싫은 거라면… 너는 왜 계속 바둑을 두는 거지?”

 

 와. 와아…! 내가 바둑 두기 싫어한 거. 드디어 알아줬어. 울컥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와, 진짜 처음이다. 내 마음을 알아주다니 감동받아서 울 뻔했다. 갑자기 내적친분감이 200% 상승해서 간절한 눈으로 녀석의 눈을 마주봐주었다.

 

 “역시 바둑이 좋아서….”

 

 “아니야.”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아주는 애가 생겼는데, 답을 하지 않았더니 말머리를 돌리기에 서둘러 말을 잘랐다.

 

 “그럼?”

 

 드디어 내 이야기를! 오해하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이 생겼어! 속으로 환호하며 아까 울컥했던 걸 간신히 삼키고 진심을 뱉었다.

 

 “노력해봤다고.”

 

 그래, 두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해봤는데. 최대한 막 던지고 빨리 져서 프로시험이고 뭐고 떨어지려고도 해봤고, 먼저 졌다고 고개를 숙이려고 별의 별 짓을 다하며 각을 쟀는데 다 실패했다니까. 근데… 근데…. 녀석은 내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도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그 차분함에 또다시 감동을 먹어서 울컥하고 말을 이었다.

 

 “답이 없었어…….”

 

 노답이었다, 정말. 이마를 짚고 꾹 짓눌렀다.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할아버지 대체 왜 그랬어요. 어영부영 여기까지 와버렸잖아. 엉엉. 진짜.

 

 “모르겠어. 어떡해야할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이 멈출 지, 멈출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빨리 돌을 던지고 끝내버릴 수 있는지 진짜로 하나도 모르겠다. 부모님과 할아버지 등쌀만 없었으면 당장 그만두고 게임만 실컷 했을 텐데. 한숨을 내쉬고 복잡한 마음에 진심으로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토로했다.

 

 “난 무서워.”

 

 뻥 안 치고 진심으로 무섭다. 태평해보여도 이러다가 사단이라도 벌어지면 어떡하나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차라리 뭐라도 알면 진짜로 둬서 지기라도 하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현실회피뿐이었다. 내 한숨에 녀석이 말없이 나를 보더니 손을 뻗어왔다.

 

 “내가 도와줄까?”

 

 조심스러운 그 물음에 확 밝아진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천사? 그러네, 날개가 보이는 것도 같네.

 

 “일단… 두는 것부터 어떻게 해보자.”

 

 그래. 어떻게, 최대한 안 두는 쪽으로 해보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선생님. 그 동안 원망해서 죄송합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마음 깊이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도우야.”

 

 진짜 진짜로 고맙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아군… 맞나? 여튼 다 됐고, 오늘부터 도우야 아키라 넌 내 구세주 해. 믿습니다, 아멘.

 

 

 

 

 왜 도와준다면서 대국을 하고 있지요? 저기요? 이게 대체 몇 판 째지. 침울한 표정으로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자. 여기서 이렇게 두는 게 아니라 좀 더 수비적으로….”

 

 도우야 녀석의 손이 내가 둔 수를 무르고 뭔가 정상적인 것 같은 데다가 두었다. 뭐야. 그렇게 말해도 난 모른다고. 차라리 오목 두고 싶다…. 지쳐서 폭 한숨을 내쉬었다. 내 넋이 많이 나가보였는지 녀석이 나를 보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음… 후지사키. 잘 안 된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 내가 꼭 도와줄 테니까.”

 

 뭘 한다고? 꼭 도와줘? 여기서 더? 아니아니아니. 그 도움 필요 없는 거 같은데. 녀석의 말에 식겁하며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는 화장실도 못 가게 잡아댔는데 이번에는 곧장 붙잡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때다 싶어서 녀석의 눈치를 보고는 이번에야말로 녀석이 잡을 새라 황급히 땅을 박차고 튀었다.

 

 대체 몇 판 째야! 지금 저녁 6시라고? 아까 낮부터 지금까지 몇 시간 째 바둑판의 격자무늬만 보고 있었더니 눈앞에 네모난 칸들이 둥둥 떠다녔다. 12시간 내리 게임만 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울먹이며 녀석을 향해 원망의 말을 퍼부었다.

 

 아까 했던 말 취소.

 

 천사? 구세주? 개뿔. 지옥에서 올라온 바둑귀신임에 틀림없다.

 

 

 

 

 나는 노란 앞머리의 녀석을 보며 탄식했다. 그래, 이 녀석도 바둑귀신이 들린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된다.

 

 어떻게 나한테 또 대국을 하자고 그래? 내 필사적인 거부가 안 보이는 거야?

 

 상대만 바뀌고 또다시 붙들린 이 상황에 절망하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는 사이 녀석이 나를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편하다.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얼마나 답답했다구.”

 

 신도우, 너… 그런 거였냐. 아는 사람이 나뿐이었던 거야…? 충격받은 표정으로 녀석을 보니 녀석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돌을 쥐었다. 미안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도망치려고 하다니. 내가 좀 놀아줘야겠군.

 

 잠깐만. 근데 친구 없는 게 바둑이랑 무슨 상관이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내 손에는 백돌이 쥐여져 있었고 녀석의 흑돌은 이미 바둑판에 놓인 뒤였다.

 

 “안 둬? 저번에 보니까 되게 잘 두더라. ‘사이(sai)’를 이길 줄은 나도 몰랐어.”

 

 신난 표정으로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을 한 귀로 흘렸다. ‘sai’라는 낯부끄러운 닉네임을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다니. 내 닉네임을 내가 외친다고 생각하면….

 

 “근데 후지사키, 너는 ‘sad’ 맞지?”

 

 악! 아악! 악악! 황급히 돌을 내던지고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 닉네임을 입에 담다니? 얼굴에 홧홧하니 열이 올랐다.

 

 사라져줘야겠어. 내 면상.

 

 “그런데 왜 닉네임을 ‘sad’로 지었어? 뭔가… 심오한 뜻이 있는 거야?”

 

 제발 그만해. 녀석의 물음에 얼굴을 감싸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대로 귀도 막고 싶었지만 손이 모자라다. 하하. 그냥 이대로 불타서 없어졌으면.

 

 “저번에 ‘사이(sai)’를 두 번이나 이겼잖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니까!”

 

 흥분해서 소리치는 신도우 녀석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돌을 쥐었다. 그렇게 된 이상 속전속결이다.

 

 “시끄럽고 두기나 해.”

 

 빨리 둬주고 도망치자. 내 얼굴이 창백해진 게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후지사키 키요시!”

 

 예. 저는 지금부터 키요시가 아닙니다. 아무개하겠습니다. 뭐시깽이 아무개.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외면하고서 빠른 속도로 협회 건물에 들어섰다. 여기라면 그렇게 빽빽 소리지르지 못하겠지. 정숙해야하는 곳이니까. 하하하하! 어떠냐! 내가 세상에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오는 날이 있다니. 말세다.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또다시 나를 부르는 신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지사키! 멈춰 봐! 그렇게 두다가 말고 가버리면 어떡해!”

 

 그렇구나. 넌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애였지, 참. 얼굴색을 싹 굳히고 재빠르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닫힘닫힘닫힘. 필사적으로 버튼을 누르는 사이, 녀석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굳게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새초롬히 웃었다.

 

 껄껄. 저를 찾지 마세요. 안녕, 여러분. 나는 이곳을 떠나 행복해지고 말겠어.

 

 그렇게 웃고 있는데 갑자기 옆얼굴이 따가워서 고개를 돌렸다. 힉. 높으신 분께서 왜 여기 계시는지.

 

 “신도우와 대국한 건가? 저번에 나와 두었을 때처럼 중간에 도망친 거고, 말이지.”

 

 진짜 호랑이 굴이었네…. 이름이 오가타 어쩌구였던 안경잡이 어른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피하여 창백해진 얼굴을 감싸쥐었다. 살려줘.

 

 

 

 

 안경… 아니, 오가타 선생님께서는 왠지 모르겠는데 감히 나 같은 사람에게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굳이굳이 사생활을 나열하고 계셨다.

 

 “도우야 명인께서 은퇴하셨다. ‘sai’와 인터넷 바둑을 두고 난 뒤였지.”

 

 대체 왜 그러시는지요. 그런 거 안 궁금하니까 저는 이만 가보면 안 될까요? 말로 내뱉지는 못하고 눈빛으로 물었으나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내 눈을 맞받아쳤다.

 

 네, 안 되는군요. 찌그러져 있겠습니다. 시무룩해져서 깨작깨작 음료잔을 매만졌다. 그러는 사이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게 ‘sai’와의 대국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전에 두었던… ‘sad’와의 대국도 영향이 깊겠지.”

 

 마시던 음료를 뿜어버렸다.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안 그런가? ‘sad’.”

 

 확인사살 당했다. 쿨럭쿨럭 크게 기침을 하며 가슴께를 쳤다. 사레걸린 건 괴롭지 않았다.

 

 “후지사키 키요시. 역시 네 녀석이 ‘sad’가 맞았군.”

 

 구…만…회…….

 

 

 

 

 울똥말똥한 얼굴로 집에 들어섰다.

 

 “왜 그러니, 키요시? 무슨 일 있었느냐?”

 

 입을 열면 울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웃으며 내게 신문을 펼쳐보이셨다.

 

 “이것 보거라, 키요시! 저번에 네가 신초단에서 둔 대국과 이번에 네 이름이 나오는 기사는 다 모아두었단다!”

 

 그걸 왜 모아요, 할아버지. 이건 또 무슨 신종 괴롭힘이에요. 겨우 수치심을 피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왜 때문에 내게 이런 시련을. 나는 속으로 펑펑 울며 홱하니 방으로 올라갔다.

 

 할아버진 내 마음 하나도 몰라.

 

 

 

 

 또 승단했다. 그리고 자꾸 이겨서 타이틀전 예선에서 계속 올라가는 바람에 대국 수가 많아져서 죽을 거 같다. 게임 할 시간 진짜 하나도 없어!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만 둘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샌가 나타난 도우야 아키라가 결사반대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도와줄게. 포기하지 마.”

 

 네 도움을 받으라고? 절대로 포기하고 싶은데. 질색하는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녀석은 해맑게 웃으며 내 어깨를 붙들었다. 빨리 도망갔어야하는데 망했다. 저번에 쉽게 놓아주길래 방심했어. 녀석의 입에서 또 어떤 폭탄이 내뱉어질지 몰라서 침을 꼴깍 삼키며 두려운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오늘 대국 일정 끝났지? 아버지 연구회에 가서 같이 공부하자. 그러면 네 기풍을 바꿀 해법이 있을 거야.”

 

 역시 그만 두자. 공부라니. 그것도 바둑 공부라니. 연구회? 도우야의 아버지? 도우야 명인이잖아! 진짜 절대로 가고 싶지 않다.

 

 “자, 가자. 얼른 가지 않으면 늦을 거야. 2시부터 시작이니까.”

 

 “잠깐, 나는….”

 

 안 갈래. 고개를 젓고는 녀석의 손을 떼어내려고 붙잡았는데 녀석은 도리어 그 손을 꼭 붙잡고 나를 끌고갔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아버지도 너를 반겨주실 거야.”

 

 그게 아니라 나 안 간다니까? 좀 놔 봐. 1분… 아니, 1초만 놔줄래? 그 사이에 도망가게.

 

 

 

 

 “너로구나.”

 

 저 아세요? 눈으로 삿대질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모르는 어른들이 한가득이다. 그 가운데 아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후지사키 키요시.”

 

 “어서오거라. 아키라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올 줄은 몰랐다.”

 

 내 이름을 부르며 안경너머로 지그시 눈빛을 쏘아보내는 오가타 님과 마찬가지로 엄청엄청 포스있는 눈으로 나를 보는 도우야 녀석의 아버지 도우야 명인 님 덕분에 내 심장은 떨리다못해 산산조각났다. 예. 저도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선생님들. 그러니까 이대로 나가면 안 될까요.

 

 “또 튈 생각은 하지 마라. 보다시피 사방이 아키라 편이니 말이다.”

 

 힐끔 문밖을 보는 내게 오가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 어떻게 알았지. 식은땀을 흘리며 그와 도우야 녀석의 눈치를 보았다. 녀석의 눈이 휘동그래지며 나를 보았다.

 

 “튀다니… 후지사키, 너 전에 오가타 선생님한테서 도망친 적 있니?”

 

 으응. 좀 있지. 찔리는 마음에 슬쩍 눈을 피하고 아무곳에나 눈길을 주었다. 근데 그게 하필이면 바둑판인지라.

 

 “오자마자 대국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단단히 오해를 샀다. 아니, 그게 아닌데요.

 

 

 

 

 제발. 바둑 그만 두고 싶다. 넋을 잃고 슬픈 눈으로 바둑판을 바라보는데 왜인지 도우야가 나를 위로해왔다.

 

 “너무 낙심하지 마. 금방…은 아니지만 차차 괜찮아질 거야.”

 

 아니. 점점 심각해지는 거 같은데. 이 상황을 좀 봐. 사람들 표정이 완전 심각하잖아.

 

 “좋은 수지만, 공격에 너무 치중해 있어요.”

 

 “하지만 공격이 최선의 방어란 말이 어울리는…….”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바둑 얘기뿐이다. 어떻게 사담이 하나도 없지? 여기 사람들은 미쳤어. 바둑에 완전히 뇌가 절여진 것 같다고.

 

 “여기서 배우다보면 금방 네가 원하는 바둑을 둘 수 있을 거야.”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도우야의 말에 질색하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보고있자니 녀석이 이 상황의 원흉이란 것이 떠올라 화가 났다. 역시 철천지 원수…!

 

 “괜찮아. 네가 사실 바둑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어.”

 

 뭔 소리냐. 내가 언제 바둑 좋아한댔어! ‘좋아한다’의 ‘좋’자도 꺼내지 않았다고?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 바둑이 들어간 건 바둑알 초콜릿밖에 없다, 이 자식아.

 

 

 

 

 여보세요. 제 말이 들리시나요? 저 여기있는데요. 안 보이세요?

 

 “후지사키의 수는 하나같이 공격적이에요. 마치 타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요.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건지, 후지사키는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배운 적 없….”

 

 배운 적 없으니까 안 알려주지. 그렇게 말하려는데 누군가 내 말을 삭둑 잘랐다.

 

 “그렇군.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일부러 배우지 않은 걸 수도 있지.”

 

 “일부러….”

 

 “일부러 배우지 않았다고요?”

 

 일부러가 아니라. 아니, 내 말 안 들리냐고. 왜 당사자를 놔두고 다른 사람이랑 쿵짝대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인데, 특히 도우야와 오가타 선생님의 말이 바로 곁에 있다보니 무시할 수 없게 콕콕 귓가에 박혀들었기에 잠깐 영혼을 빼놓고 들으며 멍청히 앉아있었다. 예. 제 말 맛있게 드시고 두 분은 떠드세요. 저는 눈 뜨고 잠 좀 자겠습니다.

 

 “아예 배우지 않았다는 게 아니야. 그랬다면 엉망이었을 거야.”

 

 그래요. 엉망입니다. 내 머릿속도 엉망진창. 에효, 한숨을 삼키며 들려오는 목소리를 자장가 삼았다. 금방이라도 감길 것처럼 느리게 깜빡이는 내 시야에 문뜩 오가타 선생님의 눈동자가 포착되었다. 왜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뜸들이시지. 사람 심장 떨리게.

 

 “배운 적이 없는데 이렇게까지 둔다? 말이 안 되지. 일부러 타협하는 법을 제외하고 배웠다는 말밖에는 안 돼. 안 그래도 저번에 확인했던 참이다. 중간에 달아나버려서 끝맺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

 

 아. 저번에 나 붙잡고 겁먹은 척하지 말고 두라고 했던 때구나. 음. 그렇지. 말이 안 되지. 그럼, 그럼. 내 바둑은 바둑도 아니지. 아무렴. 아무렇게나 들리는 말만 들으며 푹 수그러지는 고개를 막지 않고 눈을 감았다.

 

 “단순히 운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는데… 기복이 없는 것을 보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더구나. 녀석은 무심결에 상대의 허점을 파악하고,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걸 수도 있다.”

 

 뭐라는 거예요. 방금 전까지 엉망이라며. 말이 안 된다며. 황당한 이야기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런 엄청난 게 나한테 가능할 리가 있나. 내 머리는 텅 비었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는데 마주친 두 사람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설마 진심이냐. 방금 전까지 말이 안 된다며. 이렇게 종잇장 뒤집듯이 말 바꾸기 있습니까.

 

 “당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지? 후지사키.”

 

 지금와서 나한테 묻다니. 내 말 다 냠냠해놓고. 우씨.

 

 “모릅니다.”

 

 몰라. 난 이제 포기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쭈욱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푸욱 한숨을 내쉬고 그 물음을 회피하였다.

 

 

 

 

 신도우의 노란 앞머리가 보인다던가, 도우야의 단발이 쥐꼬리만큼 보일라치면 줄행랑 쳤다. 대시합이나 타이틀전 예선이면 여지없이 마주칠 때가 많았는데, 먼저 졌다고 고개 숙이는 것은 포기했다. 대국은 최대한 빨리 두어서 끝내버렸고 날 잡고 부모님과 할아버지한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만두고 싶다고?”

 

 “계속 이기니 재미가 없는 거로구나.”

 

 아니, 그게 아닌데요. 얘기가 왜 그렇게 되죠.

 

 “조금만 참거라. 차근차근 올라가야한다는 게 안타깝지만 몇 년만 참으면 정상급 기사들과 대국할 수 있을 거란다!”

 

 그러기 전에 다 들통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한 것 같은데.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울먹였다.

 

 “낙심하지 마렴, 키요시. 네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할애비도 알고 세상 사람들도 모두 안단다. 예선도 거의 통과하였으니 조금만 있으면 타이틀도 딸 수 있겠지! 그러면 더 유명해질 거란다!”

 

 끼야아아악! 그게 싫다구요! 그게 뭐야! 그러면 지금보다 더 많은 바둑귀신들한테 둘러싸여서 정말로 헤어나오지 못할 강을 건너버리고 말겠지? 창백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처음으로 단호하게 할아버지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데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할아버지는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성격도 급하지. 차분히 기다리거라. 이제 다 컸으니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다 크기는요! 바둑만 그만 둘 수 있다면 그냥 어린애 할래요. 평생 안 클 거야. 엉엉. 게임하고 싶어어어.

 

 

 

 

 이제 진짜 포기했다. 멍하니 바둑판 위에 돌을 얹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오목이다. 좀 오래 두는 오목이다. 내 돌 다섯 점 세 개만 만들면 끝난다.

 

 그랬더니 조금 괜찮아지는 것도 같아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작게 숨을 골랐다. 좋아. 이제 둬볼까? 진정된 마음으로 돌을 고치쥐었는데 갑자기 상대가 푹 고개를 숙였다.

 

 “져, 졌습니다.”

 

 아니. 좀.

 

 

 

 

 결국 최종 예선까지 왔다. 이제 무서운 온갖 사람들이 상대가 되었는데, 이놈의 신도우 히카루는 아까 전에 나를 찾아와 ‘sai’를 보지 못하였냐고 다그쳤다.

 

 뭔 소리야, ‘sai’는 너잖아.

 

 그렇게 말해주려는데 그 표정이 너무 다급해보여서 바로 말을 못해주었다.

 

 “일단 대국이 있어서.”

 

 나를 붙잡은 녀석의 손을 떨어뜨리고 대국실로 향했다. 왜 저러지. 의아해서 생각에 잠긴 채 돌을 두었다. 이상하게 자꾸만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신기루 같았던 게 눈에 스쳤었는데 그게 자꾸 눈앞을 아른거려서 불쾌해졌다.

 

 귀신이 있다면 아마 그런 느낌이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가 소름이 끼쳐서 손을 꽉 말아쥐었다. 으. 설마 나야말로 귀신 들린 건 아니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상대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아… 이제 익숙해지려고 그래. 슬픈 눈으로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두어 개 정도의 다섯 점을 만들었다. 음. 미션 성공. 어느새 끝난 대국에서 대충 복기를 마치고 일어섰다. 복기라고 해봤자 나는 아는 게 없어서 내 수가 어쨌고저쨌고 자기네들끼리 떠드는 것을 듣는 것밖에는 못했지만 말이다.

 

 “‘sai’가 없어졌어.”

 

 창백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였던 신도우 녀석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갸울였다. 아이디라도 잃어버렸나.

 

 

 

 

 다시 한 번 마주친 신도우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아직도 아이디 못 찾았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마음이 쓰여서 녀석을 바라보는데 녀석은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서 도망갔다. 도망치던 것은 나였는데 갑자기 반대의 상황이 되니 어색하다. 하지만 도망가기에는 완전 코앞이었다고?

 

 “‘sai’가….”

 

 ‘sai’가 사라졌다고 녀석이 그랬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들어보니까 계속 대국도 빠지고 줄기차게 도망친 모양이었다. 제길, 부럽다. 억지로이기는 하지만 바둑 싫어하는 나도 예의상 도망치지 않고 꼬박꼬박 나오는데, 뭐하나 잃어버렸다고 도망치는 녀석이 짜증나서 녀석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부러워서가 아니다. 절대… 사실은 좀 부럽다. 아니, 좀 많이. 흑흑. 도망칠 때 나도 데려가지. 원망의 마음에 녀석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차. 서둘러 힘을 풀고 하려던 말은 마저 해야할 것 같아서 입을 떼었다.

 

 “사라졌다고 했지.”

 

 신도우 녀석이 다시 도망치려던 것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얼굴로 버럭 화를 냈다.

 

 “너도 ‘사이(sai)’가 없다고 말하려는 거라면…!”

 

 무슨 소리야. 왜 갑자기 화를 낸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쥐고 있던 녀석의 어깨를 놓고 그 가슴께를 손으로 톡 쳐주었다.

 

 “‘sai’는 여기 있잖아.”

 

 녀석이 우뚝 멈추었다. 멍하니 나를 보는 게 이상해서 슬쩍 녀석을 피해 본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상한 애야. 자기 혼자 화 내고, 울고, 갑자기 대국하자고 하고.

 

 문득 소름이 끼쳤다. 진짜 귀신이라도 들렸던 거 아니야? 힉. 가까이 하지 말아야겠다.

 

 

 

 

 “후지사키! 너는…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다며, ‘sai’에 대해! 신도우가 뭐라고 했지?”

 

 예? 도우야 아키라가 갑자기 나를 찾아와서 다짜고짜 어깨를 흔들었다. 아니. 무슨 소리세요. 말은 녀석이 아니라 내가 했지. 자꾸 ‘sai’를 잃어버렸다길래 네 아이디가 ‘sai’ 아니냐고, 그러니까 네 머릿속에 ‘sai’가 있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얘기했었지.

 

 “대답해, 후지사키.”

 

 근데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아오, 물어볼 거면 당사자한테 물어야지. 걔 귀신이라도 들린 거처럼 이상해서 나는 이제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하지만 도우야 녀석은 내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다그쳤다.

 

 “분명 신도우는, ‘sai’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어. 녀석은… 하지만, 분명 녀석은 ‘sai’와 연관이 있어. 그런데 내게는 말해주지 않았지. 그치만 언젠가 나한테는 말할 수 있을 거 같다고… 그러면서 후지사키 넌 이미 알고 있다고 했어. 그래, 너는 ‘sad’로 ‘sai’와 대국한 적이 있었지? 말해, 신도우가 ‘sai’인 거야? 아니면…….”

 

 속사포처럼 랩을 해대는 녀석 탓에 머리가 아파와서 짜증스레 녀석의 손을 쳐냈다.

 

 “귀신이라도 들렸나보지.”

 

 내 말에 녀석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녀석도 어이가 없었나보다. 그래, 말한 나도 어이가 없다. 말하고 나니 낯부끄러워져서 에이씨, 머리를 헤집으며 도망쳤다.

 

 

 

 

 “고마워, 후지사키.”

 

 도망치며 죽상을 하던 것이 엊그제같은데, 순식간에 밝아진 표정으로 대국실에 들어선 신도우 히카루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고맙다니, 뭐가?

 

 “알고 있었던 거지? ‘sai’가… 그렇게 될 거.”

 

 네가 ‘sai’ 아이디 잃어버릴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대체 뭔 소린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냥 무시하고 내 자리로 향했다. 난 이제 진짜 모른다. 알아서들 오해하고 생각하세요들. 아, 포기하니까 편하다.

 

 

 

 

 ***

 

 

 

 

 신도우 히카루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부터 함께한 특별한 친구 ‘후지와라노 사이’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낙옆이 아름답던 그 가을에, 히카루는 그를 만났다. 처음에는 바둑판에 붙은 귀신이라기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왜 저에게 붙었을까? 왜 하필 붙어도 바둑귀신이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할아버지의 오래된 바둑판을 몰래 팔려고 해서 하늘이 벌을 준 것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처음에는 그 존재가 그냥 불편하고 불쾌했다. 그래서 그가 바둑바둑거리는 것을 꺼려하며 두어주지 않으려고도 했다. 그치만 ‘바둑 같은 건 둬주지 않겠다’고 무심하게 내뱉은 제 말에 아이처럼 슬퍼하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좋아, 두게 해줄게.’

 

 그래놓고선 제대로 두게 해주지도 않았지. 히카루가 너털하게 웃었다. 눈물이 났다. 지금에와서야 그 말을 지켰어야한다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것을.

 

 ‘미안해, 사이.’

 

 2년이 넘도록 함께해서 소중함을 몰랐다.

 

 ‘그렇게 두고 싶어했는데, 나만 실컷 두고.’

 

 영원히 제 곁에서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중에, 라고 그렇게 계속 미뤄서는 안 됐는데.’

 

 ‘사이(sai)’라고 이름 붙이고, 그렇게 불렀던 자신의 친구에게 히카루는 외쳤다.

 

 ‘돌아와, 사이.’

 

 하지만 이미 그는 사라지고 없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다. 히카루는 방황했다. 어딘가 바람에 휩쓸려서, 아니면 답답해서 잠시 제 곁을 떠나 여행을 간 것은 아닐까? 말도 안 되지만 그런 생각도 했다. 바둑판에 있던 귀신이니까 다른 사물에 붙어버린 것은 아닐까? 정말이지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곳을 찾았다. 그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모조리 찾아가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사이(sai)’를 알던 유일한 이에게 호소하였다.

 

 “‘사이(sai)’가 사라졌어.”

 

 후지사키 키요시. 그는 차가운 눈으로 히카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저를 붙든 히카루의 손을 떼어내며 말하였다.

 

 “일단, 대국이 있어서.”

 

 ‘사이’가 사라진 신도우 히카루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돌아온 차가운 냉대에 히카루는 절망하였다. 그라면 공감해줄 줄 알았다. 저와 같이 ‘sai’가 신도우 히카루가 아닌 ‘후지와라노 사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챈 사람이니까.

 

 과거 후지와라노 사이에게 ‘sai’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게 해주었을 때.

 

 넷카페의 창밖으로 ‘후지와라노 사이’의 존재를 분명히 바라보았던, 그리고 곧장 신도우 히카루 자신을 보고는 모든 것을 알아챈 듯이 알 수 없는 눈을 하였던 그였으니까.

 

 그에게서 사이의 흔적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히카루는 정말 마지막으로, 한줄기 희망을 놓치 못하고 본원을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를 찾아봐도 이제 그는 없다는 사실만이 더욱 절절하게 와닿을 뿐이라서 좌절하며 건물을 나서는데, 익숙한 이름이 귓가에 들려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사이(sai)’가, 사라졌다고 했지.”

 

 후지사키 키요시.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히카루는 이어진 그의 말에 건물을 벗어나려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를 보았다가 이내 울컥하여 소리쳤다.

 

 “너도 ‘사이(sai)’가 없다고 말하려는 거라면…!”

 

 그러나 그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전에 차갑게 저를 보았던 것이 거짓이라는 듯이 말하였다.

 

 “‘사이(sai)’는 여기 있잖아.”

 

 톡하니 제 심장을 두드리는 그 온기에, 후지사키의 손짓에, 히카루는 숨이 멈추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묻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는 자리를 뜬 뒤였다. 히카루가 가슴을 감싸쥐며 혼란스런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사이….”

 

 제 곁에서 늘 그랬듯이 금방이라도 ‘네, 히카루.’ 밝은 음성으로 화답이 들려올 것 같았으나 사이는 이미 사라져 없다는 것을 히카루는 이제 확실하게 깨달았으므로 그저 눈물만 삼켰다. 그러며 사이가 제게 있다는 후지사키의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아… 이스미 형.”

 

 “신도우.”

 

 집에 돌아오니 그렇게 기다리던 사이는 여전히 온데간데 없고 또다른 인물만이 히카루를 반겼다. 히카루로서는 거의 몇개월만에 보게 된 친구 중에 한 사람이었으므로 이스미 그를 반기는 것이 맞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방에 들어서니 하나하나가 전부 ‘사이’와의 추억이 깃든 것이었기에, 숨쉬듯이 그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온전히 그를 반겨 웃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도우, 한 판 두자.”

 

 그러한 히카루의 상태가 걱정되었는지 이스미는 당장에 대국하자며 멋대로 히카루의 방 한 켠에 놓인 바둑판을 끌어다 히카루를 앉혔다. 한사코 저부하는 히카루에게 이스미는 ‘네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히카루의 손에 돌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두게 된 바둑에서 히카루는 후지사키가 건네었던 말의 진의를 알았다. 히카루가 숨을 삼키며 자신과 이스미가 그려나간 대국을 내려다보았다.

 

 ‘사이는 여기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히카루 자신의 가슴께를 툭 쳤던 후지사키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그런 히카루의 시야로 자신이 두었던 수들이, 그렇게나 찾아다녔던 ‘후지와라노 사이’의 바둑이 선연하게 자리하였다.

 

 사이. 너는 여기 있었어.

 

 히카루는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하고 서럽게 울었다. 히카루의 바둑에서는 그토록 찾아헤맸던 자신의 소중한 친구, ‘사이(sai)’가 있었다.

 

 “고마워, 후지사키.”

 

 며칠 뒤 마주한 자리에서, 그것을 깨닫게 해준 후지사키 키요시에게 신도우 히카루는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하였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는 후지사키의 모습에 히카루는 왠지 안도하였다.

 

 “다 알고 있었던 거지?”

 

 이 녀석은 다 알고 있었구나.

 

 저만 몰랐던 것이다. 사이의 마음을, 사이가 앞으로 저를 떠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정작 늘 함께했던 저는 모르고… 그것이 미안하여 신도우 히카루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제 친구 ‘사이’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하였다. 미안해, 사이.

 

 그리고 고마워. 함께해서 즐거웠어.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히카루가 작게 중얼거렸다.

 

 

 

 

 ***

 

 

 

 

 왠지는 모르겠는데 도우야 아키라와 신도우 히카루가 자꾸만 대국하자 그러고, 심지어 지들 대국하는데 자꾸 나를 끌고댕기는데….

 

 “‘아하’라고? 몇 번째야? 같은 실수를 또 하면 어떡해!”

 

 “그러는 도우야 너야말로 내가 둔 수에 세 번이나 감탄했잖아!”

 

 “무슨 소리야, 한 번이겠지!”

 

 저기, 싸울 거면 나는 빼줄래. 억지로 도우야 아버지네 기원에 끌려와서 아주아주 불편한데 너네끼리 싸우고 있으니까 내가 어떡해야할지 모르겠다. 한숨을 쉬며 내게서 시선이 떨어진 사이 은글슬쩍 빠져나가기 위해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기가 무섭게 홱하니 둘의 고개가 나를 향한다.

 

 “후지사키, 어떻게 생각해?”

 

 “너도 도우야 녀석처럼 내가 여기에 뒀어야한다고 생각해?”

 

 “아니! 후지사키도 나처럼 여기를 두는 게 좀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걸!”

 

 둘 사이에 끼여도 단단히 끼였다. 잠깐 나한테 묻는가싶더니 다시 싸우기 시작하는 녀석들 탓에 나는 짜증스럽게 돌을 던지고 나왔다. 유리알이니까 비싸서 진짜로 던지지는 못하고 돌 몇 개를 쥐어 녀석들이 싸우고 있던 곳에 쾅 내려찍고 나왔다는 말이다.

 

 “아….”

 

 동시에 멈춰선 둘의 행동에 나는 그제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난 간다.”

 

 지지고 볶든 바둑알로 계란후라이를 해먹든 알아서든 해라. 속으로 씩씩거리며 도우야네 기원을 나서는데 뒤쪽에서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두는 방법도 있었구나!”

 

 “앗, 잠깐 후지사키!”

 

 아, 몰라. 나 부르지 마! 또다시 나를 끌어들일 기세에 호다닥 줄행랑을 쳤다.

 

 

 

 

 클났다. 식은땀을 흘리며 꼴랑 한 판만 있는 좁은 대국실에서 데구르르 눈을 굴렸다.

 

 “여기까지 올라올 줄 알았다. 초단부터 시작해서… 이제야 마주하게 됐지만.”

 

 나는 궁금했다. 대체 안경을 쓰고 있는데 어째서 눈이 그렇게 형형하게 빛날 수 있는 건지. 혹시 안경에 무슨 특수한 기능이라도 있는 걸까. 앞에 놓인 바둑판으로 시선을 떨구며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은 도망치지 못하겠지. 정식 리그전이니까. 정식대국은 한 번도 중간에 포기한 적이 없다지? 아키라와 두었을 때 한 번 빼고는 말이야. 잘 부탁한다.”

 

 도망치고 싶다. 격하게 이 자리에서 벗어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바둑 말고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싶다. 울상으로 일그러질 뻔한 얼굴을 간신히 펴며 떨리는 음성으로 뱉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가타 선생님.”

 

 제발 저를 떨어뜨려주세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이대로 타이틀전까지 치러야한다고. 그러면 할아버지한테 얼마나 들들 볶일 것이며, 대충 던져버린 돌들이 뽀록날 경우에는 어떻게 수습할 것이며, 그게 아니더라도 진짜로 타이틀이라도 따버리게 되면 하루 죙일 바둑만 두다가 저 사람처럼, 도우야 아키라나 신도우 히카루 두 녀석들처럼 뇌와 인생이 바둑에 풍덩 빠져버리고 말 거라고.

 

 지금도 이미 글른 것 같지만 나는 애써 부정하며, 황금백수가 될 거라는 커다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부디 제 엉망진창 바둑을 왕창왕창 묵사발로 만들어서 이겨주세요, 선생님.

 

 

 

 

 머리 쓰는 일은 정말이지 젬병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울고 싶었다. 심지어 여태까지 머리 쓰지도 않았다. 머리써서 진심으로 이기고 싶어서 이긴 거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진짜로 진짜로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그런데….

 

 “졌습니다.”

 

 이겨버렸다. 이겨버렸어. 망했다. 망했어. 짧은 호흡과 함께 살짝 숙여지는 오가타 선생님의 고개에 나는 절망했다.

 

 왜? 대체 어쩌다가? 분명히 제 돌을 냠냠 맛있게 드시고 계셨잖아요?

 

 “그렇게 무수한 돌을 버리고, 그걸 미끼로 판 전체를 먹어버릴 줄은 몰랐다.”

 

 거의 체념하듯이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잘게 떨려왔다. 진심으로 힘겨워하는 그 표정에 멍하니 그를 보았다.

 

 저기,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먹은 건 아닌데요. 먹을 생각은 초콜릿 말고는 한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입이 벌어졌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망할 입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다물렸다. 무슨 생각인지 오가타 선생님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입을 떼었다.

 

 “대단한 대국이었어.”

 

 대체 뭐가요. 이쯤 되니까 나도 설명이 좀 필요해졌다. 진심으로.

 

 후지사키 키요시의 인생 해설집 같은 거 없나요. 억만금을 주고도 사고 싶은데. 물론 그런 돈은 제 수중에 없습니다만 바둑알초콜릿을 담보로 가불하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뭐라고요. 북… 뭐? 북두배? 한중일 주니어… 뭐요? 단체전? 눈을 껌뻑이며 지금 내게 통보되는 말이 레알진실트루참인가 들었던 내용을 다시 되짚어보고 있는데 직격타가 날아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선은 면제니까요. 후지사키 3단은 이번에 명인전, 혼인보, 기성전까지 리그에 진출했으니 도우야 3단과 함께 예선 없이 자동으로 참가하게 될 겁니다.”

 

 네? 제 선택권은요? 여기서 바둑을 더 두라고? 심지어 국내도 힘들어서 죽겠는데 뭐요? 한중일? 거짓말이라고 해줘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그걸 뭐라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며 말을 이었다.

 

 “바둑만 두면 됩니다. 자잘한 것은 단장은 구라타 8단이 이끌어줄 거니까요.”

 

 그 바둑이 문제라니까요, 이 양반아? 아니, 입이 떠억 벌어졌다. 아, 물론 뚜둑소리가 나면서 턱 연골이 나가버려서 금세 닫아야했지만.

 

 “하하, 기대가 많이 되나보군요. 그렇게 힘주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과 중국이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한테는 후지사키 3단도, 도우야 3단도, 그리고 신도우 초단도 있으니까요.”

 

 히익. 날 그 두 녀석과 묶지 마. 나까지 바둑귀신한테 찍힐 거 같단 말이야! 질겁을 하며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뒤에서 다음 대국일정표를 받아가라는 둥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더 바빠진다고 하니까 퍼뜩 떠오른 게 생겨서였다.

 

 맙소사. 세에상에. 그게 어마무시하게 충격적인 사실이라서 당장에 집으로 향하며 입가를 틀어막았다.

 

 뭔가 그간 일이 많았다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바둑에 얽매인 지 3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깨우쳐버린 것이다. 내 3년…. 언제 그렇게 시간이 흘렀지? 분명이 엊그제 할아버지한테 이끌려서 바둑대회고 원생시험이고 프로시험이고 보게 되었던 거 같은데? 아니지.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 사이에 새로 나온 게임이란 게임은 다 놓쳐버렸다고?

 

 후지사키 키요시 15세 인생에 게임의 비중이 사라지고 바둑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 게임에 접속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기억나질 않았다.

 

 이러다간 내 게임 계정이 휴면 계정이 되어서 사라지고 말거야. 창백한 얼굴로 걸음을 빨리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한 것은 컴퓨터를 켜고 매일같이… 그러니까 작년즈음까지는 매일같이 했던 게임에 접속하는 것이었다.

 

 ‘없는 아이디입니다.’

 

 그리고 절망했다. 아이디랑 비밀번호가 생각나질 않아……. 문득 신도우 녀석의 ‘sai’가 떠올라서 엉엉 울었다. 녀석도 아이디를 잃어버렸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그렇다면 다시 만나는 날 위로해줘야겠다.

 

 진짜 억장이 무너졌다.

 

 

 

 

 북두배라니… 세계 대회라니…. 한중일 중에서 중국도 중국이지만 특히 한국이 만만찮다고 귀에 딱지가 않도록 말하는 주변 사람들의 잔소리에 나는 머리가 두 개로 쪼개질 것만 같았다.

 

 “아무리 통역이 잘못되었다고는 해도, 한국이 은근히 일본 바둑을 무시했다고!”

 

 그에 할아버지도 거들었다.

 

 “가서 이겨주고 오너라! 키요시, 네 저력을 보여주렴!”

 

 저력… 그런 게 있었다면 제가 벌써 건물주 황금백수가 되었을 거 같아요, 할아버지. 어른 앞에서 대놓고 한숨을 쉬지는 못하고 삼켰다. 바둑아, 너 내 인생에서 제발 나가주면 안 되겠니…….

 

 

 

 

 ***

 

 

 

 

 북두배는 한국 중국 일본 세 팀이 겨루는 세계적인 행사였다. 특히 주니어팀은 이번에 특별히 열린 특별기전이었기에 화제성이 높았다. 방식은 18세 이하의 어린 프로기사 셋이 한 팀을 이루어 주장, 이장, 삼장으로 1, 2, 3번째 선수를 정하여 첫날 2번의 대국, 이틑날 1번의 대국으로 최종 우승팀을 결정하고 시상식을 하는 식이었다. 주장부터 삼장까지의 순서는 그들을 이끄는 선배 프로기사인 단장의 판단 하에 실력순으로 정해졌다. 그래, 그것이 보통이다.

 

 “제가, 제가 주장을 하면 안 될까요?”

 

 신도우가 억지를 부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한국과의 대국만이라도 좋아요!”

 

 신도우 히카루, 도우야 아키라, 후지사키 키요시 이렇게 세 어린 프로들의 고문 겸 단장을 맡게 된 구라타 8단은 신도우의 말에 바랄 걸 바라라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철없긴, 폼나게 주장을 맡고 싶은 거냐?”

 

 치기어린 신도우의 말을 탓하였으나 버럭 화를 내고 좀 더 우겨댈 것이라 여겼던 신도우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도우야는 갑작스런 신도우의 행동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혹시 고영하가 신경쓰여서 그러는 건가.”

 

 도우야가 작게 중얼거렸다. 고영하? 누군가 작게 되물었으나 도우야는 생각에 잠겨 답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고영하’라면 얼마 전에 들은 바가 있었다. 일본 바둑계에서 유서깊은 ‘혼인보 슈우사쿠’에 대해 물었더니 형편없는 기사라고, 지금 나타나면 자신이 이길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더랬지. 후에 알고 보니까 허술한 통역으로 인한 오해라고는 했지만… 도우야는 그럴 수도 있겠다싶었다. 고영하는 상당히 강하다고 들었고, 그의 기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뛰어난 실력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고영하가 했던 말을 빌어 객관적으로 말해보자면 ‘혼인보 슈우사쿠’는 아무리 실력이 좋다해도 이미 그 기법에 대한 파훼법이 존재하는, 아주 오래된 수를 두는 옛 기사였으니 현대의 프로들이 그와 두게 되면 아무리 대단한 혼인보 슈우사쿠라도 고전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도우야는 ‘sai’를 떠올렸다.

 

 신도우 히카루와 분명히 관련이 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인터넷 바둑의 강자 ‘sai’.

 

 만일 그가 ‘혼인보 슈우사쿠’라면, 과연 우리들은 이길 수 있을까?

 

 그는 마치 현대의 바둑을 배운 혼인보 슈우사쿠 같았다. 만일 그런 식이라면 아무리 강세인 한국의 ‘고영하’라도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하다고 도우야 아키라는 생각했다. 단 일국뿐이었지만 한때 일본 타이틀기전의 5관왕까지 짊어졌던 자신의 아버지 도우야 고요를 이겨버린 그였으니까.

 

 도우야가 힐끔 후지사키를 바라보았다. 후지사키라면… 가능할지도. 넷바둑에서 아버지와의 대국에서 져버린 ‘sad’의 수들과 ‘sai’와의 대국에서 이겨버린 ‘sad’의 수를 차례로 떠올렸다.

 

 후지사키라면, 정말로 그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도우야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삼천포로 흘러간 생각을 정리해내었다.

 

 “후지사키, 네 생각은 어때?”

 

 가만히 앉아서 묵묵히 바둑판만을 바라보는 후지사키에게 도우야가 물었다. 만일 신도우가 대회날까지 저런 상태면 제대로 대국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때문에 실력순이 아니더라도 한국과의 대국에서만큼은 주장의 자리를 후지사키가 양보해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도우야는 생각했다. 물론 단장인 구라타 8단의 승인이 떨어져야겠지만 일단은 주장의 자리를 내놓아야하는 당사자 후지사키의 의견이 제일 중요했으니까.

 

 “상관없어.”

 

 한참을 말이 없던 후지사키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그의 눈에 냉정함이 서려있어서 도우야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상대든 상관없다는 걸까? 어차피 자신이 이기는 것은 변함이 없을 테니까? 어찌되었든 도우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구라타 8단만 설득한다면 신도우에게 주장의 자리를 내어줄 수 있게 된다.

 

 “나는 반대야.”

 

 구라타 8단에게 시선을 두기도 전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도우야는 어색하게 웃으며 신도우가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역시, 신도우에게 주장은 안 되겠지. 저렇게 불안정한 상태니까. 종종 ‘혼인보 슈우사쿠’의 이야기만 나오면 신도우는 크게 반응하곤 하였는데, 하필 중요한 대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역시 신도우는 ‘sai’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래서 그와 닮은 혼인보 슈우사쿠에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sai’는 ‘혼인보 슈우사쿠’와…….

 

 도우야가 고개를 저었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곧 있을 북두배를 위해 지금은 집중해야할 때였다.

 

 

 

 

 어느덧 대회 이튿날이 밝았다. 다행히 첫날 있었던 중국과의 대국은 무사히 치러졌다. 신도우의 마음이 흔들린 탓인지 초반에 무너져서 1패하고 말았지만 그가 제대로 두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마지막에는 마음을 다잡고, 불계패할 뻔한 판을 노도와 같은 추격으로 극소한 차이까지 줄여냈으니까. 집계를 할 때까지 누가 이기고 졌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결국 초반에 무너진 것이 너무 커서 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장 후지사키와 이장 도우야의 승리로 고대하던 한국과의 대국을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신도우 초단이 주장이라고?”

 

 “도우야 3단이 이장? 그럼 삼장이 후지사키 3단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 주장을 버리려는 심산인가?”

 

 신도우 히카루는 바라던대로 주장이 되어 한국팀의 주장 ‘고영하’와 붙을 수 있게 되었다. 첫날 있었던 중국팀과의 대국에서 노도와 같은 추격을 단장인 구라타가 높이 사서 신도우 히카루의 청을 들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후지사키가 이장이 되어야하지 않느냐? 이건 또 후지사키대로 사건이 있었다. 도우야는 어젯밤 숙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난 두지 않을 거야.’

 

 후지사키의 나직한 말에 구라타도, 도우야도, 신도우도 난리가 났다. 무슨 소리냐고 소리치는 셋의 반응에도 그는 아랑곳않고 도우야와 신도우의 눈을 차례로 하나하나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1패를 한다고 생각하고 둬.’

 

 아, 셋은 탄식했다. 상대의 도발에 흔들리는 신도우의 마음과, 그런 신도우의 마음이 전염된 것처럼 혼란스러워하는 도우야. 둘의 머릿속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믿는다.’

 

 그 말을 끝으로 후지사키는 침실로 들어갔다. 몇 마디 되지 않는 그 이야기들이 신도우와 도우야의 마음이 흔들리던 것을 바로잡아주었다.

 

 “신도우. 꼭 이겨.”

 

 도우야는 신도우의 어깨를 꽉 쥐었다 놓았다. 신도우는 그런 도우야에게 굳은 다짐이 서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둘의 시선이 먼저 자리에 앉은 후지사키에게 향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바둑판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에서는 알 수 없는 기세가 뿜어져나왔다.

 

 알게모르게 ‘후지사키는 이길 테니까 1승만 한다면’이라는 어설픈 마음이 들었던 것도 거짓은 아닐 테다. 하지만 그의 말로 인해 그러한 약한 마음은 사라졌다.

 

 둘이 마음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았다.

 

 “신도우 초단이 흑, 이장은 임일환 4단이 흑, 삼장은 후지사키 3단이 흑입니다.”

 

 한국와 일본,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대국이.

 

 “그럼, 시작하세요.”

 

 막을 올렸다.

 

 

 

 

 한국팀의 주장 고영하, 이장 임일환, 삼장 홍수영은 상대를 우습게 볼 생각은 없었지만 이번 대회에서 자신들의 팀이 질 거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것을 수정해야하지 않을까. 이미 이장의 임일환은 가망이 없다. 상대 도우야 아키라에게 수상전에서 완전히 당해버린 탓에 주장과 삼장의 승부만이 남았다.

 

 삼장 홍수영은 주장 고영하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쪽은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상대팀의 주장 신도우 히카루의 실력이 낮다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 홍수영 자신을 이긴 적이 있는 상대였으므로.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고영하를 이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승패의 갈림길은 자신이 될 터. 홍수영은 저와 고작 한 살 차이의 상대 삼장 후지사키 키요시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지난 시간동안 계속해서 그들의 수를 분석해왔다. 특히나 사람마다의 바둑에는 습관이나 기풍 같은 것이 있으니까 분석을 잘만 한다면 상대의 수를 읽고 그것을 꺾어낼 확률은 상당수 높아진다.

 

 그래서 자신 있었는데. 홍수영의 입술이 까득 깨물렸다.

 

 그를 분석하였던 것이 모조리 쓸모 없는 것이라는 듯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수를 두었다. 후지사키의 흑돌이 좌상귀며 우상귀에 수두룩이 늘어섰다. 하변은 취약해보였으나 홍수영은 차마 자신의 수를 함부로 그곳에 둘 수가 없었다.

 

 저를 잡아달라는 듯 단 세 점의 흑돌이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 쎄하였다. 홍수영의 감이 날카로운 경고를 날렸다. 저것을 잡으러 들어가다가는 그대로 숨통이 날아가고 말 것이라고.

 

 홍수영은 그나마 살 길이 보이는 좌상귀에 수를 놓았다. 곧장 따라붙은 백돌이 마치 그의 발부터 묶어버리겠다는 듯이 그 수를 옭죄었다.

 

 아니, 사실은 베어낸 것이 아닐까. 바둑판 위에 칼이 있어서, 자신의 수를 모조리. 두면 둘수록 끊겨가는 자신의 백돌의 손과 발, 그리고 그 큰 뿌리인 머리까지.

 

 수순은 엉망이었다. 분명히 말도 안 되게 엉망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길 수가 없었다.

 

 “…졌습니다.”

 

 홍수영은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무는데, 눈앞에 들이밀어진 정수리에 긴장했던 숨을 탁 놓았다. 뭐라고? ‘졌습니다’? 신도우 히카루에게 지고 난 후로 배우기 시작한 일본어 실력이 아니더라도 그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을 거다.

 

 분명히 자신의 ‘백’이 진 판이었다. 홍수영은 멍하니 상대를 보았다. 그런데 왜? 어째서? 어째서 돌을 던진 거지?

 

 ‘흑’ 후지사키 키요시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돌을 정리하였다. 홍수영이 그제야 상황을 판단하고 싸하게 가라앉았던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장난해?

 

 홍수영의 손이 떨어뜨렸던 돌을 부서져라 그러쥔다. 그리고는 저가 배운 일본어로, 무어라고 쏘아붙여주기위해 입을 떼었다.

 

 이렇게 저를 짓밟듯이 이겨놓고, ‘졌다’고? 우롱하는 거냐? 놀리는 거냐고!

 

 그러나 그 말은 내뱉어지지 못하였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상대의 눈동자가, 후지사키의 그 마음이 홍수영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

 

 맥이 탁 풀렸다. 마주했던 상대의 눈은 어느새 신도우 히카루, 그들의 주장에게 향했다.

 

 그렇구나. 핏기가 가실 정도로 힘이 들어갔던 홍수영의 손이 툭하니 쥐었던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그러며 자신의 백돌이 흐트러진 바둑판 위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허탈함이 담겼다.

 

 후지사키 그는 자신의 승패 따위 중요하지 않은 거다. 그저, 믿는 거였다.

 

 자신이 패함으로써 더욱 제 바둑에 온힘을 쏟아부을 ‘신도우 히카루’의 가능성을.

 

 자신이 자신들의 주장 ‘고영하’를 믿었던 것처럼 그 또한 그들의 주장 ‘신도우 히카루’를.

 

 믿는 거였다.

 

 홍수영은 길 잃은 분노와 함께 차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을 꾹꾹 억누르며 후지사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그들의 주장 고영하와 신도우 히카루의 대국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는 자신들이 패배하리란 생각일랑은 전혀 없는 것처럼 불안감이나 초조함은 일말도 내비치지 않았다. 홍수영이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하다. 분하고, 또 분해서 당장에라도 다시 두자며 따지고 싶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자신들의 주장을 믿는 것만이 저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므로.

 

 홍수영은 후지사키 키요시 그와의 대국은 잠시, 아주 잠시 미루어두기로 하였다.

 

 

 

 

 ***

 

 

 

 

 휴. 다행이다. 상대팀의… 뭐더라, 이름이. 홍수영? 나보다 조금 어리댔지. 그래서 그런가 표정이 훤히 보여서 언제 고개를 숙여야할 지 딱 알아챘다. 어제 중국팀이랑 둘 때는 각이 안 나와서 이겨버렸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졌습니다.”

 

 녀석이 고개를 숙이기 직전에 후다닥 먼저 머리통을 꾸벅 숙이고는 후련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진짜 필사적으로 지기 위해 노력하느라 머리 뽀개지는 줄 알았다. 저번에 도우야 녀석이 말했던 것과 정반대로 두면 지기 딱 좋을 것 같아서, 멋대로 생각난 곳과 조금씩 빗겨나간 곳에 두었기 때문이다.

 

 와. 내가 생각이란 걸 하다니. 기특하군…은 개뿔, 게임에 이렇게 머리를 썼으면 랭킹 1위 먹었을 텐데. 슬픈 마음으로 시선을 돌려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게 다 저 신도우 히카루랑 도우야 아키라 때문이다.

 

 씩씩거리며 속으로 분을 삼켰다. 내일부터 또 리그전이 있어서 대국 왕창 해야하는데 이놈의 북두밴지 뭔지 때문에 도우야 녀석의 집에 강제로 붙들려서 몇날며칠 바둑귀신이 들린 거머리 둘에 둘러싸여 합숙해야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끔찍하다.

 

 이딴 거 다신 하나봐라. 다음엔 꼭 절대 안 한다고 해야지. 굳은 결심으로 도우야와 신도우 녀석의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물론 지금까지 바둑도 두기 싫다면서 거절 못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기는 하지만….

 

 오늘 대회만 끝나면 바로 도망갈 거다. 그렇게 알아라.

 

 물론 소심한 나에겐 도망갈 데가 집밖에 없어서 글렀지만서도. 흑. 안구에 습기가 찼다.

 

 “반집.”

 

 때마침 들려온 소리를 무시하고 한 손으로 눈가를 짓눌렀다.

 

 “신도우가 졌어.”

 

 도우야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회가 끝났는지 이어서 무어라 무어라 시끄러운 대국장을 뒤로하고 도우야와 신도우의 어깨를 툭 쳐주었다.

 

 “간다.”

 

 이제 끝났으니까 가도 되겠지. 시상식 어쩌구하며 누군가 잡을까봐서 부리나케 도망쳤다. 방문 걸어잠그고 오늘만큼은 게임할 거다. 아니, 근데 아이디를 잃어버렸잖아?

 

 나 울래.

 

 

 

 

 내 인생은 망했어. 바둑에 완전히 물들어버렸다고. 일전에 한 번 온 적 있는 유현의… 여튼 유서 깊다는 대국실 앞에서 절망에 빠져있는데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끌끌.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꼬마야. 저단자 그룹에서 도전자가 나올 줄이야.”

 

 할아버지가 그렇게나 좋아하시던 영감님, 아니 구와바라 혼인보였다. 그런데 영감님. 저는 이제 영감님보다 훨씬 큰데요. 꼬마라는 말은 정정해주시죠. 처음 프로기사가 되어 신초단인지 뭔지를 함께했던 때를 떠올리곤 못마땅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해가 바뀌고 키도 20센티는 더 큰 거 같은데 왜 아직도 부르는 호칭이 꼬마인가요. 제 이름은 꼬마가 아니라 키요시인데요.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꼬마 네가 북두배에 참가하느라 일정이 많이 조정되었지. 페이스가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래야 재밌을 테니.”

 

 입을 비죽이며 투덜대려는데 영감님이 웃고 있던 얼굴을 싹 굳히며 내게 속삭였다.

 

 “그때처럼 대충 두고 고개숙일 생각일랑은 말거라.”

 

 그 얼굴이 어마무시하게 무서워서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아니? 이 영감님이? 얼굴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물론 어른이시니까 쬐끔만 노려보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이번에도 중간에 틈 잘 봐서 고개 숙이려고 했는데. 텄다, 텄어. 푹 한숨을 내쉬며 입맛을 다셨다.

 

 

 

 

 16살이 되었다. 그리고 타이틀을 따버렸다. 으엉엉. 대국이 더 늘어버렸다는 말이다. 맙소사. 세상에. 여기서 더? 여기서 더 늘어난다고? 바둑이 마구마구 내 인생에 끼어들어버린다고?

 

 싫어어어어어어!

 

 “축하해, 후지사키.”

 

 “타이틀이라니… 역시 제일 먼저 딸 줄은 알았지만 벌써 따낼 줄은 몰랐어.”

 

 도우야와 신도우에게 어거지로 끌어앉혀진 도우야네 기원에서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더….”

 

 더는 못 둬. 못 해. 안 해.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네?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바둑판을 노려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씩씩대는데 토닥토닥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우리 정진해서, 더 많은 타이틀을 따내자.”

 

 도우야였다. 왠지 모르겠는데 헛소리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그 헛소리를 하는 게 도우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좋아! 후지사키. 나도 지지 않을 거야!”

 

 신도우 이 자식도 이상한 소릴 해댄다. 나는 울먹였다. 여긴 글렀어. 가망이 없다. 돌연 무서워져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러다 진짜 이 악마들에게 이끌려서 바둑에 허우적거리게 될지도 몰라….

 

 내 절망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두 녀석이 하하 웃으며 엎드린 내 등을 두들겼다.

 

 “감동했구나? 짜식.”

 

 감동은 개뿔이. 인디언밥 하지 마, 이 자식들아.

 

 

 

 

 신도우 녀석에게 이끌려 인터넷 카페에 들어섰다.

 

 “여기, 기억 나지?”

 

 으응. 잘 기억 나지. 네가 ‘sai’라는 쪽팔린 닉네임으로 대놓고 인터넷바둑 두고 있던 곳 아니냐. 시큰둥하게 녀석을 보고 있자니 녀석이 씩 웃었다.

 

 “‘sad’로 나랑 대국할래?”

 

 힉. 그 닉네임을 거론하다니. 소름이 끼쳐서 흠칫 물러서자 신도우는 키득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어영부영 그 옆자리에 앉은 나는 떨떠름하게 인터넷바둑 사이트를 켰다. 부모님 몰래 게임할 때 킨 것 말고는 이렇게 자발적으로 켜는 건 처음인데.

 

 “내가, ‘sai’라는 이름으로 두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후지사키 너와 꼭 이렇게 둬보고 싶었어. 그러면… 그렇게하면 ‘사이(sai)’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 아이디 잃어버린 거를 다시 떠올린 건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울이는데 녀석이 갑자기 아련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뭔데. 내가 머리 굴리는 사이에 뭔가 있었냐.

 

 “함께 둬줄거지?”

 

 그, 그렇게 말하면 거절하기가. 에라 모르겠다!

 

 “…막 둘 거야.”

 

 “그래.”

 

 엉망진창으로 아무렇게나 마우스 닿는 곳에 마구 둬버릴 거라고? 뚱하니 말하는데 녀석은 웃기만 하며 인터넷바둑 사이트에 접속했다. 뭐야, 진짜 아이디 찾았나보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못 찾았잖아.

 

 급격히 우울해져서 시무룩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도우 녀석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후지사키.”

 

 “아니. 고마워하지 마.”

 

 그 인사를 받으면 돌이킬 수 없을 거 같은 기분이 마구마구 들거든. 정색하며 신도우 녀석을 노려보고 다시 컴퓨터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흑, 내 아이디는 대체 뭐였을까. 나도 빨리 되찾고 싶다. 눈가에 뭔가 간질거려서 손으로 쓸어냈다.

 

 눈물인 거 같다. 열심히 키워온 계정을 잃어버린 가슴 쓰림… 바로 이런 걸까, 인생의 쓴맛…….

 

 

 

 

 어쩌다보니 대국하게 되기는 했는데, 뭔진 모르겠지만 신도우 이 녀석은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다. 복잡미묘한 표정을 하는 녀석의 어깨를 툭하니 쳐주었다.

 

 “이제 후련하냐.”

 

 “…그러네. 고마워.”

 

 신도우는 어딘지 쓸쓸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눈을 맞추며 고맙다고 하는데,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어색하기만 하고 부담스럽기만 해서 머쓱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봤자 내가 한 거는 그냥 네 녀석이 돌 놓는 거에 맞춰서 대충 오목 둔 거밖에 없는데 뭘.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 던 두었던 바둑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대체 왜 다들 나한테 대국하자고 자꾸 조르는 거야? 진짜 엉망인데.

 

 

 

 

 ***

 

 

 

 

 신도우 히카루는 옆에 앉은 후지사키를 힐끔 보았다. 그는 어떻게 느낄까? 자신 외에 ‘sai’를 알았던 유일한 인물. 그런 그가 ‘sai’를 대신해서 신도우 자신이 ‘sai’의 아이디로 두자고 했을 때 ‘sad’, 그러니까 후지사키는 어쩐지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 것처럼 최소 서너 번은 거절하던 때와는 달리 못마땅해하면서도 한 번에 수락해주었다.

 

 “막 둘 거야.”

 

 그는 그렇게 했지만 그게 저를 배려해서라는 것을 안다. 히카루는 이제야 후지사키의 성격이 좀 보이는 것 같았다. 저가 ‘sai’로서 두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알고 있기에, 부담을 갖지 말고 두라는 그 나름의 농담일 테다. 히카루가 설핏 웃었다. 이번 대국은 사이가 아닌 히카루 자신이 하는 것이지만, 마치 저번에 두었을 때처럼 ‘흑’을 그가 잡았고 ‘백’을 자신이 잡았다.

 

 후지사키 키요시.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어땠지? 그래, 처음에는 무서웠다. 차가운 인상이라고 생각했다. 사나운 눈매는 조금만 치켜떠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조금만 인상을 써도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챌 만큼 냉랭하였다. 먼 발치에서 이름만 들었던 그는 어느날, 넷카페에서 하필이면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었다.

 

 그 시선이 정확이 ‘사이’에게 향하는 것을 보며 히카루는 아차했다.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 녀석에게 사이가 보이는 걸까? 그렇다면 완전히 들켜버린 것은 아닐까?

 

 “저기, 혹시 봤어?”

 

 그래서 그때, 지레 겁을 먹어서 당장에 그를 붙잡아 물었다. 그러나 녀석은 시종일관 히카루 자신을 무시하였다. 그래서 히카루는 강경책을 내놓았다. 녀석도 바둑을 두는 프로기사이니만큼 ‘sai’와 두게 해주면 비밀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해서.

 

 “대신 비밀이야.”

 

 히카루로서는 크나큰 도박을 내건 것이다. 마른침을 삼키며 후지사키를 근처 기원으로 데려가 대국을 두어주기 위해 준비하며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내가 ‘sai’라고 절대 말하지 마. 알겠지?”

 

 녀석은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으나 히카루는 그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올까 두려워 서둘러 돌을 건네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그는 돌을 두던 것을 멈추고 차분하게 입을 떼었다.

 

 “그만하자.”

 

 100수 남짓이었을까. 수놓아진 돌을 쓸어모아 정리하고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이 제 돌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히카루는 움직일 수도, 바둑판에서 시선을 뗄 수도 없었다. 히카루가 멈추었던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의 손에 의해 모조리 치워지고 말았으나 히카루의 눈앞에는 여전히 후지사키 그와 사이가 두었던 수들이 너무나도 선연히 아른거렸다.

 

 “이기든 지든 나는 말 안 해.”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녀석은 말하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히카루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 말이 입안을 멤돌았다. 고작 100수였다. 어떻게 이런 수를 둘 수가 있지? 어떻게 사이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수 있냐는 말이다.

 

 [히카루.]

 

 사이가 히카루를 불렀다.

 

 [저 사람… 키요시, 저 아이와 계속 두고 싶습니다! 어서 그를 붙잡아주세요!]

 

 그제야 히카루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기원 안에는 히카루 혼자만 덜렁 남겨진 뒤였다. 사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히카루를 다그쳤다.

 

 [이대로… 이대로 대국을 중지할 수는 없습니다! 저 아이는….]

 

 초조한 사이의 음성이 히카루의 귓가에 내리꽂힌다.

 

 [저 아이라면, 어쩌면 신의 한 수를…!]

 

 다급한 그 음성에 히카루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간신히 떼어 기원 밖을 나섰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사이가 입술을 깨물며 원통함을 표했다. 그런 사이에게 히카루가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다시… 다시 두게 해줄게, 사이.”

 

 그러니까, 이미 후지사키는 떠났으니 지금은 조금 전의 대국을 더 되새기고 싶었다.

 

 “복기하자. 그 아이의 수를… 다시 두어보고 싶어.”

 

 어떻게 사이를 이렇게나 몰아붙일 수 있는지. 어떻게 그리 얼기설기 엉켜있던 수들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이어낼 수 있는지.

 

 히카루가 크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감았다.

 

 후지사키 키요시. 그의 수들은 처음부터 특이했다. 두어진 수부터 규칙이 없어보여서 누가 보면 초심자가 아무데나 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이가 차곡차곡 쌓아가던 성벽을 무너뜨린 것은 고작 40수가 되어서였다. 우상변, 좌하변 일정한 순서 없이 두어지던 그 수가, 그 무엇도 될 수 없을 것 같던 중구난방한 돌들이 한꺼번에 몰아친 것이다.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았던 것일까?

 

 차마 대응할 새 없이 두어졌던 그 돌들은 순식간에, 아니 동시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사이가 일구었던 귀측의 대마를 단 세 점의 돌로 들쑤셔 찢어내고, 중앙으로 발빠르게 움직였던 수들마저 순식간에 제압하였다.

 

 언제 두어졌는지 모를 하나의 수가 그제야 그것이 수십 수 전에 두어진 수라는 것을, 그게 대국이 중지되기 직전에서야 사이의 백돌의 퇴로를 완전히 봉쇄해버리는 수라는 것을.

 

 히카루는 후지사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때야 깨달은 것이다.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것은 히카루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다고 생각하였던 ‘사이(sai)’ 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이제는 히카루 저와 함께하게된 귀신이자 과거 ‘혼인보 슈우사쿠’로서 수십 년을 지내왔던 그 ‘후지와라노 사이’까지도 말이다.

 

 [대체.]

 

 사이가 중얼거렸다. 늘 쥐고 있던 부채를 꽉 그러쥐며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한이 서린 음성으로 읊조렸다.

 

 [어찌하여, 이제야.]

 

 육신이 사라져버린 이제야 저리도 싸워보고 싶은 상대를 만나게 된 것인지 통탄스러웠다. 직접, 이 두 손으로 반상 앞에 마주앉아 당당히 두고 싶은 상대였다. 허나… 사이가 쓰라린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투명한 그것은 바닥에 떨어지는 낙엽잎하나도 쥐지 못하였다.

 

 […신이시여.]

 

 히카루는 사이의 슬픔이 고스란히 저에게 전해지는 것만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머뭇머뭇 입을 떼었다.

 

 “사이. 내가 어떻게해서든… 그 아이와 제대로 둘 수 있게 해줄게.”

 

 사이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깊은 슬픔이 담긴 사이의 눈을 히카루는 오래 마주하지 못하였다. 먼저 시선을 돌리며 히카루는 애써 밝은 기색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자. 가서, 오늘 대국을 복기하자.”

 

 그래, 그날 그렇게 말하고는 한참이 흘렀다.

 

 히카루가 과거 그렇게 약속하였던, 사이와의 일을 떠올리고는 쓰게 웃었다. 물론 그 후로 두게 해주려고 아주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후지사키가 중간에 두다 말고 달아났다고 해서 대충 뒤쫓다 말아서는 안 됐었다. 끝까지, 끝까지 그에게 두어달라고 했어야했는데. 지금처럼 말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딸깍이며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후지사키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사이.

 

 조금 더, 조금 더 두게 해주었어야하는데. 결국 끝끝내 온전한 대국은 시켜주지 못하였다. 오로지 단 한 번, 인터넷 바둑으로 ‘sad’와 두게 해주었던 그것이 유일한 그와의 대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사라질 줄 알았다면… 아니, 자신이 조금만 덜 이기적이었다면 분명 사이는 후지사키와 온전히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원없이 둘 수 있었을 텐데.

 

 영원히 함께하리라 믿었던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인 ‘사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후지사키와 제대로 둘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히카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그리고 사이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그래서 속으로 사과하고 또 사과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억지섞인 부탁을 들어준 후지사키에게 감사를 전하려던 찰나였다. 가슴이 먹먹하여 제대로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문뜩 후지사키가 히카루 저를 돌아보며 가볍게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후련하냐.”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러한 후지사키의 모습마저 어쩌면 배려일지 모른다. 어설프게 동정하였다거나 웃기라도 했으면 자신은 당장에 울었을지도. 정말, 그러네. 히카루가 애써 웃으며 이번에야말로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하였다.

 

 “고마워.”

 

 후지사키의 온기가 닿았던 어깨는, 일전에 북두배에서 패하고 나서 좌절하고 있던 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을 때와 같은 따듯함이 서려있었다.

 

 

 

 

 ***

 

 

 

 

 타이틀전은, 그래. 우승상금이 크니까 좋다 이거야. 물론 부모님이 홀라당 가져가셔서 내 미래를 계획하신다면서 어딘가 꼬물쳐두셨지만. 그래서 매달 받는 용돈으로 게임팩을 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데다가 심지어 이놈의 바둑 때문에 바빠서 해가 바뀔 동안 뜯어보지도 못하고 있지만!

 

 “이번에 타이틀전 기념 행사로 지도기를 둬주는 행사가 도쿄에 있는 호텔에서 열리는데, 우리 후지사키 혼인보도 참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아니지. 지도기? 내가? 싫어요. 안 가. 오목이라면 둬드릴 수 있습니다. 아주 자신있습죠. 네. 근데 바둑은 안 돼. 내가 두는 건 진짜 두는 게 아니란 말이야. 행사 담당자라고 했던 아저씨는 창백해진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 하하 웃으며 내 손에 안내서류를 들려주었다.

 

 “저는.”

 

 대국만도 벅찬데, 행사는 절대 절대 참가하고 싶지 않다고요. 거절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굳게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으나 아저씨가 퍽퍽 내 팔뚝을 토닥이며 웃는 바람에 망했다. 울먹이며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아들고는 절망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훠이, 손을 펼쳐서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른이 주신 건데 어떻게 함부로 버려.

 

 “명인전도 기대가 큽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안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뭐라뭐라하는 아저씨의 말을 흘려듣고 해탈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침 달력이 있는 곳이라 그곳에 적힌 상세한 일정을 읽어내릴 수 있었다.

 

 내 얼굴은 더 창백해졌다. 빼곡해. 빼곡하다고. 설마 이 행사를 전부…?

 

 “아, 다른 행사도 관심이 있으신 거군요.”

 

 아니아니아니아니요. 절대 아니요. 헛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대국일정이.”

 

 엄청, 어어어엄청 많거든요. 가쁜 숨으로 더듬거리며 입을 여니 내가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아저씨가 알아서 말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모든 리그에서 승승장구하고, 왕좌전이나 천원전 본선에도 진출하셨지요. 바쁘시겠군요.”

 

 네! 게임할 새도 없이 바쁘다고요! 열렬히 끄덕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저는 그럼.”

 

 나를 붙잡기라도 할까봐 쿵쿵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호다닥 튀었다.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이 생각나서 우뚝 멈췄다.

 

 맙소사. 이거 거절 못했어. 손에 들린 종이를 파르르 떨릴 정도로 세게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망했다. 망했어. 망해도 왕창 망했다.

 

 

 

 

 도우야랑 신도우 녀석이 오늘도 나를 기원으로 끌고 와서 괴롭게 했지만, 차마 오늘만큼은 둘한테서 벗어날 기운이 없었다.

 

 “후지사키, 무슨 일 있었어?”

 

 우울한 얼굴이 녀석들에게도 드디어 제대로 보였나보다. 푹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내일 모레 행사가 있어.”

 

 “아, 호텔에서 열리는?”

 

 내가 말하자마자 도우야 녀석이 아는 척을 해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울상을 지었다. 입을 떼면 울컥할 거 같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도우야가 알아서 뒷말을 이어주었다.

 

 “너는 지도기는 안 되잖아.”

 

 그래. 그거야. 울먹이며 도우야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알긴 아는구나. 다행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냥 바둑도 안 된다는 걸 알아줄래? 라는 바람을 담은 것이었지만 녀석은 내 눈빛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결의를 다지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좋아. 내가 도와줄게.”

 

 뭐라고? 도와준다고? 쎄한 느낌에 살짝 몸을 물렸다. 이거, 약간 데자뷰 같은데. 왜 불안하지.

 

 

 

 

 ***

 

 

 

 

 도우야 아키라는 후지사키 키요시의 푹 수그러진 고개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운을 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키라의 말에 후지사키는 드물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이마를 짚으며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말이다.

 

 “내일 모레 행사가 있어.”

 

 아, 지도기가 열리는 그 행사. 아키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식했다.

 

 “후지사키, 너는 지도기가 안 되잖아.”

 

 그렇게 말하고는 아키라는 아차했다. 더 우울해진 후지사키의 안색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공격적인 기풍을 가지고, 그것을 상당히 꺼려하는 아인데 그걸 자신이 건드려버렸다.

 

 미안한 마음에 아키라가 난감함을 삼키며 어떻게든 그를 도울 방법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방법… 후지사키가 무사히 행사에서 지도기를 둘 수 있게끔 만들어줄……. 아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면 되겠다.

 

 “내가 도와줄게.”

 

 내일까지 후지사키에게 ‘적당히 지는 법’을 알려주는 거다. 아키라가 굳게 다짐하며 두 손을 쥐었다. 지도기는 안 되더라도 상대의 기분이 좋아지도록 얼추 두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지는 것까지는 되겠지?

 

 “어….”

 

 그리고 그것은 아주 큰 오산이었음을 아키라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깨달았다. 얼떨결에 함께하게 된 신도우 히카루가 난감한 목소리로 신음을 삼켰다. 힐끔 후지사키를 보는 그 시선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어찌 알았냐면, 아키라 본인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후지사키… 그러니까… 이렇게 티나게 지면 안 돼. 이 정도면 초보자도 알 거야.”

 

 대놓고 정직하게 돌을 네모반듯히 두기만 하는 후지사키의 행태에 둘은 식은땀을 흘렸다. 잊고 있었는데, 천재에게는 범재가 이해할 만큼의 과정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즉, 완전히 이기거나 완전히 지거나 둘 중 하나란 말이다.

 

 “차라리 오목을 둘게.”

 

 낙심한 후지사키가 웅얼거리는 것을 듣고 아키라도 신도우도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

 

 

 

 

 좋다. 엊그제도 바둑, 어제도 바둑, 오늘도 바둑. 하하. 넋을 잃고 행사장에 서서 주변으로 눈길을 주었다. 어디 콕 박혀있을 곳 없을까.

 

 “오, 후지사키 혼인보! 구와바라 선생님의 혼인보 타이틀을 드디어 탈취해낸 신예 아닙니까!”

 

 “오오, 아직 16살밖에 되지 않았다지요?”

 

 “그렇습니다. 저단에서 타이틀보유자가 나오는 것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귀신 같은 사람들이 내가 온 걸 어찌 알고 옹기종기 몰려들어서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일단 들어서 좋을 건 없어보여서 주춤주춤 사람들 틈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걸음을 떼는데, 의외의 인물이 나를 도와주었다.

 

 “후지사키! 아, 죄송합니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 후지사키를 좀 데려갈게요.”

 

 도우야 아키라였다. 내 구세주. 눈물을 글썽이며 울지 않기 위해 인상을 쓰고 녀석의 손길이 이끄는대로 몸을 움직였다.

 

 “자, 어제 말했지? 최대한 어린 친구들을 도와주는 거야. 그리고 네 말대로 오목을 둬. 알았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도우야 녀석에게 눈빛으로 감사를 전했다. 녀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바둑을 모르는 애들을 놀아주는 것쯤은 할 수 있지? 그런 아이들은 기본 사활만 알려주면 되니까.”

 

 네? 왜 갑자기 미션이 업그레이드 되었죠? 벙쪄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내 어깨를 토닥이곤 걸음을 옮겼다.

 

 “너한테 갈 것 같으면, 웬만하면 신도우랑 내가 커버하기로 했으니까.”

 

 아니, 그건 고마운데. 저기, 사활 나 모르는데요.

 

 “아, 저기 저 애를 도와주면 되겠다. 저 아이 부모님은 내가 맡을게.”

 

 저기요. 잠깐만. 내 손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도우야 녀석의 손을 다급히 쳐내려했지만 이미 늦었다. 녀석이 말했던 ‘저 아이’와 떠억하니 눈이 마주친 바람에 나는 뻣뻣하게 굳었다.

 

 “꼬마야. 심심하니? 이 형이 너한테 재밌는 걸 알려준대.”

 

 도우야 녀석은 마지 저가 도와주는 것처럼 선심 쓰듯이 아이에게 말을 건다. 입을 벌리고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퍼뜩 아이를 돌아보았다.

 

 심심하지 않다고 해. 빨리. 나 싫다고 해라. 그래서 제발 나랑….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한참을 있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형아! 저두 바둑 알려주세요!”

 

 싫다고 해야지, 얘야……. 차마 애 앞에서 한숨을 쉬지는 못하고 얼굴을 쓸었다.

 

 “자, 후지사키. 두어 점 따먹혀주거나, 간단한 사활을 알려주면 될 거야. 알았지? 절대 바둑은 두지 마.”

 

 저기요…? 그게 바둑이랑 다를 게 뭔데. 아니, 일단 나 사활 같은 거 모른다니까? 나를 버려두고 떠나려는 도우야 녀석을 다급히 잡으려 했으나 쪼끄만한 손이 내 팔을 잡아와서 화들짝 놀라며 굳었다.

 

 “형, 형. 빨리 나 알려줘요! 엄마가 그랬는데 형 엄청엄청 바둑 잘 둔다면서요! 헤헤.”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어린애에게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내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곡하게 거절도 못하고 머뭇거리며 입을 떼었다.

 

 “바둑 말고 오목이라도….”

 

 “오목은 시시해!”

 

 컥. 치명타. 큽 신음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목을 싫어하는 애가 있다니. 절망했다.

 

 

 

 

 음… 난감한 눈으로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애가 울먹이고 있어서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할지 몰라하고 있는데, 멀리서 황급히 도우야가 달려왔다.

 

 “후지사키, 바둑을 두면 어떡해….”

 

 미안한데, 난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 오목의 세계를 알려줬을 뿐이라고. 사삼이랑 삼삼을 한 세 개 정도만 만들었을 뿐인데. 그, 그렇게 보지 마. 따가운 도우야의 눈초리에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돌도 많이 먹혀줬다고.”

 

 변명이랍시고 애가 딴 돌그릇을 가리켰으나 잠시 그것을 향하던 도우야의 눈은 이내 바둑판을 향했다가 아이를 항했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보았다.

 

 “그래도, 이건 완전….”

 

 그러게 나 못 둔다니까. 시무룩하게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순서없이 뒤엉킨 수들이 거기 있었다. 누가 봐도 제대로된 바둑은 아니겠지.

 

 당연하지, 난 바둑 몰라! 못 둔다니까?

 

 속으로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난 갈게.”

 

 진짜. 빨리 그만 두든가 해야지. 몇 걸음 가서 아이가 멀어졌을 즈음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부담돼서 진짜 못하겠다. 할아버지한테…….

 

 “어떻게 하지.”

 

 내가 그만 둔다고 하면 분명히 또 잔뜩 부담되는 눈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겠지. 아악! 고통의 굴레다. 난 왜 벗어날 수가 없어! 눈물이 날 것 같은 눈을 한 손으로 꾹 짓눌렀다.

 

 

 

 

 응. 이제 완전 익숙해졌어.

 

 “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개 숙이는 상대에게 마주 인사하며 해탈한 표정으로 바둑판을 응시했다. 복기하는 상대의 손이 바쁘다. 근데 오늘따라 오래 걸린다. 의아해서 고개를 갸울이는데 상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여기서 이렇게 두었다면….”

 

 그러자 뭔가를 바라듯이 슬쩍슬쩍 내게 눈치를 준다. 마지못해 돌을 쥐었다. 무슨 수를 두든 알아서 해석하겠지만 이번에는 너무나도 빤히 보이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툭하니 돌려두었다.

 

 왜냐면 거기가 바로 가로랑 대각선 오대오 쌍빙고였거든.

 

 “완전히 굳히겠다는 거로군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나온다면…?”

 

 혼자 고개를 주억이던 상대가 또 다시 내게 눈치를 주었다. 울컥해서 돌을 꽉 쥐고는 던지듯이 판 위에 내려찍었다.

 

 “끝입니다.”

 

 끝. 대국 끝. 오늘 바둑은 더 이상 없어.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이렇게만 몇 번째야. 이제 그만 해, 이 사람아! 짜증스럽게 곧장 돌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상대방이 입을 다물었다. 나보다 연장자였지만 더는 못 참겠다. 다른 때보다 20분은 넘게 질질 끌고 있다고?

 

 “그리고 삼에 삼, 거기 남아있잖아요.”

 

 바둑은 모르겠고, 오목으로 둬도 그 삼삼 때문에 당신 질 거라고. 내가 들어도 기분 안 좋아 뵈는 목소리로 툭하니 말을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국실에서 탈출했다.

 

 휴. 살겠다.

 

 

 

 

 오늘은 드디어 쉬는 날이다. 진짜 얼마만에 아무것도 없는 날이야. 감정이 격해져서 울컥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 동안 모아두었던 게임팩들을 모조리 꺼내들었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는데.

 

 “안 켜져.”

 

 왜지. 왜. 왜야. 왜 때문이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연달아 전원버튼을 누르는데 그제야 간신히 불이 들어오는 듯싶던 컴퓨터는 죽기 직전의 촛불처럼 반짝였다가 삑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아.”

 

 맙소사. 컴퓨터야. 너… 설마……. 울쩍한 얼굴로 컴퓨터에 푹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박았다.

 

 너무 오래 안 켜서 시위라도 하는 걸까. 미안하다. 사과할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바둑이가 날 놓아주지 않았는걸.

 

 돌아와, 컴퓨터야…….

 

 

 

 

 결국 어제 게임은 못했다. 부모님께 조심스럽게 컴퓨터의 사망소식을 전했더니 그렇게 넷바둑이 하고 싶었느냐며 새로 사주겠다고 하셨다. 그건 다행인데… 넷바둑이라니. 오해였지만 컴퓨터를 사주신다는 것은 완전 오예였기에 굳이 정정해드리지는 않았다.

 

 문제는 컴퓨터를 사주신다고 해도 오늘부터 두어 달 간은 타이틀전이 세 개나 몰려있어서 겁나게 바빠서 건들지도 못할 거란 거다. 리그전인지 본선인지 뭔지 그냥 두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그것보다 시간이 두 배정도 걸려서 두어야하는 도전 뭐시기란말이다!

 

 타이틀 도전기 세 개.

 

 말이 세 개지, 대시합이나 다른 기타 대국일정도 있어서 당분간은 정말로 하루에 두 번씩 대국해야할지도 모른다. 말도 안 돼. 진짜 내 인생 바둑에 절여졌어. 김장김치 담그기 직전의 배춧잎처럼. 완전 폭삭 절여졌다고.

 

 아악, 괴로워! 지금도 눈만 감으면 눈앞에 도우야 녀석과 신도우 녀석이 맨날 투닥거리던 게 떠오르는데, 바쁜 덕분에 그 둘을 만나지 못하는 건 좋지만 그 대신 맨날 격자무늬바둑판이 나를 괴롭히겠지? 마구마구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겠지?

 

 진짜 차라리 오목을 두고 싶다. 오목은 5분이면 끝나는데 바둑은 잘못하면 5시간이잖아.

 

 “명인전 제 1국, 시작하겠습니다. 착석해주세요.”

 

 하하. 맞다. 명인전은 8시간이랬나? 허허롭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저번에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영감님이랑 혼인보 타이틀전에서 이틀 내리 대국했던 게 떠올랐다. 그것도 8시간이었지.

 

 “그럼, 시작해주세요.”

 

 살려줘.

 

 

 

 

 바둑… 웬수 같은 바둑…. 그래, 그 시작은 모두 도우야 아키라였다……. 원망의 눈초리로 도우야 녀석을 바라보는데, 내 초췌해진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녀석은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나와 대국하고 싶어서 그러니? 지치지 않았어? 내일 또 왕좌전… 아니다. 그렇게 두고 싶다면 두자, 후지사키.”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식겁해서 두 팔을 감싸며 팔짱을 끼고 몸소리를 쳤다.

 

 “걱정하지 마. 져도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본래라면 상냥할 도우야의 미소가 오늘따라 더더욱 악마같아보였다. 그 상처 내가 받을 거 같은데. 울상을 지으며 한탄했다.

 

 “진짜….”

 

 너무 힘들다. 훌쩍.

 

 

 

 

 ***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홍수영은 완벽하지 못한 일본어로 신문을 읽어나갔다. 아직 읽기 어려운 한자들도 섞여있었지만 문맥상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하였다.

 

 《바둑계에 파란을 몰고 온 16세 프로기사 후지사키 키요시, ‘혼인보’에 이어 ‘명인’까지》

 

 그도 그럴 것이 기사 제목부터가 내용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었으니까. 홍수영이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프로기사가 되자마자 혼인보 타이틀과 명인 타이틀을 따내기란 쉽지 않다. 특히 일본 기전은 저단일수록 더 많은 대국을 치러야만 가까스로 상위 대국에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된다. 3단이나 4단 이하의 프로기사는 기전마다 상이할 수 있겠으나 가장 낮은 그룹에서부터 시작하여 거의 1년에서 2년에 걸친 수많은 대국을 치러야만 ‘본선’이나 ‘리그전’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본선이며 리그전이며,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아야 도전자로서 타이틀에 도전할 수 있는데…. 신문에는 자그맣게 후지사키 키요시의 명인전 기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홍수영은 고작 몇 개월 전, 여름에 있었던 북두배에서 당시 3단이었던 후지사키 키요시를 떠올렸다.

 

 3단이었던 그가 벌써 혼인보와 명인 타이틀을 땄다고?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홍수영의 눈동자가 몇 번이고 기사를 훑고 또 훑는다.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경악에 경악이 더해졌다. 혼인보전은 심지어 북두배가 진행된 중간에 치러진 이틀걸이의 장기전 대국이었다. 거기서 이겼다니…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일단은 타이틀전에 최종 도전자로 낙정되었다는 것부터도 경악스럽다. 홍수영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녀석하고 대국을 했었다니, 당연히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나. 그에 닿지 못하는 자신의 실력이 허탈하기도 하고 원통하기도 해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다.

 

 후지사키가 프로가 된 것은 바로 2~3년 전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는 건 프로가 되고 나서부터 한두 번을 제외한 거의 모든 대국을 지지 않고 치러냈다는 말과도 같았다. 아무리 바둑의 신이라도 불가능할 법한, 정말이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란 말이다.

 

 이래서는 한국 바둑계에서도 간간히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도 무리랄 것이 없었다. 그만큼 관심이 가고, 견주어보고 싶은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장장한 노장들을 이겨낸 새로운 실력자와.

 

 본인이라면 어떨까, 그와 견주어 어떤 수를 두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리고 과연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까지 호승심과 함께 호기심을 비롯한 관심이 그에게 쏠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한국에서 한창 전성기라고 추켜세워주고 있는 ‘고영하’마저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으니 말 다했지.

 

 홍수영은 거의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음성에 신문을 내려놓고 비행기의 안전밸트를 고쳐맸다.

 

 드디어 만난다. 홍수영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번에는, 기필코 제대로된 대국을 하고 말 것이다. 비록 자신이 처참하게 지더라도……. 북두배에서 고개숙이던 후지사키의 모습을 떠올리고 홍수영은 두 손을 꽉 그러쥐었다.

 

 

 

 

 ***

 

 

 

 

 명인전이 참담한 승리로 끝나고 왕좌와 천원의 막바지 대국이 남았다. 어흑. 괴롭다. 그와중에 한국과 일본이 함께 행사를 연다고 해서 본의 아니게 참가하게 됐는데…. 까만 바가지머리의, 나보다 한두살 어린 것 같은 애가 나를 열심히 노려보았다. 좀 무서워서 찔끔했다. 그래서 안 본 척하며 시선을 돌리려다가, 어디선가 본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잠시 고개를 갸울였다.

 

 “어? 홍수영….”

 

 때마침 신도우가 그 아이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뜨며 삿대질했다. 아~ 홍수영? 그게 누구지. 음.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짚어보다가 포기했다. 대신 신도우 녀석이 버릇없이 삿대질하느라 치켜든 손을 접어서 내려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한테 손가락질은 좀 아니지 않니.

 

 슬쩍 아이의 눈치를 보니 기분이 나빴는지 어쨌는지 그 눈이 더 무서워진 채로 나를 향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뭐야. 왜 가까이 와? 내가 안 그랬다고? 얘가 그랬어. 은근슬쩍 신도우 녀석의 뒤로 물러섰다.

 

 “신도우 히카루. 그리고 너는… 후지사키 키요시.”

 

 반갑다는 듯이 신도우에게 인사하고 나는 노려보았다. 아니, 왜? 왜 나만 노려보는데. 삿대질한 건 신도우 녀석인데 나한테 왜 그래. 울먹이며 입술을 지르물었다.

 

 “저번 대국은 잊지 않았겠지? 오늘 이렇게 만난 거, 이번엔 제대로 둬!”


 그놈의 바둑이 문제였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역시 바둑, 너 나가. 내 인생에서 당장.

 

 

 

 

 “이쪽의 바둑판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다름이 아니라 후지사키와 홍수영이 대국을….”

 

 행사 때문에 안 된다고 해. 제발. 홍수영의 ‘대국하자’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신도우가 호다닥 행사 관계자에게 가서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아니? 이 자식이?

 

 “오, 그거 좋겠군요! 안 그래도 북두배에서 두 사람이 겨룬 적이 있었지요. 그 대국으로 사람들이 말이 많았는데 특별기획으로 중간에 한 번 대국한다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어요!”

 

 저기요? 이렇게 충동적으로요? 특별기획이라굽쇼? 아니, 다른 사람들은 동의… 하는 구나. 응. 표정에 써있어.

 

 “나는….”

 

 난 싫어. 싫다고. 이렇게 얼렁뚱땅 대국하게 할 생각하지 말라고! 입을 간신히 떼었는데 누군가 내 말을 가로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두고 싶지만, 한두 시간이면 기다릴 수 있어. 후지사키, 이번에는 저번처럼 당하지 않을 거야.”

 

 화르륵 바가지머리의 아이가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숨을 삼키며 시선을 회피했다. 와, 화상 입을 거 같아. 얼굴이 따가워. 어떻게 바둑 두는 사람들은 이렇게 한결같이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괴롭게 할 수가 있지? 또 뭐가 신경을 거슬렀는지 아이가 버럭 소리쳤다.

 

 “한숨? 한숨을 쉰 거야? 나랑 대국하는 게 그렇게…!”

 

 “아니.”

 

 분노하는 아이의 모습에 질겁하며 손을 들어보였다. 얘가 또 무슨 큰일 날 오해를. 한숨이라니 숨막혀서 숨만 쉬었을 뿐이라고.

 

 “피곤하니까 속기로 하자.”

 

 퀭한 눈으로 작게 내뱉었다. 연일 바둑만 둬서 진짜 힘이 부친다. 전에 얼핏 들어보니까 한국은 이렇게 8시간씩 이틀동안 대국하는 게 없다며? 바둑에 관한 걸 왜 기억하냐고?

 

 부러워서다, 부러워서.

 

 저번에 도우야 녀석이 지나가듯 말한 것이었다. 그걸 듣고 내가 얼마나 충격먹었는지. 왜 나는 8시간이나 둬야하는거지, 딱 그 생각을 하며 억울해했었지.

 

 이틀 바둑 싫어……. 괴로운 표정으로 얼굴을 쓸었다.

 

 “건방져…! 그게 어디까지 가는지 봐주지. 내가, 반드시 이겨주겠어.”

 

 왜 또 그런 눈인데. 아까보다 더 형형해진 아이의 눈초리에 울상을 지었다.

 

 

 

 

 제발 나를 가만히 냅둬줬으면 좋겠다. 없는 사람 취급해줘. 지금부터 후지사키 키요시는 없다. 나는 아무개야. 아무것도 아닌 애.

 

 하지만 벌써 카메라가 눈앞에 들이밀어지고 있잖아? 눈깜짝할 새에 바둑판이 눈앞에 있다고? 강제로 홍수영이라는 아이 앞에 앉혀지고 돌이 쥐여져버렸단 말이다.

 

 난 끝났어….

 

 우울한 표정으로 돌을 쥐었다. 아무렇게나 돌을 가르고 백돌을 가져오고 만 나 자신에게 작은 칭찬을 해주었다.

 

 그래도 먼저 두는 것보다는 낫지. 풀어진 내 표정에 맞은편에 앉은 아이가 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왜, 왜 또. 뭔데.

 

 “지도기 같이 어설프게 둘 생각은 하지 마.”

 

 아, 그거냐. 아이의 말에 고개를 망설임 없이 끄덕였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하하. 지도기? 개뿔.

 

 “걱정 마.”

 

 그냥 바둑도 못 두거든. 손사레를 치며 너털하게 웃었다.

 

 

 

 

 행사가 끝나고 숙소에 들어와서 내일 있을 대국을 떠올리고는 침울하게 머리를 쥐어싸맸다. 아까 그 대국에서 결국 이기는 바람에, 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상대편 아이도 자꾸 떠올랐고 지금 상황이 모두 괴로웠다.

 

 “저기, 후지사키.”

 

 도우야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설마 또 대국하자는 건 아니겠지? 마구마구 나를 바둑에 파묻어버리려는 건…!

 

 “아까 그 대국이 마음에 걸려서 그러니?”

 

 응, 맞긴 한데 무엇을 상상하든 네가 상상하는 건 아닐 거 같아. 불안한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역시 내가 도와줄까?”

 

 고심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이 나를 보는 도우야의 표정에 진심으로 호의가 느껴져서 나는 울었다. 아, 그런 거 아니라고. 도움 필요 없어. 어흑, 눈물 나. 손으로 눈가를 쓰는데 녀석이 재차 말을 이었다.

 

 “분명 그 기풍을 바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런 거 없어. 없다고.

 

 “있을 리가 없잖아.”

 

 애초에 바둑을 못 둔다니까. 내가 몇 번을 말해야해. 결국 엉엉 울며 침대에 엎어졌다.

 

 “…그래, 피곤하겠다. 어서 자.”

 

 이제라도 알아주니 고오맙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줄래. 맞다. 저 녀석이랑 같은 방이지. 더 서러워서 베갯잎에 고개를 파묻었다. 정말 절망스럽다.

 

 

 

 

 좋아, 결심했어.

 

 “정말 그만 둬야겠다.”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에야말로 할아버지랑 부모님께 통보하고 사표… 맞나? 여튼 일단은 바둑협회에다가 나 그만두겠소 얘기하는 거야.

 

 힘내라, 키요시. 아자, 나는 할 수 있다!

 

 어느 때보다 떨리는 마음으로, 어느 때보다 성큼성큼 협회본원에 들어섰다.

 

 “아, 후지사키 혼인보! 이제 명인이라고 불러야할까요. 하하. 마침 잘 됐습니다. 곧 어린이 바둑대회가 열리는데….”

 

 “잠….”

 

 잠깐, 저는 따로 할 일이 있는데요. 그만 둔다는 아주 중대한 일이! 당황한 내가 나를 붙잡은 사내의 팔을 떼어내려 했으나 어른 손을 막 뿌리칠 수가 없어서 쩔쩔 매며 그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 후지사키 선생님께서도 참가해주시는 겁니까!”

 

 “일정이 상당하실 텐데, 이렇게 참가해주신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사람들의 말에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하, 하긴 아직 어리… 아니, 젊으시니 체력은 문제 없으시겠군요.”

 

 “오오오, 감사합니다! 내일 10시쯤 대회가 시작되니 그 즈음 와주시면 됩니다. 준비는 저희가 다 할 테니까요.”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억울한 마음에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떼었는데 그게 또 막혀버렸다.

 

 “자, 그러면 일이 있어서 들른 것 같은데… 어디로 가시던 길이셨습니까? 역시 도우야 4단의 공식 대국을 보러 오신 건가요?”

 

 “그렇지, 두 분은 친구셨지요.”

 

 친구 아닙니다. 원수입니다. 숙적이라고요. 아니, 이게 아니라 저를 어디로 끌고 가시는 거예요? 나 갈 거야, 갈 거라고!

 

 “어? 후지사키, 너도 왔구나. 잘 됐다. 같이 도우야의 수를 둬보자.”

 

 그들이 끌고간 곳에는 정말 질리도록 봐온 신도우가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굳었다.

 

 아… 인생….

 

 

 

 

 도우야 아키라 녀석의 대국이 끝나고 결국 신도우 히카루에게 이끌려 도우야네 집까지 와야했다. 일전에 도우야네 아버지 도우야 명인의 연구회에 끌려왔던 전적이 있는 나로서는 잔뜩 쫄아서 집에 들어섰는데….

 

 “아무도 없어?”

 

 냉랭한 것이 마치 도우야 녀석 혼자 있는 것처럼 집안이 고요하였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얼거리자 도우야가 설명했다.

 

 “아 참, 아버지랑 어머니는 중국쪽 세계대회에 참가하러 가셔서 당분간은 안 계실 거야.”

 

 휴. 다행이다. 무서운 사람들 안 만나도 돼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멈칫했다. 아니, 뭐가 다행이야. 일단 도우야 녀석의 집에 왔다는 것부터가 왕창 바둑을 두게 생겼다는 것이므로 완전 다행이 아닌데?

 

 입술을 지르물며 께름칙한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녀석이 작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후지사키는 상냥하구나. 혼자 있어도 잘 지내고 있는걸.”

 

 그 말은 즉 ‘혼자 있으니까 너도 여기 맨날 와라’ 이런 무언의 협박인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도우야가 신도우를 이끌고 내 어깨를 꽈악 쥐어 밀었다.

 

 “들어가자.”

 

 악마가 속삭이면 이런 느낌이겠지.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후지사키 키요시. 하하. 몸뚱아리야 너는 갔다 와. 내 넋은 여기 있을게. 안녕.

 

 

 

 

 왕좌인지 왕자인지, 천원인지 천 엔인지 다 따버렸다. 이러다 막 둔 게 탄로나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에서 그치지 않을 거 같은데… 아니, 그것도 문제이지만 지금 엄청난 비보를 들었다.

 

 “이제 십단전 스케줄을 맞춰보겠습니다. 이거, 오가타 선생님도 그렇고… 후지사키 선생님도 워낙 바쁘셔서 맞추기가 쉽지 않군요.”

 

 지금도 기성인지뭔지 또 새로운 타이틀 때문에 겁나게 바쁜데 여기서 또 타이틀전을 치르라고?

 

 나 죽어. 진짜 죽는다고.

 

 절망스럽게 내게 건네는 큰 격자무늬의 달력을 내려다보았다. 할아버지의 등쌀이 밀려 모조리 신청해버린 타이틀기전이 내 명줄을 잡는구나.

 

 이제 네모낳고 동그란 것만 보면 토 나올 거 같애.

 

 질린 안색으로 그것을 슬쩍 밀어냈다.

 

 “아, 알아서 잡아도 상관 없다는 말씀이셨군요. 상대를 배려하기란 쉽지 않은데. 덕분에 저희 측에서 일정을 짜기 수월해지겠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하하.”

 

 예? 아… 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하하. 넋을 잃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는 거 봤어? 어떻든 상관없이 이기는 건 자신 있다 이건가.”

 

 “진짜… 건방지다. 그럴 실력이 되기는 하지만 재수 없는 건 어떻게 좀 해주고 싶다.”

 

 “야, 들을라. 소리 줄여. 큰일 나.”

 

 사무실 안쪽에서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는데 너무 작아서 고개를 갸웃하고 그냥 나왔다. 하하. 이제 익숙하다구? 하하하.

 

 아니야. 여전히 괴로워. 훌쩍이며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쥐었다.

 

 “그렇게나 웃긴가.”

 

 “우습겠지. 프로가 되자마자 거의 모든 상대를 다 이겨버렸는데. 이제 연승을 책정하는 것도 무의미해.”

 

 서서히 닫기는 문틈새로 여전히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는 무의미하다는 마지막 말만 들렸다.

 

 으응. 내 인생 무의미….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다 퍼뜩 든 생각에 숨을 크게 들이쉬며 경악했다.

 

 컴퓨터! 내 컴퓨터! 내 게임!

 

 새카맣게 잊었다. 맙소사. 이러다 새로 산 컴퓨터마저 안녕을 고하게 생겼다. 황급히 걸음을 떼어 본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실내에서 뛰면 안 되니까 최대한 빨리 걷다가 건물을 나오자마자 미친 듯이 달렸다.

 

 

 

 

 오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컴퓨터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다섯 번에서 일곱 번까지 치러야하는 기성전 대국이 어제 하나 끝나서 오늘 있을 십단전 제 1국만 끝나면 하루정도는 여유가 생긴다. 즉.

 

 게임을, 드디어, 할 수 있다.

 

 감격스런 마음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실실 웃고 있는데 싸늘한 음성이 귓가를 때렸다.

 

 “자신만만하군.”

 

 힉, 깜짝이야. 화늘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나보다 한 뼘은 큰 오가타 선생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안경너머로 차가운 눈이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그게 무서워서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십단 방어전은 5번 치러지지. 그 중에 단 한 번이라도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그가 날카롭게 말을 내뱉는다. 그게 콕콕 내 심장을 찔러와서 숨이 막혔다. 작게 숨을 고르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정말 힘겹게 내뱉는 내 진심이었다.

 

 “꼭 이겨주세요.”

 

 처음으로 떨지 않고, 온전히 내 마음을 전했다. 와, 누군가 말을 끊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말하기까지 하다니. 기특하다. 장하다, 후지사키 키요시. 뿌듯해서 벅찬 마음으로 웃었다.

 

 왠지 오가타 선생님의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 저기, 제가 또 뭔가 잘못했나요….

 

 

 

 

 십단전인지 뭔지는 호텔에서 치러졌다. 무려 점심시간에는 호텔 뷔페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돌을 쥐는데 작은 말씨로 오가타 선생님이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뭔가… 뭔가 씻고 기다리라는데 손을 씻고 기다리라는 건가. 뭐지. 나를 빤하게 쳐다보며 했던 말이니 분명 내게 하는 말일 텐데, 먹을 생각에 정신팔려서 잘 못들었다.

 

 되묻고 싶었지만 눈초리가 너무 무서워서 못 들은 척 바둑판 위로 시선을 회피했다. 곧 대국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청명하게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졌다.

 

 이것만 끝나면 호텔 뷔페 먹고 게임까지 풀코스로 즐기기 가능가능, 완전 가능!

 

 

 

 

 ***

 

 

 

 

 오가타는 짜증이 났다.

 

 ‘그렇다면, 꼭 이겨주세요.’

 

 씩 웃으며 말하는 후지사키 키요시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그려졌다. 인상을 쓰며 까득 이를 악물었다.

 

 녀석에 대한 분석은 마쳤다. 이기기 힘들다. 그것이 결론이었다. 녀석의 바둑은 종잡을 수 없는 것 투성이였기에. 하지만 약점은 반드시 있을 터.

 

 한없이 공격적인 기풍. 오로지 공격에만 치중된 바둑.

 

 후지사키의 바둑은 그러했다. 그래, 그것이 지금까지는 강점이었겠지. 오가타가 깊게 숨을 들이키고 천천히 내쉬었다. 지그시 감았다뜨인 그의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다.

 

 더 공격적인 바둑을 두어 녀석을 수세로 밀어붙이면, 수비할 줄 모르는 녀석은 어떻게 자신의 돌을 지켜낼 것인가?

 

 그것이 이번 대국으로 밝혀질 것이다. 오가타는 대국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음성에 따라 돌을 쥐었다.

 

 지금부터 자신의 바둑에 방어란 없을 것이다. 후지사키 그 녀석처럼, 오로지 공격에만 치중한다.

 

 ‘네가 내 뼈와 살을 취한다면, 나는 네놈의 목을 취하리라.’

 

 후지사키, 녀석과의 대국에서 저번에 패한 뒤로 후일을 고대하며 줄곧 생각해온 것이었다. 오가타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목이나 씻고 기다려라, 꼬맹아.”

 

 차가운 비소가 후지사키를 향하였다. 후지사키, 아직 저보다 한참은 어린 소년이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바둑판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 소년의 표정은 긴장한 기색 없이 차분하고 고요하였다. 같잖은 도발 따위는 듣지 못했다는 듯이 말이다. 오가타의 표정이 여느 때보다도 싸늘해졌다.

 

 

 

 

 ***

 

 

 

 

 어라, 오늘은 뭔가 다른데. 텅 빈 내 머릿속처럼 새하얀 돌을 매만지며 손안에서 굴렸다. 갑자기 예전에 도우야 녀석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그렇게 빨리 두려고만 하지 말고 천천히 둬봐. 그러면 좀 더 부드럽게 둘 수 있을 거야.’

 

 부드러운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무 아무 생각 없이 빨리 두어왔던 게 내 안타까운 승리의 이유일 거라고 혼자 추측해보았다. 그래. 그렇다면 도우야 녀석의 말대로 천천히 둔다면 어떻게든 된다는 말 아닐까?

 

 각이다. 신나는 패배의 각.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곤 손에 들고 있던 돌을 잠시 내려놓고 지긋지긋한 격자무늬 위에 얼기설기 두어진 까맣고 하얀 돌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이럴 때 도우야 녀석이 어떻게 두었더라.

 

 음. 어디에 두지. 작게 중얼거리며 고민하다가 턱을 괴었던 손을 떼어 다시 돌을 쥐었다.

 

 여기쯤인가? 조심스럽게 돌을 내려놓고 손을 회수했다. 혹시라도 상대편에서 ‘졌습니다’같은 소리가 나올까봐 긴장하며 입가를 감쌌다.

 

 까드득, 유리알이 마찰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돌 깨지는 거 아니야? 흠칫하고 고개를 드니 상대편 안경너머의 눈동자가 엄청엄청 무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저기. 오가타 선생님. 고정하시고, 진심으로 아무렇게나 두려던 게 아니라요… 아니, 맞긴 한데… 아니, 여튼 어떻게든 저를 이겨주세요. 제 16살 평생의 소원입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를 보았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그가 돌을 쥐고 따악 소리가 날 정도로 바둑판에 내려두었다.

 

 휴. 뭔가 됐다. 일단 돌 다섯 개는 못 이었고, 삼삼도 못 만들었다. 그러면 지는 거 맞지? 맞겠지? 힐끔힐끔 눈치를 보다가 다음 돌을 쥐었다. 제발 이게 마지막 수가 되길 바라면서.

 

 유리로 된 바둑알이 나무로 된 바둑판과 마찰하며 손끝을 통해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진짜 생각하고 작심해서 뒀다. 망하겠지?

 

 “…졌습니다.”

 

 망했네.

 

 눈앞에 숙여진 고개에 나는 다음 수를 이어두기 위해 들었던 돌을 툭하니 떨어뜨렸다. 눈앞에 물기가 고였다. 꾹 두 손으로 얼굴을 짓누르며 숨을 들이켰다. 내뱉지 못한 비명을 속으로 삼키면서 말이다.

 

 다들 나한테 왜 그래 진짜.

 

 

 

 

 어떡하지, 진짜. 이렇게 해도 안 되면 나는 어떻게 지냐고. 울고 있는 내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누군가 말했다.

 

 “앞으로 4국이다.”

 

 상대였던 오가타 선생님이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무서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웃음이 싹 사라지게 해주마.”

 

 저기, 웃고 계신 거 맞지요. 왜 화를 내는 것 같지.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그게 너무너무 무서워서 팔을 감싸쥐며 시선을 피했다.

 

 할아버지, 손주 무서워 죽어요….

 

 어흑, 어쩌자고 이런 무서운 데에 저를 던져놓은 거예요. 속으로 물어봤지만 답이 돌아올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진짜로 할아버지한테 코치코치 물어댈 말주변은 개미똥만큼도 없었으므로 속으로 눈물만 삼켰다.

 

 

 

 

 ***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그런 후지사키의 모습은 지금까지 없었기에 오가타는 찰나 ‘어쩌면’하는 기대를 품었다. 약간의 자만심도 있었다. 그래봤자 애지. 애가 두는 바둑에, 그것도 무작정 공격만 해대는 녀석에게 파훼법이 없을 리가. 오가타의 시선이 후지사키를 향했다. 녀석은 쥐었던 돌을 놓고 가만히 반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당황한 것이겠지. 항상 상대가 둔 직후 망설임없이 다음 수를 두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에 오가타가 속으로 웃으며 다음에 놓일 수를 계산하였다.

 

 여기서 녀석이 좌변을 공격해온다면, 그런다면 오가타로서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가 나오는 것이니 한층 더 승리에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이긴다. 오가타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의 시선에 후지사키의 옅은 웃음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턱을 쓸던 후지사키의 손끝이 돌연 멈추었다. 톡, 톡. 느리게 돌을 쥐었다놓으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움직인다. 오가타의 눈동자가 그 손끝을 따라 반상 위에서 멈춰섰다.

 

 하, 허탈한 한숨이 입가에서 흐른다. 곧장 다음 수를 붙이기 위해 들고 있던 돌을 꽉 그러쥐었다. 까득거리며 자그마한 돌이 비명을 질렀으나 오가타는 주먹 쥔 손에서 힘을 풀 수가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숨으로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천천히 올려다본 후지사키의 입가는 손에 의해 가려져 있었으나 오가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웃어야할 것은 저가 아니라 후지사키 키요시, 저 녀석이었다.

 

 깜빡 한 번 감았다뜨인 후지사키의 눈이 오가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제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지그시 응시하는 그 눈길에 오가타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비참하게도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자신이었다. 쥐고 있던 돌을 두고서, 다음에 돌아올 상대의 돌을 기다렸다.

 

 오가타가 둔 수와 그 얼굴을 번갈아 보던 후지사키가 천천히 돌을 들어 수를 놓았다. 오가타가 떨리는 숨을 삼켰다.

 

 분노였다. 자만하여 패하고만 자신에 대한.

 

 “졌습니다.”

 

 간신히 내뱉는 숨이 뜨거웠다.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화가 도무지 가라앉지를 않아서 꿈틀대는 눈으로 고개를 들어 상대편에 앉아있을 녀석을 보았다.

 

 “하.”

 

 녀석이 얼굴을 감싼 채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것은 비웃음과도 같아서 간신히 유지하던 오가타의 손이, 얼굴이, 그 감정이 산산조각이 났다. 오가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 4국이다.”

 

 흘러넘치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그 화를 온전히 드러내며 저보다 한참은 작은 소년에게, 그러나 저보다 월등히 강한 실력을 지닌 채 마치 이날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어수룩한 척’을 해댔던 상대에게.

 

 “다음 대국부터는.”

 

 녀석은 수비할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 얼굴에 웃음이 싹 사라지게 해주마.”

 

 다음에야말로 패배로 물드는 처참한 기분을 건방진 꼬맹이에게 알려주고 말 테다. 오가타가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거칠게 자리를 떠났다.

 

 해볼 테면 해보란 듯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모습에 더 욱하였기 때문이다.

 

 

 

 

 ***

 

 

 

 

 호텔 뷔페에서 만난 도우야와 신도우의 축하를 받았지만 내게는 그것이 저승행 레드카펫 같았다. 내가 시무룩하게 있자 녀석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

 

 “역시, 아직 대국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거지?”

 

 “맞아. 아직 축하하긴 일러. 그 오가타 선생님이 상대니까.”

 

 녀석들의 말을 무시하고 깨작거리며 밥을 먹었다. 뷔페 테이블에는 내가 좋아하는 초코 케이크도 있고 초밥도 있었으나 넘어가질 않았다. 집에 가면 게임할 수 있다는 신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한숨이 나왔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굴레를 끊어낼 수 있는 거지…. 아주 대판 왕창 져야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은데.

 

 “참. 내일 쉰다고 했지, 후지사키.”

 

 도우야의 뜬금없는 물음에 먹던 걸 삼키며 눈으로 물었다. 왜 물어봐, 그런 걸? 설마. 잠깐. 또 바둑 두자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눈으로 녀석을 보니 녀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그렇게 보지 마. 지도기 행사에 가자는 건 아니야. 기분 전환 겸 놀러갈까싶어서.”

 

 놀러간다고? 너네 머리에 바둑만 가득찬 거 아니었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도우가 반색하며 좋다고 떠들었다.

 

 “바다, 바다로 가자! 해변에서 바둑을 둬도 재밌을 거야!”

 

 예? 어딜 가서 뭘 한다고요?

 

 “음, 계곡도 좋지 않을까? 풀내음을 맡으면서 바둑을 둬도 기분이 좋을 거 같아.”

 

 잠깐만.

 

 “그것도 좋겠다. 계곡으로 가자, 그럼.”

 

 저기요? 놀러간다면서요? 왜 거기에 바둑을 끼얹어?

 

 “후지사키, 너도 괜찮지? 그 동안 바빠서 힘들었을 텐데 가서 머리 좀 식히자.”

 

 언제 바둑이 머리 식히는 스포츠가 되었지요. 됐어, 난 그딴 데 안 가. 그냥 집에서 게임할래. 손사레를 치며 질색했더니 두 녀석이 손을 맞잡아왔다.

 

 “가자. 후지사키. 간 김에 온천 어때? 맛있는 것도 먹고!”

 

 맛…있는 거? 솔깃해서 눈을 돌렸다. 내 낌새를 눈치 챈 녀석이 활짝 웃으며 제멋대로 내 일정을 낙점했다.

 

 “자, 집에 가서 짐을 싸와. 우리 집에서 같이 출발하자.”

 

 뒤늦게야 도우야의 말을 듣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뭔가 나 잘못된 거 같은데.

 

 

 

 

 장롱이 털렸다. 도우야 녀석과 신도우 녀석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당장 짐을 싸자며 내 방에 들어와 쓸만한 옷을 멋대로 탈탈 털어 가방에 넣었다.

 

 엄마, 왜 거기서 도와주고 계신 거예요.

 

 손에 달랑 들린 가방의 무게가 제법 묵직했지만 내 마음의 무게만 할까. 슬픈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내 편은 아무도 없어.

 

 

 

 

 게임을 하겠다는 장대한 계획은 날아갔다. 대신….

 

 “이쪽 사활이….”

 

 “그치만, 거길 버리고 여길 얻으면 더 이득 아니야?”

 

 이것도 게임이랍시고 바둑이나 하고 앉았다. 너넨 떠들어라. 난 잠깐 정신 좀 놓고 있을 테니. 넋을 놓고 졸졸거리는 시냇물소릴 들었다. 자연의 소리를 찾아서 뭐 그런 프로그램이라도 찍어야할 거 같은데.

 

 순간 위잉 눈앞에 지나가는 모기를 반사적으로 짝, 하고 잡아냈다. 시끄럽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었다.

 

 갑자기 나를 향하는 두 쌍의 눈동자에 나는 당황해서 두 녀석을 번갈아 보다가 눈을 떨구었다. 뭐라도 말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에 머뭇거리며 입을 떼었다.

 

 “나는 그냥, 잡….”

 

 그냥 잡으려고 했던 건데, 모기를…….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손바닥에 죽은 모기의 사채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도르륵 눈을 굴리며 주변에 휴지가 없나 찾았다. 여전히 나를 향한 두 이목에 머뭇거리며 휴지가 어딨냐고 물으려는데 녀석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지, 후지사키라면.”

 

 “어… 다 잡았겠지?”

 

 뭘? 모기를? 아니, 아직 다 안 잡았는데. 일단 휴지 좀 줄래?

 

 

 

 

 녀석들에게 일박이일을 시달리고서야 드디어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눈물을 머금고 바둑이 아닌 고대하고 고대하던 컴퓨터 게임과 감격스런 재회를 하였다. 온라인 게임 계정은 접속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전부 잊거나 휴면계정이 되어 삭제된 지 오래였으므로 가망은 CD게임 뿐이었다.

 

 게임 오프닝을 지켜보다가 게임 시작버튼을 딱 누르려던 찰나, 방문 열리는 소리에 후다닥 넷바둑 페이지를 켰다.

 

 “키요시, 힘들지? 오랜만에 엄마아빠랑 얘기 좀 할까?”

 

 엄마…. 제발요……. 울컥해서 엄마를 바라보았다.

 

 “많이 힘들었구나. 아무리 프로기사가 되었대도 아직은 애긴데. 그렇지?”

 

 네. 평생 애기 할게요. 이렇게 머리 쓰다듬어주시는 것도 다 좋고 감사한데요, 그런데 저 게임 좀 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 등을 토닥이는 엄마의 손길에 얼굴을 감싸쥐었다. 왜냐면 자연스럽게 거실로 발걸음이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틀렸어. 이번 생에 게임을 할 수는 있을까.

 

 

 

 

 하하하하! 낮에 할 수 없다면 잠을 줄이고 게임을 하면 된다. 어젯밤에 밤새 게임했지! 퀭한 눈으로 뿌듯하게 웃었다. 하루이틀쯤은 밤샐 수 있다고! 내일까지는 대국일정이 없으니까 괜찮다.

 

 어영부영 행사는 잡혔지만.

 

 어쩌다보니 끌려온 행사에서 나는 지도기만큼은 절대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피곤한 내 얼굴을 보고서 사람들은 다행히도 내게 선뜻 지도기를 부탁하지 않았다.

 

 “아이구, 우리 손주랑 닮았네그려!”

 

 그러나 예외도 있는 법이라고, 할아버지와 아주 비슷하게 생기신 분이 아주 비슷한 말투로 나를 잡아 이끌었다.

 

 “아, 저는.”

 

 누구 가르쳐줄 만큼 둘 줄 모르는데요. 내 뒷말을 듣지도 않으시고 어르신은 근처에 있는 바둑판 앞에 나를 앉혔다.

 

 “거, 바둑 좀 알려주게. 내 손주도 바둑을 아주 좋아하는데 특히 자네 팬이라니까.”

 

 선생님이라도 부르지 않아주셔서 부담스럽지 않기는 개뿔 제 팬이라니요. 그거 왕창 부담됩니다만. 식은땀을 흘리며 자연스럽게 쥐어지는 백돌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어르신 앞이다. 어르신 앞….

 

 “그럼, 잘 부탁하네. 살살 부탁해~”

 

 신나신 어르신 앞에서 당겨지지 않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당겨 웃었다. 저야말로 살살 부탁드려요. 이러다 저번처럼 내가 엉망으로 뒀다고 애가 울었던 것처럼 화내시면 어쩌지. 안절부절하며 어르신이 두는 돌을 보고 조심조심 다음 수를 이었다.

 

 잠깐. 문득 스치는 생각에 멈칫하고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뒀잖아. 그랬더니 이겼지. 그렇다면 반대로 이기겠다고 생각하고 두면…?

 

 진다. 진짜 질 거다. 질 수 있다. 이건 된다. 활짝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일해라, 뇌야. 드디어 네가 활약할 시간이다!

 

 

 

 

 ***

 

 

 

 

 도우야 아키라는 두리번거리며 걱정스럽게 후지사키를 찾았다. 바쁜 와중에 자신들이 참가한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참가하게 된 제 친구를 말이다.

 

 후지사키 키요시. 명인. 혼인보. 천원. 왕좌. 많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이런 지도기 행사에서 정말 맥을 못 추리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적당히’라는 게 그 사전에 없는 것처럼 상대를 날카롭게 베어내는 수밖에는 두지 못했기에. 문득 오가타 선생님과 두었던 십단전의 제 1국을 떠올라서 그것도 아닌가 싶긴 했지만. 그도 성장한 것일까? 그렇겠지. 어떻게 거기서 더 상장할 수가 있을까. 공격뿐 아니라 수비까지 가능해졌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 정말 약점이란 없는 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 수세에 몰려도 완벽히 방어하며 되레 역공하던 모습은 정말이지…. 생각을 잇던 아키라가 고개를 젓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분명 누군가에게 잡혀 난감해하고 있을 게 뻔했다. 저번처럼 너무 큰 차이로 꺾어버리는 바람에 애가 울었던 것처럼 사단이 나면 어쩌나싶어서 초조한 마음으로 행사장을 둘러보는데 저 멀리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대국하는 후지사키의 모습이. 저렇게 힘들어보이는 건 처음이라서 아키라는 당황했다. 무슨 일이지? 의아함에 서둘러 다가가는데, 귓가에 후지사키의 음성이 들려왔다.

 

 “졌습니다.”

 

 후지사키가, 졌다. 아키라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 시야에 진지하게 굳어져있던 얼굴은 어디가고 부드럽게 웃고 있는 후지사키의 얼굴이 담겼다. 아키라는 믿기지 않아서 입가를 감싸쥐고 그 상대편에 앉은 사람을 보았다.

 

 아, 탄식한 아키라는 이내 후지사키에게 어릴 적부터 함께해온 할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후지사키가 저렇게 확연한 표정변화를 보인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아키라가 후지사키와 한 할아버지가 그려낸 대국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구나.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노력한 거였구나. 비록 바둑판 한가득 엉망으로 돌이 얹어져있고 고작 반집 차로 진 것이긴 하지만 반집 차라니, 엄청 노력한 것 아닌가? 예전이라면 안 되었겠지만 후지사키는 수비수를 둘 수 있을 만큼 성장했으니까 힘들지만 애쓴 것이다.

 

 아키라가 작게 미소지으며 후지사키의 어깨를 토닥였다.

 

 “여기 있었구나, 후지사키.”

 

 “아, 도우야.”

 

 한결 후련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후지사키에 아키라는 지금까지 그를 도와왔던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에 기쁨을 표했다.

 

 “다행이다. 지도기도 둘 수 있게 된 거니? 조금만 더 연습하면.”

 

 “아니야.”

 

 아키라의 칭찬에 후지사키가 벌떡 일어나며 몸을 물렸다.

 

 “그런 게 아니라.”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그 행태에 아키라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부끄러워하기는.

 

 

 

 

 ***

 

 

 

 

 보이는 곳에 두면 안 돼. 안 보이는 곳에 둬야한다. 굳게 다짐하고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돌을 두었고 어흠, 헛기침을 하며 고심하는 어르신의 눈치를 보았다. 옳지. 잘하고 계십니다. 다 따드세요. 냠냠 드시는 겁니다.

 

 아니, 먹히지 마시고. 안절부절하며 엉성하게 둔 내 구역에다가 제발로 들어가시는 어르신의 행동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모른대도 이건 알 수 있다. 사방이 막혔는데 거기다 두시면 어떡해요.

 

 울상을 지으며 어떻게든 지기 위해 노력하다가 아차했다. 맞아. 이기려고 해야지. 이긴다. 이긴다. 굳게 마음을 먹고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에 두고, 또 두었다.

 

 이러다 돌이 모자라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바둑판이 채워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티나게 지면 안 돼. 이 정도면 초보자도 알 거야.’

 

 저번에 도우야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에 함부로 고개를 숙일 수 없어서였다. 다행히 거의 대부분의 공간이 채워지고 나서야 어르신께서 먼저 ‘이제 계가를 해도 되지 않겠냐’고 돌을 거두셨기에 대국을 멈출 수 있었다.

 

 “오, 내 집이 조금 더 많구만!”

 

 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내가 졌음을 고개숙여 알리고 해피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신난다. 졌다, 졌어!

 

 

 

 

 이쯤되면 신의 농간이 아닐까. 아니면 다들 짜고 나를 괴롭히는 게 틀림없어.

 

 “졌습니다.”

 

 또 숙여진 오가타 선생님의 고개에 나는 허탈하게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긴다고 생각했잖아. 저번에는 지는 거 됐잖아?

 

 왜 이번엔 또 이겨버렸는데.

 

 울상을 지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고 서글픈 마음에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감정이 치솟아서 사과의 목소리가 잘 안 나온데다가, 이게 상당히 무례할 수 있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왈칵 울어버릴 순 없잖아. 서둘러 화장실로 향하며 괴로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 돌아버리겠네, 진짜. 어흑. 바둑 같은 거 안 두던 12살 키요시로 돌아갈래.

 

 

 

 

 기성? 십단? 따버렸다. 망했다. 단단히 망했다. 이 말은 17살이 되는 이제부터는 아주 줄기차게 방어전인지 뭔지를 치러야한다는 말이었다. 떠흡. 타이틀이 없었다면 할아버지한테 이제 타이틀전 참가 안 하겠습니다, 하면 더 이상의 대국은 없는 거였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다.

 

 심지어 축하 기념으로 도우야 아키라 이 녀석한테 끌려와서 그 아버지인 도우야 고요 명인과 또 대국하게 생겼다.

 

 “오랜만이구나. 후지사키 너와는 늘 다시 한 번 제대로 두고 싶었단다.”

 

 바둑, 바둑, 바둑… 이제 난 끝이야. 이제 눈만 감아도 까만 세상에 바둑판이 그려져. 완전 절여져버렸다고? 내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 도우야네 아버님께는 죄송했지만 그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니 바둑판을 바라보다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럼, 잘 부탁하마.”

 

 도우야 명인의 말에 푹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포기다.

 

 이번 생은 버리자.

 

 

 

 

 ***

 

 

 

 

 지난 대국을 복기하며 오가타 세이지는 며칠 째 가라앉지 않는 분노로 이를 갈아야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직도 그 무례함이 떠오른다. 타이틀전에서, 그것도 3 대 0으로 완벽히 이긴 그 전적으로 후지사키 키요시는 마지막 대국을 복기조차 하지 않고 나갔다.

 

 이보다 더 무례할 수가 있을까. 완전히 상대를, 자신을 모욕하고 무시한 것이 아닌가. 다시 한 번 치솟는 화에 짜증스럽게 안경을 벗어 탁상 위에 얹어놓았다. 마를세수를 하며 간신히 감정을 가라앉히는데 돌연 핸드폰이 울렸다.

 

 “예. 오가타 세이지입….”

 

 [아, 오가타 선생님. 저 아키라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아키라? 오가타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올렸다. 녀석이 웬일로 전화를? 의아함은 잠시였다. 이어지는 말에 오가타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후지사키가 지금 아버지와 대국하고 있는데, 오가타 선생님도 괜찮으시다면….]

 

 “갈 테니까, 기다려. 그 녀석 꼭 붙잡고 있어야한다.”

 

 아키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가타는 입을 열어 제 할말만을 하고 끊었다. 뚝 끊긴 것에 아키라가 당황할 수 있겠지만 오가타로서는 그것을 배려야할 여유가 없었다. 벗어두었던 겉옷을 챙겨들고 안경을 고쳐썼다. 탁상에 대충 던져두었던 차키를 낚아채어 서둘러 밖으로 향한다.

 

 후지사키 키요시, 그 녀석과 명인의 대국. 그 또한 오가타의 마음을 끓어오르게 하였으나 그보다도….

 

 그 녀석과 다시 한 번 두어야겠다는 열의가, 기필코 녀석을 꺾어내겠다는 호승심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안경너머로 오가타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도우야 아키라는 힐끔 자신의 아버지를 한 번, 오가타 선생님을 한 번, 후지사키 키요시를 한 번 보고 바둑판으로 눈길을 고정시켰다.

 

 후지사키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았으나 어딘가 피곤한 기색이 비쳤다. 아키라 자신의 눈에만 그것이 보이는 걸까? 그가 걱정되어 이쯤에서 그만 두고 그를 보내주자고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분위기가 그것을 어렵게 하였다.

 

 “저….”

 

 벌써 여섯 시간 째다. 더는 안 되겠어서 아키라가 입을 떼었다. 그 음성은 오가타에 의해 묻혔다.

 

 “이 수를 둔 이유는? 명인께서 이쪽에서 이렇게 둘 걸 미리 예측하고 둔 건가?”

 

 “그건 나도 궁금하구나.”

 

 줄곧 오가타 선생님과 도우야 고요, 그러니까 자신의 아버지 둘이서만 이야기하다 돌연 후지사키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여태까지 한 번도 제대로 입을 열지 않던 후지사키가 그제야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키라가 생각했다. 지금껏 복기하며 후지사키가 제대로 입을 열었던때가 있었던가? 고개를 갸울이며 기억을 더듬어봐도 몇 없었다. 그저 신도우 히카루와 열띤 토론을 할 때 중간중간 수를 두어주고 자리는 뜬 것밖에는. 갑자기 아키라도 궁금해졌다. 대국을 하며 후지사키는 무슨 생각을 할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수를 두며, 어떻게 생각하기에 상대의 수를 그렇게 잘 간파하는 것일까?

 

 수십 수 앞을, 어쩌면 백 수도 넘는 앞을 바라보며 최선의 한 수를 둔다. 그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아리송한 수가 모두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던 것일까?

 

 아키라가 마른침을 삼키며, 드디어 그 해답이 나올 후지사키의 입술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그냥 두었습니다.”

 

 뭐? 아키라의 두 눈이 깜빡였다. 순간 그 짧은 한 마디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서 아키라는 그 음성을 한참이나 되새겨보아야했다. 그것은 오가타 선생님이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보였거든요. 그 자리가.”

 

 아키라가 입을 다물었다. 후지사키의 덤덤한 목소리가 방안을 잠식하였다. 오가타 선생님이 헛웃음을 들이켜고, 아버지가 작게 침음한다. 아키라는 할 말을 잃고 난감한 표정으로 입가를 쥐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당최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어서였다.

 

 “그냥 보였다?”

 

 조용한 가운데 오가타 선생님이 허탈하게 되물었다. 후지사키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그냥 보이는 곳에….”

 

 잠시 끊어진 후지사키의 음성이 단어를 고르는 듯하다가 한숨과 함께 마저 말을 내뱉었다.

 

 “네. 그냥, 보이는 곳에 두었습니다.”

 

 천재란 어쩌면 후지사키 키요시를 지칭할 가장 정확한 단어가 아닐까. 아키라는 가만히 내리감긴 후지사키의 눈꺼풀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멈추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

 

 

 

 

 조용하다. 이상한데. 이쯤되면 엄청 화난 목소리로 장난치냐며 호통이 들려와야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질끈 감았던 눈을 조심히 떠보았다. 오가타 선생님과 도우야네 아버지, 그리고 도우야 아키라 녀석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둑판을 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거나 턱을 괴고 있는 것이 무언가를 아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새라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를 이렇게저렇게어떻게 구워삶아버려야할지 고민하는 건가. 히이익. 이제 진짜 바둑 그만 둘 테니까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두 손을 꼭 쥐고 크게 숨을 삼키며 용서를 구하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것을 막았다.

 

 “후지사키. 너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도우야 녀석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머뭇머뭇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 말하지 말아봐. 왠지 불안해. 네가 말하면 폭탄일 거 같아. 다급히 입을 여는데 그게 또 다른 사람에 의해 막혔다.

 

 “그래서였군그래.”

 

 오가타 선생님이었다. 어… 뭐가 그래서예요? 뭐지? 혹시 나 빼고 텔레파시로 뭔가 말을 맞추셨나요? 왜지? 왜 점점 더 불안해지지요? 점점 창백해지는 안색으로 눈을 굴리다가 도우야네 아버지, 도우야 명인과 딱 눈을 마주쳤다. 그는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힉. 뭔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봐주세요….

 

 “전보다 더 성장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의 재능인줄은 차마 몰랐구나.”

 

 네? 재능… 뭐라고요? 멍청히 올려다보는 내게 그는 웃으며 허허롭게 말했다.

 

 “그 재능이 후지사키 네게 내려져서 참 다행이야. 흠. 오가타에게 그런 재능이 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하하.”

 

 “선생님.”

 

 긴장한 나를 풀어주려는 건지 농담하듯 말하는 도우야 명인의 모습에 감동하기는 개뿔 나는 더 불안해졌다. 명인의 말에 그를 말리듯 오가타 선생님이 그를 불렀으나 명인은 손을 저었다. 나는 그 뒤에 튀어나올 말이 뭔지 불안해서 안절부절하며 입에 시동을 걸었으나 느려터진 입은 이번에도 선수를 놓치고 말았다.

 

 “아. 맞아요, 오가타 선생님이라면 엄청 으스대셨을지도 몰라요. 하하.”

 

 “아키라….”

 

 오가타 선생님이 도우야 녀석의 말에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저기, 한숨을 쉬고 싶은 건 저예요. 울음을 삼키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웃지 마라, 후지사키.”

 

 아니, 웃는 게 아니라 우는 건데요. 짜증섞인 오가타 선생님의 목소리에 더욱 절망하며 푹 고개를 숙였다. 일단 손목은 아직 멀쩡한데 대신에 일이 더 커지고 있는 것만 같다. 나 언제 탈출하지…?

 

 아, 맞다. 포기했지? 나도 참, 하하.

 

 “후지사키.”

 

 이를 갈며 들려오는 오가타 선생님의 음성에 흠칫하며 슬쩍 손을 내리고 입술을 지르물었다.

 

 “안 웃었어요.”

 

 진짜로. 제 바둑 걸고 안 웃었습니다. 사실 조금 웃었다. 으스대는 안경쓴 어른이라니 이건 좀 웃겼다.

 

 

 

 

 ***

 

 

 

 

 후지사키 키요시. 옛적에나야 펼쳐보았을 교과서 표지에 적힌 제 아들의 이름을 쓸어보며 어머니는 장한 마음이 드는 한편 씁쓸하였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그렇지만 이제 또래 아이들은 고등학교에 재학할 나이인데. 벌써 사회에 나가 부딪히며 저보다는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른들과 바둑을 두고 경쟁한다. 그 사실이 못내 가슴아팠다. 어릴 적에는 신나게 놀았으면 하는 마음에 학원조차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바라지도 않던 우수한 성적으로 모든 시험을 치르고는 했었고, 어디서 무언가를 한다치면 늘 1등상을 받아왔다.

 

 그게 기특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어쩌면 이 아이가 제 아이다 자랑하고픈 마음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게 아이를 더 빨리 사회에 발을 들이게끔 채찍질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눈물을 보이던 아들의 모습에 어머니는 마음이 아파왔다. 아이의 슬픔이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지난 날을 되새기며 저를 탓하였다.

 

 조금 더 또래 아이들과 놀 수 있게 해주었어야하는데. 조금 더 신경을 써주고, 어른스럽다며 괜히 기대하고 부담을 주지 말았어야하는데.

 

 그러고 보면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적, 그러니까 매일같이 학교를 다닐 적에 키요시는 늘 혼자였다. 가끔 그걸 걱정하기도 했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크게 걱정하기도 전에 아이는 쑥쑥 자라 갓 중학생이 된 어린 나이로 프로기사로써 사회에 발을 들였다.

 

 그 생각을 하니 또 답답하고 슬픈 마음이 몰아쳐서 아이의 어머니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마냥 씁쓸한 마음만 드는 것은 아니다. 또래의 친구들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안도하기도 했으니까.

 

 도우야 아키라와 신도우 히카루. 처음으로 그 두 친구들과 놀러가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이가 어딘가 놀러가겠다고, 특히 ‘친구들과’ 어떠한 것을 함께하겠다고 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자, 이것도 챙기고. 키요시, 멀뚱히 서서 뭐하니? 같이 챙겨야지.”

 

 제 아들의 손에 가방을 들려주며 어머니는 그날 내내 웃었다. 아이는 귀찮은지 뚱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못내 주섬주섬 가방을 들고 하나둘씩 짐을 챙겼다. 내심 친구들과 함께 놀러가는 것이, 기대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잘 다녀오렴.”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고개숙여 인사하는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 어머니는 환한 미소로 배웅해주었다. 저 두 아이들도 괜찮아 보였고, 우리 키요시의 표정도 마냥 나빠보이진 않았으니 괜찮겠지? 잠깐 들었던 걱정을 지우고,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막만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저렇게 컸을까 생각하면서 아이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가만히 지켜보았다.

 

 

 

 

 ***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얼빠진 얼굴로 행사 담당자가 쥐여주는 목록들을 하나씩 훑어내렸다.

 

 끝이 없었다.

 

 “아, 그리고 다음 달 행사는….”

 

 네? 설마 이게 전부 이번 달 안에 끝나는 행사라는, 그런 믿기지 않는 소리를 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래도 방어전이 있을 때는 행사가 많지 않습니다. 컨디션 조절의 의미에서… 아차, 타이틀이 많으셔서 그렇지도 않겠군요.”

 

 나 안 할래. 역시 그만 둬야겠어. 왠지 약올리는 것 같은 표정으로 웃는 담당자를 질린 얼굴로 흘기며 슬쩍 일정표를 밀어냈다. 모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특별히 사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일단 다 참석하겠다고 전달하겠습니다.”

 

 있어요, 사유. 하기 싫은 게 사유입니다. 입가를 꽉 쥐어짜며 속으로 울었다. 왜 말을 못하니, 왜. 왜. 이 주둥이야.

 

 

 

 

 혼인보 타이틀을 딴지 얼렁뚱땅 1년이 되어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하하. 인생. 맨날 대국이야. 오늘도 또 대국이야. 그래, 이번 생은 포기하기로 했잖아. 아니야. 역시 그만 두고 싶어. 마주한 상대를 보며 눈물을 머금었다.

 

 도우야 녀석과 신도우, 그리고 오가타 선생님이 리그전까지 올라왔다는 말은 들었다. 듣기 싫었는데 계속 얘기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또 상대가 오가타 선생님이 될 거라고는… 음, 예상했어야했나? 떨리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예의상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랬어야 도망갔을 테니까.

 

 “재주껏 이겨보란 거냐.”

 

 그런 소리는 하지도 않았고 재주껏 버텨야하는 건 저인 거 같은데요, 선생님…. 어마무시하게 띠꺼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이 무서워서 바닥으로 시선을 깔았다.

 

 “이제와서 고개 숙여서 인사해봤자 비꼬는 거 다 티 난다.”

 

 아니아니, 비꼬다니요? 지금까지 제 순수한 진심을 그렇게 보고 계셨단 말인가요?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보니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나를 지나쳐 대국실로 들어간다.

 

 “저….”

 

 저기, 제게 해명의 시간이 필요한 거 같은데요. 아주 크나큰 오해가 있습니다, 선생님. 제 말을 들어보세요.

 

 

 

 

 어영부영 대국이 끝나고 나는 안절부절하며 오가타 선생님께 해명할 기회를 노렸다.

 

 “오….”

 

 오가타 선생님, 이라고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그는 나를 돌아보며 사납게 물었다.

 

 “왜 쫓아와?”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무서워서 찔끔하며 그대로 굳었다.

 

 “그, 러니까.”

 

 오해입니다, 선생님. 제게 변명할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 잘…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어쨌든 기회를 주세요…….

 

 “평소엔 제대로 안 하던 복기를 오늘은 하고 싶었나보지?”

 

 네? 아니, 왜 또 의식의 흐름이 바둑쪽으로 흘러가죠.

 

 “그래, 좋아. 아키라와 신도우 녀석이 대기실에 있을 테니, 불러다가 다시 한 번 복기해보는 것도 좋겠지.”

 

 그게 아닌데요. 제발 말 좀 하게 해주세요. 울며 입을 떼었으나 그는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아. 제발요.

 

 

 

 

 징글징글한 것. 나무판 위의 격자무늬를 불태울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래도 이번엔 아슬아슬했어. 다음엔 정말로 이길 거다.”

 

 오가타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내가 바둑판 노려보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겠지. 도우야와 신도우 녀석만 없으면 당장에 그게 아니라도 울고불며 사정을 설명했을 텐데. 입술을 지르물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할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헉? 타개라니? 내가 그런 단어로 생각을 하다니? 역시 절여지고 만 거야. 바둑… 이 자식… 용서 못해….

 

 “복기하자면서, 왜 가만히 있지?”

 

 “음. 후지사키가 먼저 복기하자고 할 줄은 몰랐어요. 처음이니까….”

 

 “그러게.”

 

 오가타 선생님, 도우야, 신도우의 시선이 빤히 나를 향했다. 으, 에라 모르겠다. 일단 복긴지뭔지 먼저 대충 하고 상황을 설명하는 거야. 그래. 녀석들 보내고 오가타 선생님 혼자 계실 때 무릎이라도 꿇으면서 사과드려야지.

 

 좋아.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고 돌을 쥐었다. 예전에 색칠공부하듯 원생인지 뭔지 기보 세 개 적으라고 해서 마구잡이로 색칠했을 때처럼 대충 눈앞에 그려지는대로 돌을 얹었다.

 

 “아, 거기서 그렇게 놓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거지?”

 

 아니, 대충 여긴 거 같은 데다 놓는 건데. 도우야 녀석의 말에 눈을 껌뻑이며 손을 멈추었다. 뭔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까 아까 거랑 좀 다른가? 이럴 수가. 색칠공부하던 실력이 죽어버린 건가. 그대로 따라그리기 스킬은 만렙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충격에 빠지든말든 세 명은 저들끼리 무어라고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그렇군.”

 

 “여기는? 여기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왜 수긍하세요. 뭐하는 건데. 고개를 끄덕이는 오가타 선생님과 한 수 거들어 이상한 데다 돌을 놓는 신도우 녀석 탓에 기분이 이상했지만, 이때가 기회였기에 은근슬쩍 빠져서 손을 놓…으려다가 동시에 나를 향하는 세 쌍의 시선에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돌을 쥐었다.

 

 “차라리 그냥.”

 

 신도우 녀석이 이상한 돌을 놔서 아까 그렸던 그림과 좀 이상한 모양새가 된 것을 치우고 다른 곳에다가 놓았다. 엇비슷한가? 모양새나 순서가 좀 더 예쁜 것 같기도 하고. 하하! 역시 내 게임 실력은 죽지 않았다. 지금은 못하고 있지만…. 슬픈 생각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놓는 게.”

 

 삼사에 하나만 더 붙이면 오목을 넘어선 여섯점이 된다. 하지만 규칙별로 그것도 오목 완성된 걸로 인정해주기도 하고 또 전체적인 모양은 나쁘지 않았다.

 

 “괜찮네요.”

 

 고개를 주억이며 뿌듯하게 웃었다.

 

 “…여기서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 큰 집을 공략하겠다는 거지.”

 

 뭐라고 저들끼리 쑥덕대는데 잘 안 들려서 머리를 긁으며 마저 돌을 놓았다. 일단 빨리 끝내자. 그리고 빨리 사과드리고 오해 풀어야지. 좋아. 완벽한 계획이야.

 

 

 

 

 완벽한 계획은 개뿔이었다. 오히려 더 들들 볶여서 하늘이 새카매질 때까지 붙잡혀있다가 귀가할 수 있었다. 옷도 못 갈아입고 폭 침대에 대자로 파묻혀 눈물을 흘렸다. 물론 진짜 울었다는 게 아니라 쬐끔 눈가가 촉촉해진 것뿐이다.

 

 진짜다.

 

 고개를 돌려 방 한켠을 보며 폭 한숨을 내쉬었다. 쌓여있는 게임CD가 한가득이다. 저걸 보니까 이번엔 진짜로 눈물이 좀 나려고 하네. 훌쩍.

 

 

 

 

 오가타 선생님과의 혼인보전 네 번째 대국이다. 여기서 진짜로 이겨버리면 난 망한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타이밍 각 잘 재서 먼저 졌다고 하는거야. 그치만 상대는 오가타 선생님이잖아? 초고수잖아? 일부러 진 거 티 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안 되겠다. 그렇게 된 이상 기도해야겠다. 믿지도 않는 신한테 두 손을 꼭 맞대고 고개숙여 기도했다.

 

 제발 오가타 선생님이 이기게 해주세요.

 

 “뭐하냐?”

 

 뒤에서 돌연 들려온 음성에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아니, 나만 보면 늘 안 좋아보였지. 눈가를 쓸며 머뭇머뭇 입을 떼었다.

 

 “아니요. 그냥, 기도했어요.”

 

 “기도?”

 

 별 걸 다 한다는 듯이 그가 눈을 찡그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야말로 진심을 전했다.

 

 “오가타 선생님이 이기게 해달라고요.”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마주보며 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기를 바랐다. 근데 그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까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창백한 얼굴로 물러섰다. 선생님, 잠깐만요. 또 오해하시는 건…….

 

 “비꼬는 재주가 아주 탁월하구나.”

 

 맞구나. 파르르 떨리는 그 입가에 내가 황급히 그 팔을 붙들었다. 저기, 잠시만요, 선생님. 한 말씀만 올려도 될까요.

 

 “정말 진심입니다.”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그보다 조금 더 작았으니까 이정도면 조금 안타까워보이겠지.

 

 “그래. 진심으로 이겨주마.”

 

 않았군요. 네. 불꽃처럼 타오르는 안경너머의 눈동자에 손에 힘이 탁 풀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속상한 마음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제발. 바둑 그만 두게 해달라고 안 할 테니까 이 오해라도 어떻게 좀 풀고 싶다고.

 

 

 

 

 포기하자. 그래, 포기만이 답이다. 허허롭게 웃으며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알겠다. 이거는 누가봐도 각이라니까.

 

 “졌, 습니다.”

 

 망조각. 낮게 읊조리는 오가타 선생님의 음성을 들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 괴로워. 그나마 다음 명인전까지는 시간이 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대국을 회피하고 이 오해를 풀… 수 있을까?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상대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거기서 더 상장할 수 있는지.”

 

 분명 지금까지와 같이 왕창 화난 표정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음 명인전은 아마도 아키라 녀석이 될 확률이 높아. 승률이 나보다 한끝발 차이로 좋으니. 나한텐 아직 하수지만 말이야.”

 

 뭐라고 중얼거리시는데 잘 안 들려서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바둑판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오가타 선생님은 시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 이번엔 들렸다. 걱정해주시는 건가. 그런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방심할 실력이 있어야 방심을 하지요. 하하. 어색하게 웃으려는데 도리어 그가 픽하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성, 혼인보, 천원, 왕좌, 십단 그리고… 이번 곧 있을 명인까지. 완벽히 방어해내길 바란다. 명색이, 나를 상대로 완승을 했으니 말이야.”

 

 나직한 그 음성은 오해가 풀린 것처럼 덤덤했으나 내용은 엄청나게 충격적이었다. 아니,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새록새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말씀은 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짜 그렇게 될까봐 겁나거든요? 진짜 그렇게 되면 선생님 탓할 거예요.

 

 진짜로. 울먹이며 원망스런 눈으로 그를 보았다. 가소롭다는 듯이 그가 웃었다.

 

 “이렇게 말하니 이제서야 긴장이 좀 되나보지?”

 

 “긴장이 아니라.”

 

 긴장이 아니라, 무서운 거라고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내 마음 좀 번역해주면 좋겠다. 후지사키 키요시의 못난 주둥아리 대신 해명해주실 분 구합니다. 억만금 드릴게요. 물론 바둑알 초콜릿을 믿으시고 가불로요.

 

 내 속마음을 비웃듯이 오가타 선생님은 코웃음을 치고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선생님… 오해는 풀고 가세요…….

 

 

 

 

 좋은 생각이 났다. 말을 못한다면 편지를 쓰면 되지 않겠는가? 밝아진 얼굴로 상대가 거북하지 않도록 깔끔한 편지지를 구해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적어나갔다.

 

 자, 일단 말머리에 예의를 차려야지. 친애하는? 존경하는? 어떤 단어가 좋을까. 도우야나 신도우 녀석이 오해하는 건 이제 익숙해졌다쳐도 오가타 선생님의 오해는 진짜 무시무시해서 노려보는 걸 견딜 수가 없었기에 꼭 풀고 싶었다.

 

 좋아, 존경하는! 존경하는 오가타 선생님께! 이렇게 쓰자!

 

 

 

 

 눈앞에 들이밀어진 편지지에 나는 그대로 굳었다. 내 편지의 내용이 낱낱이 밝혀져서 부끄러웠기 때문은 아니고, 그 편지를 들고 있는 상대의 표정이 예상치 못한 것이라 당황해서였다.

 

 “이게 뭐냐.”

 

 금방이라도 욕할 것처럼 짓씹듯이 묻는 오가타 선생님께 더듬거리며 답했다.

 

 “…편지, 인데요.”

 

 “그건 나도 아는데. 글씨가. 하나도. 못 읽겠잖아.”

 

 이럴 수가. 내가 얼마나 정성들여서 썼는데. 충격에 빠져서 멍하니 있으려니 오가타 선생님이 툭하니 내 가슴팍에 종이를 집어던졌다.

 

 “이제 하다하다 편지로도 비꼬냐? 나, 참. 이렇게 악필은 생전에 처음 본다.”

 

 옆에 있던 도우야가 말렸다.

 

 “고의는 아닐 거예요.”

 

 그 말이 더 상처였다. 크흡.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억울한 마음을 뒤로한 채 도우야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후지사키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할 때 구해준 적도 있었는걸요. 나쁜 애는 아니에요, 오가타 선생님.”

 

 아니, 잠깐. 그것도 오해가 있는데. 그때는 내가 도우려던 게 아니라 우연히….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또 씹혔다. 오가타 선생님이 두 눈을 크게 치켜뜨고 도우야 녀석에서 되묻는다. 음. 네. 이제 익숙하다.

 

 “뭐? 아키라 네가 괴롭힘을 당했다고? 언제? 누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후지사키에게 나쁜 뜻은 없었을 거예요. 그냥… 서툴 뿐이라고요. 좀 오해를 많이 사기는 하지만 착한 애예요.”

 

 뭐라고? 그 오해가 오해인 거 같은데. 착하다니 대체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오해야. 예의 없다는 오해는 많이 들어봤지만 이건 또 처음이라서 당황하며 손을 들었다.

 

 “잠깐. 나는.”

 

 난 안 착해. 1 대 17로 싸운다면 17인 쪽이라고! 또 무슨 오해가 생길까 두려워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동공지진하며 뒷걸음질 치는데 옆에 있던 신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라도 이 오해를 풀어줘라. 믿는다. 간절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를 생각하듯 신도우는 입가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한다.

 

 “후지사키는 은근히 배려심이 있었지? 저번에 도우야네 부모님이 해외 가셨을 때도 걱정해줬잖아. 행사가 있으면 빠짐없이 참여도 해줬고.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글렀어.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완벽한 오해를 할 수가 있는 거지. 낙심한 표정으로 입을 지르물고 푹 고개를 숙였다. 사악한 도우야와 신도우 두 녀석들이 웃었다.

 

 “부끄러워하기는.”

 

 아니야. 아니라고. 이게 어딜 봐서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야. 울상을 지으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게 비꼬는 게 아니라고?”

 

 팔랑팔랑 내가 쓴 편지를 흔들며 오가타 선생님이 나를 게슴츠레 바라보았다. 진심을 담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 실력이 뻥이라고 해라. 참나.”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가 코웃음을 쳤다. 헉! 대박! 바로 맞추셨어요, 선생님. 감격스러워서 크게 숨을 삼키며 환호하려는데 옆에서 신도우와 대국하던 도우야가 웃었다.

 

 “그건 너무 앞서갔어요, 오가타 선생님.”

 

 앞서가지 않았어. 정답이야. 정답이라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잠깐. 근데 이걸 말해버리면 내 손모가지는 그대로 날아가는 거 아닌가? 어, 어떻게 해야하지? 오해가 풀릴 절호의 기회인데…! 밝힌다, 밝히지 않는다. 두 가로에서 고민하는 사이 빤하게 나를 보던 오가타 선생님이 손에 든 편지를 툭 내려놓았다.

 

 “…그렇지.”

 

 왜. 왜 포기하세요. 포기하지 마요. 정답이란 말이야. 망연자실하게 편지를 바라보았다. 네 역할은… 여기까지인가보다.

 

 “운만으로 5관왕에 올라서기란 벼락 맞을 확률보다도 적을 테니 말이야. 그 실력이 거짓이라니 말이 안 되겠지.”

 

 말이 안 되긴요. 산증인이 여기있는데요…. 어깨를 늘어뜨리고 한숨을 삼켰다. 그래, 싸가지 없다고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던 게 사라진 것만으로 만족하자.

 

 

 

 

 이제는 익숙하게 도우야네 기원에 들어섰다. 아니, 안 오면 집까지 쳐들어온다니까? 맨날 질질 끌려가느니 그냥 빨리 와서 빨리 대국하고 빨리 집에 가는 게 낫지. 고개를 주억이며 기원 한 구석에 있을 도우야와 신도우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티격대고 있던 둘은 내가 들어서자마자 하던 것을 멈추고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서와, 후지사키. 혹시 들었니? 이번엔 내가 도전자로 지정됐어.”

 

 명인 리그전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도우야가 아주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으응. 사람들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네가 연승을 했다며 아주 칭찬을 해대서 모를 수가 없었단다. 나를 꺾을 인재라고 그렇게 칭찬을 하더라. 꺾기는 개뿔 저는 꺾일 실력이 없어요. 그렇게 변명하고 싶었지만 씨알도 안 먹히겠지. 당시에는 더 오해만 살까봐 그냥 입 다물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나를 꼭 이겨줘.”

 

 도우야 아키라, 너에게 많이 기대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제발 날 여기서 벗어나게 해줘. 혼신의 마음을 담아 녀석의 손을 꼭 쥐었다. 악수라고 생각했는지 녀석은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열심히 해서 꼭 너와 좋은 대국을 둘 수 있도록 노력할게.”

 

 악수하잔 건 아니었는데. 좋은 대국이고 자시고 일단 나를 마구마구 이겨줄래? 나를 잘근잘근 밟아줘. 내 실력이 거짓부렁이라는 것을 티 안 나게 보여주라. 손목은 잘리면 안 되니까, 잘 부탁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녀석을 보니 녀석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불안하게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이렇게 너와 공식석상에서 두게 되어 기뻐. 대시합 때 말고는 네가 타이틀을 먼저 따버려서, 공식에서 둘 일이 없었잖아. 나는 오가타 선생님께 계속 지는 바람에….”

 

 아쉽다는 듯이 녀석은 말했다. 나는 하나도 안 기쁘고 하나도 안 아쉬웠지만 녀석이 나를 부디 이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대할게.”

 

 그래, 완전 기대한다. 나를 묵사발 내줘.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우야 녀석이 보란듯이 마주쥐었다. 어, 이거 좀 아픈데.

 

 “이제 놓자.”

 

 잡고 있던 손을 탈탈 털었다. 도우야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놓았다.

 

 “아, 응. 네가 나를 인정해줬다는 게 기뻐서 그만.”

 

 이제와서 인정할 게 뭐있담. 떨떠름하게 대꾸해주었다.

 

 “넌 원래 잘 뒀잖아.”

 

 게다가 내 인정 따위가 필요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이 상황이, 이 자리가 불편한 거다. 이 자리에 있고 싶지도 않고 잘 두는 것도 아니며 아무 생각 없이 두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진지하니까 엄청 부담된다고. 뚱하니 녀석을 뒤로 하고 비어있는 신도우 옆 자리에 앉았다.

 

 

 

 

 ***

 

 

 

 

 오가타는 새하얀 봉투에 든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한 번 내용을 읽기 위해 집중하였다. 자연스럽게 미간이 찡그려진다. 저만 제대로 안 보이는 건 아닐 테고. 설마 엿이라도 먹으라고 준 건가. 오가타의 눈썹이 삐죽 솟았다.

 

 “후지사키 키요시…….”

 

 이를 갈며 편지를 건네준 녀석의 이름을 읊조렸다. 대체 이게 글씨야 욕이야. 험하게 구기려던 손을 간신히 펴서 재차 종이를 훑어보았다. 그리곤 짜증스럽게 종이를 집어던졌다. 분명 편지지로 보이는 종이 위에는 빼곡하게 무언가가 적혀있었다.

 

 그래, 무언가가. 적혔는지 그려진 건지. 쓰고 있던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지며 오가타가 욕을 내뱉었다.

 

 “이 자식, 대체 이것만 쥐여주고 튄 이유가 뭐야?”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텐데 하나도 알아볼 수 없는 것에 오가타가 속이 터져서 어처구니가 없는 숨을 내뱉었다. 다시 한 번 그 시선이 향한 종이 위에는 이렇게 ‘그려져’ 있었다.

 

 《존□하는 오가타 □□□께》

 

 ‘은는이가’와 자신의 이름 말고는 하나도 알아볼 수 없는 엄청난 악필이다. 글씨로 추정되는 그것은 A4용지 크기의 편지지 세 장을 빼곡이 채우고 있었으므로, 읽히지도 않는 그것을 아주 안 읽을 수도 없는 입장으로서 오가타는 머리가 아파왔다. 엿도 참 성의있게 먹이네. 이마를 짚으며 그는 다시 종이를 들었다가 한 줄도 채 읽지 못하고 집어던졌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내일 날이 밝자마자 당장에 녀석이 자주 찾는다는 도우야 명인의 기원엘 찾아가 따져 물을 것이다. 대체 이 쓰레기 같은 종잇조가리를 준 저의가 무엇이냐고. 내용을 모르니 의도도 알 수 없고,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차마 함부로 버릴 수도 없다. 오가타의 입새로 연신 짜증이 터져나왔다.

 

 

 

 

 ***

 

 

 

 

 명인전의 시작은 여름에서 가을무렵이었다. 그 말은 벌써 한 해의 반이 지나고도 한참 지났다는 말을 의미했다.

 

 흑흑, 내 인생.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이제는 완전히 바둑에 찌들지 않은 나날이 없다는 사실에 우울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뭐라고 생각했는지 옆에 있던 도우야 아키라가 어깨를 토닥여왔다.

 

 “너무 긴장하지 마. 그래도 네가 이길 확률이 높지만….”

 

 우씨, 건들지 마. 네가 시발점이라고. 알아? 엉엉.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할아버지와 그 친구분들이 ‘도우야 아키라 같은 인재’라고 나를 칭하며 들떠했던 것을 말이다. 씩씩거리는 내 속도 모르고 내게 웃음을 비추는 도우야 녀석에게서 홱하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눈물이 나서는 아니었다. 훌쩍. 그냥 얼마 전에 오가타 선생님께 들었던 말이 충격이라 서러워서 그런 거다.

 

 그렇게 화를 낼 정도로 내가 악필이라니, 이건 거짓말이야.

 

 

 

 

 제 1국은 얼렁뚱땅 내가 이겼다. 슬픈 결과에 내가 푹 한숨을 내쉬자 녀석이 옅게 웃었다.

 

 “후지사키는 여전히 강하구나. 그래도, 나도 많이 강해진 거지?”

 

 졌으면서 뿌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뿌듯한 표정 짓고 싶다. 나도 지고 싶다. 부러운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니 녀석이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바둑판 위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서 잠깐 고민했던 이유는, 그곳에 두면 내가 반격할 걸 알았기 때문이니?”

 

 으음. 지금 네가 다 설명해줘서 이해했단다. 그렇구나 넌 그럴 생각이었구나. 처음 안 사실에 고개를 주억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녀석의 손이 바둑판 이곳저곳을 가리키면서 요리조리 수정해댔다. 그 시간이 길어지니 답답해서 녀석이 옮기려는 돌을 대신 쥐어 옮겨주었다.

 

 물론 대충 눈에 띄는 곳이랑 녀석이 손가락질 했던 곳에 이리저리 짜깁기를 한 것뿐이지만.

 

 “아. 그렇구나. 이런 수도 있었어.”

 

 감탄하지마, 뭘 생각하든 그거 아니거든. 울컥하려다가 포기했다. 에휴. 이제 속으로 열심히 부정하는 것도 지쳤다.

 

 “아직 멀었네, 나는. 그래도 덕분에 매일이 즐거워. 너와 함께하면서 새로운 수를 발견하고 진심을 다한 대국을 만족스럽게 둘 수 있어서, 너와의 대국은 늘 재밌어.”

 

 이제 진짜 멋대로 생각해라. 부담스런 녀석의 시선을 피하며 자리를 나섰다. 제 2국은 다음 주니까 그때까지 있을 행사를 제외하고는 당분간 만나지 않기로 했다. 녀석도 그 말에는 웬일로 흔쾌히 허락 아닌 허락을 해주어서 내심 신이 났다.

 

 좋아. 하루이틀쯤 게임할 시간은 있겠지? 기다려라, 컴퓨터야. 형님이 간다. 뭔가 잊은 거 같은데. 그건 모르겠고 일단 집 가자마자 컴퓨터부터 켠다!

 

 

 

 

 퀭한 눈으로 대국실에 들어섰다. 천원과 왕좌전이 있다는 걸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도우야 녀석이 하도 명인전 명인전 해가지고 내 타이틀이 하나가 아니며 천원과 왕좌전은 명인전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었다는 걸 이제야 기억해낸 것이다. 어흑. 덕분에 새벽까지 게임하다가 뒤늦게 아차하고 부랴부랴 세수만 하고 뛰쳐나왔다.

 

 “안 나오셨어도 되는데 말이지. 많이 피곤해 뵈는데 집에 가서 잠이나 주무시는 게 어떨는지요? 아직 성장기니까 푹 숙면을 취해야할 텐데.”

 

 상대가 씩 웃으며 부채를 쥐었다폈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머리가 없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잘 모르겠다. 여튼 상대가 내게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서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뭔 말인지 모르겠으니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몰라서 대충 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으, 눈 감겨. 졸면 안 되는데. 빨리 끝내자. 빨리 끝내고 집 가서 좀 자야지. 감겨오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반쯤 수면상태인 정신을 애써 다독였다.

 

 자면 더 늦게 끝난다. 깨어나라, 정신이여.

 

 

 

 

 천원전 대국은 어찌저찌 무사히 끝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골아떨어진 나는 바로 다음날 왕좌전 대국을 치렀다. 그리고 엉터리 승리와 함께 다음 일정이 잡힌 것을 보고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진짜로 몸부림치면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하니까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에 그쳤다.

 

 끼야아아아악! 또 행사야!

 

 

 

 

 “이번에 기성전 리그에 진출했어. 도우야 녀석도 이겼다구! 아직 마지막 결정자가 된 건 아니지만. 꼭 올라갈게, 후지사키!”

 

 신도우가 뭐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응, 파이팅. 녀석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 어디 피신갈 데 없나.

 

 안타깝게도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시선이 나를 향해 있어서 눈물을 머금었다.

 

 “신도우, 이따가 도우야 녀석 오면 너희 둘이 나 대신….”

 

 “알았어, 지도기 말하는 거지? 이제 잘 하면서 왜 그래. 그때 어린 애가 울었던 게 마음에 걸리는 거야? 상냥하기는.”

 

 상… 상냥…. 그런 게 나한테 있을 리가. 뒷목까지 오소소 돋는 소름에 몸서리치며 황급히 뒷목을 감싸쥐었다.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냐.”

 

 “에이, 다 알아.”

 

 네가 뭘 알아.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입을 벌리고 더듬더리다가 한숨과 함께 포기했다. 그래. 포기가 편하지.

 

 

 

 

 두 번째 명인전 대국에서 도우야는 이기지도 지지도 않았다.

 

 무려, 비겼다!

 

 비겼다고! 비겼어! 이럴 수도 있는건가 싶었는데 정말정말 흔치 않게 가아아끔 있다고 한다. 비기는 현상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위해 핸디캡을 다섯집반, 여섯집반 이런 식으로 준다는 둥 그랬던 거 같은데 그건 일단 모르겠고. 나는 숨이 벅차올라서 곧장 도우야 녀석을 바라보며 감격의 눈빛을 보냈다.

 

 네가 나의 희망이다.

 

 “다음엔. 좀 더 제대로.”

 

 감정이 격해져서 말이 끊겨서 나왔다. 숨을 고르는 내게 녀석이 나를 대신해 이어 말했다.

 

 “그래. 다음엔 꼭 이겨보일게. 너도 네 말대로, 제대로 두어줘.”

 

 나는 제대로 두고자시고할 게 없다니까. 네가 날 이겨주면 된다. 알겠지? 이긴다. 도우야 아키라가 드디어 나를 이긴다! 아, 물론 오가타 선생님도 저번에 한 번 반집 차로 지셨기 때문에 아주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신도우는… 어… 너어는…. 좀 더 분발하자.

 

 

 

 

 네, 그 후로 없었습니다. 너 저번에 나랑 비겼던 실력 어디갔어. 운이었냐. 나처럼 운이었냐고.

 

 “어렵다. 그때는 정말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겨버렸고… 이번엔…….”

 

 시무룩한 도우야 녀석의 표정에, 내가 절망하던 것을 멈추고 잠깐 망설였다.

 

 “저.”

 

 신도우 녀석도 뭐라 말하지 못하고 도우야의 눈치를 살폈다. 덕분에 고요해진 기원 내의 분위기에 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네가 이기면, 내 게임CD 하나 줄게.”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녀석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이게 아닌가. 하나론 만족 못하는 거냐. 어쩔 수 없지. 피눈물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고 내뱉었다.

 

 “…두 개 줄게.”

 

 그래, 인심 썼다! 큰 결심을 하고 말을 꺼냈는데 왠지 조용하다. 슬쩍 눈을 떠보니 도우야 녀석과 신도우가 반상 위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왜, 왜 그러는거야. 그렇게 슬픈 거야?

 

 “세… 개….”

 

 힘겹게 하나를 더 얹었다. 도우야가 고개를 홱하니 들고 손을 들어 내가 말하는 것을 막았다.

 

 “괜찮아. 안 줘도 돼. 그, 마음만. 마음만 받을게.”

 

 새빨개진 얼굴로 그렇게 말해도 화난 걸로 밖에 안 보이는데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안 줘도 된다니 그건 다행이네. 작게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천원과 왕좌전은 안타깝게도 방어에 성공했고, 명인전은 도우야 녀석과 한 번 비기는 바람에 제 5국까지 갔다.

 

 세상에 8시간, 이틀에 걸쳐서 두는 대국을 5번이나 치렀다는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번 비긴 거 말고 다 이겨서 5번으로 그친 것이지만…….

 

 그래도 끔찍했다. 근데 한두 달 뒤에 기성인지 뭔지 타이틀이 하나 또 있잖아?

 

 글렀다. 내 인생 글렀어. 지금 내가 몇 살이지? 17살인가? 그치? 내 창창한 중학시절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심지어 고등학교는 진학하지도 못했다고. 아니, 공부 안 한 건 좋다. 히히… 아니, 웃을 때가 아니지. 바둑 너어, 진짜 밉다. 내 인생 돌려줘어억…!

 

 

 

 

 도우야가 식은땀을 흘렸다. 어… 자꾸만 괜찮겠냐고 묻는데 왜 저러지? 고개를 갸울이며 적던 것을 마저 적었다.

 

 “그… 글씨가.”

 

 “이래서 일부러 중간 기록 적는 봉수도 내가 하려고 노력했었는데…….”

 

 뭐라고 중얼거리는 신도우야 도우야 녀석을 무시하고 종이 위에 적은 편지글을 뿌듯하게 내려다보았다. 역시 편지는 정성이지! 이번엔 좀 더 신경써서 적었으니까 알아보시겠지?

 

 “저기, 후지사키. 오가타 선생님께 사과하려는 마음은 알겠는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그, 그래. 아! 차라리 선물을 드려. 담배를 피우시니까 고급 라이터 같은 거 어때?”

 

 아니야. 오가타 선생님은 이미 돈 많으시다고. 그런 거 필요 없으실 거야. 역시 정성이지. 꿋꿋이 종이를 접어 편지지에 넣으며 녀석들에게 말했다.

 

 “난 편지가 좋아.”

 

 그제야 녀석들이 조용해졌다. 음. 한결 낫네. 이제 날 볼 때마다 화내시던 건 좀 줄어들겠지?

 

 

 

 

 물도 주지 않았는데 눈깜짝할 새에 자라있는 곰팡이, 아니 버섯같다. 어느새 단수가 올랐다는 통보를 받았다. 동시에 줄기차게 늘어나는 일정들을 이제 소화하기가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을 안 해도 버거울 정도로 엄청나다는 말이다.

 

 간만에 도우야네 집에 끌려와서, 아침에 받아온 일정표를 시무룩하게 바라보는데 도우야가 경악했다.

 

 “후지사키, 너 이걸 다 하는 거니?”

 

 응? 으응? 두 눈을 깜빡이며 녀석을 보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게서 일정표를 빼앗아갔다.

 

 “거절을 했어야지!”

 

 뭐라고? 거절? 이거 거절할 수 있는 거였냐! 창백한 얼굴로 입을 떡 벌린 채 녀석을 쳐다보았다. 도우야는 끙 신음하며 쾅소리가 나도록 종잇장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네가 하고 싶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소화하기 힘들어. 본원에서 널 놀리려는 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아니. 전혀 하고 싶지 않아.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하고 싶다고 했다고? 이걸 다?”

 

 아니! 하기 싫다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도우야가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벌떡 일어났던 몸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래,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

 

 그게, 내가 알아서 못해서 이렇게 된 거 같은데. 갑자기 차분해진 녀석의 표정이 불안해서 입을 떼었으나 녀석은 한숨과 함께 내 말을 맛있게 먹었다.

 

 “내 도움은 필요 없겠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아니, 내 말 좀 그만 먹고 도와줘.

 

 

 

 

 맞다, 도우야네 집에는 도우야 명인이 살고 계셨지 참. 그야 당연하다. 도우야네 아버지가 도우야 고요 명인이니까. 하하…하. 딱딱하게 굳어서 도우야 명인 앞에서 꿇어앉아있는데 옆에 먼저 와서 얘기하고 있던 오가타 선생님이 못마땅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이번엔 또 왜? 이번 편지는 진짜 진짜 또박또박 정성들여서 썼는데. 시무룩하게 있는 사이 도우야 녀석이 한탄하듯 말을 꺼냈다.

 

 “아버지. 후지사키 좀 말려주세요. 행사만 가면 있다 싶었더니, 정말로 온갖 행사란 행사는 다 참여하고 있더라구요. 이러다간 타이틀전에도 무리가 생길 거고, 몸도 상할 거예요.”

 

 “뭐? 그 많은 걸 다….”

 

 도우야 녀석의 말에 오가타 선생님도, 명인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지르물었다. 역시 그 사람이 사기 친 거였어.

 

 “절반 정도는 거절하는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그래, 가서 불필요한 행사는 줄이는 게 좋겠구나.”

 

 오가타 선생님과 명인의 말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게….”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게다가 반이 아니라 그냥 행사란 행사는 다 안 뛰고 싶은데, 그런데 아무도 제 말을 제대로 들어쳐먹질 않아서요.

 

 특히 당신들이요, 당신들.

 

 순간 욱했다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순화해서 말해야할까? 고민하는데 또 말이 끊겼다.

 

 “굳이 참여하고 싶다면… 보자.”

 

 “음… 이거랑, 이건 빼도 되겠군요.”

 

 이 사람들이 진짜.

 

 “차라리 다 빼주세요.”

 

 울컥해서 필터 없이 내뱉었다. 순간 아차했지만 돌아온 반응에 나는 눈물을 가리기 위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으마.”

 

 “아직 젊으니 괜찮겠지.”

 

 아니. 다 빼달라고요. 내 말을 뭘로 듣는 거야.

 

 

 

 

 환장하겠네. 옆에 딱 붙은 사람 때문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수많은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인사만 줄창 나눠야했다. 차라리 도우야 녀석 손에 이끌려서 애들한테 시달리는 게 낫지.

 

 “그렇게 불만있는 티 팍팍 내지 마라. 나도 아키라가 부탁한 거 아니었으면 네 녀석이랑 같이 안 있었어.”

 

 오가타 선생님이 화를 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주변 사람들이 들을까 내게만 무섭게 속삭인 것이다.

 

 오들오들 떨며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내 원수, 도우야 아키라. 너는 정말이지 내 평생의 원수가 될 생각이냐.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눈물이 흐르는 눈가를 쓸며 울분이 담긴 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지 마라. 땅 꺼질라. 한숨은 내가 쉬어야지. 원래 참가하지도 않는 행사를 너 때문에 참가한답시고 행차해줬는데 말이야.”

 

 한숨 아니에요. 그리고 안 그러셔도 되거든요…. 불만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물론 어른이니까 쬐끔만. 그치만 좀 억울하니까 쪼금만 더. 앗. 눈 마주쳤다. 흠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딴짓하는 척하며 켈록 헛기침을 했더니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 들켰나.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보는 도우야 녀석 때문에 나는 오들오들 떨어야했다. 왜, 왜 그래? 오가타 선생님과 무슨 얘기를 하더니 그보다 더 어마무시한 눈으로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후지사키. 안 되겠다.”

 

 뭐, 뭐가 안 돼? 무슨 말이 나올지 무서워서 마른침을 삼키는데 사레가 들려서 간신히 침을 삼켰다. 덕분에 되묻는 목소리가 억눌렸다.

 

 “뭐가…?”

 

 누가봐도 겁먹은 목소리였다. 곧바로 입을 닫자 도우야 녀석이 더 무시무시한 얼굴로 내 어깨를 꽉 붙들었다. 저기. 이거 좀 아픈데. 너 악력 되게 세다. 하하. 무서워…….

 

 “너 기침했다며.”

 

 예? 제가요? 언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울이자 녀석이 입을 꾹 다물고 할말이 많은 표정으로 한참동안이나 나를 노려보았다. 저기, 어깨에 슬슬 멍이 들 거 같아. 아파서 인상을 쓰자 그제야 도우야는 말을 이었다.

 

 “아프면 말을 했어야지.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니까.”

 

 내가 무리하고 싶어서 무리했나. 본원에서 그렇게 스케줄을 짜줬는데 어떡하라고. 그나저나 아프다니. 나는 아픈 데 없는데. 아, 있다. 네가 붙들고 있는 어깨가 아파. 그러니까 얼른 이 손을 떼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또 냠냠 먹혔다.

 

 “곧 기성 방어전인데 감기몸살이라니.”

 

 내 말이 그렇게 맛있냐… 근데, 감기몸살이요? 누가요? 멍하니 녀석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반박했다.

 

 “아니, 난….”

 

 나는 감기 따위 걸리지도 않았는데요? 몸살이요? 완전 팔팔한데요? 네가 잡고 있는 어깨만 빼면? 얼빠진 나를 두고 녀석이 무어라고 막 화를 내더니 딱 내 손을 잡고 나를 끌고갔다. 어깨는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나 이제 손목이 붙잡힌 것이다.

 

 아니, 좀 놓으라고. 이 정도면 안 아프다가도 아플 거 같다니까? 평소에 내지 않던 화를 내려고 시동을 걸었다.

 

 “당장 가자. 가서 행사 다 취소해.”

 

 이내 들려온 녀석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화가 가라앉았다. 너 이 녀석…. 감동받은 탓에 울컥했다. 너 진짜 착하구나? 천사였어. 역시 너는 정말 신이 내려주신 천사임에 틀림없다! 뭐라고 홀로 분노에 찬 말을 계속 내뱉는 도우야 녀석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네가 그렇게까지 나를 위해주다니. 내 진심을 알아줬구나. 울먹이는 목소리를 간신히 삼켰다.

 

 “…그렇게 말해도 행사를 다 취소할 거라는 말은 무르지 않을 거야.”

 

 흠칫했다. 무르지 마. 무르지 말아줘, 제발. 그렇게 말하니까 불안하잖아.

 

 

 

 

 ***

 

 

 

 

 알아서 하겠지 생각했던 도우야 아키라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곧 기성 방어전인데, 감기몸살이라니.”

 

 역시 너무 무리한 거야. 굳은 표정으로 아키라는 후지사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꾸만 아니라며 부정했지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원래도 말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조금 전 오가타 선생님이 후지사키를 저가 있는 기원에 데려다주시며 ‘녀석이 기침을 하더라’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아키라는 깜빡 속을 뻔했다. 그의 표정은 늘 무표정하다시피 한결같았으니까.

 

 “아니. 괜찮다니까. 내 목소리는 원래 잘 안 나왔….”

 

 “원래 그런 게 어딨어? 게다가 누가 겨울에 그렇게 식은땀을 흘려?”

 

 아키라가 화가 나서 사납게 이야기했다. 후지사키는 그게 아니라, 하고 입을 떼었다가 시선을 회피했다. 딱 봐도 변명할 거리를 못 찾은 모양새에 아키라는 더 화가 났다.

 

 “당장 가자. 가서 행사 다 취소해. 이건 분명…!”

 

 분명 너를 무시해서, 너를 괴롭히려고 사람들이 네게 행사란 행사는 죄다 퍼준 거라고. 아키라가 뒷말을 삼켰다. 그렇게 말해봤자 후지사키에게는 별다른 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되레 제 속이 더 타들어갈 것이 뻔했기에.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후지사키의 손목을 붙잡아 이끌면서 말이다.

 

 “네가 안 하겠다면 내가 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아키라는 과거 저를 괴롭히던 아이들을 내쫓던 모습은 어딜가고, 본인에게 향하는 불이익을 곧이곧대로 받고 있는 후지사키가 답답해서 이를 악물었다. 무어라고 입을 열려던 후지사키는 이내 입술을 지르물었다. 그 모습에 더 속이 상해서 아키라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그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아키라는 쥐어잡은 그의 손목을 놓지 않겠다는 듯이 꽉 붙들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져서 자신의 결심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말해도 행사를 다 취소할 거라는 말은, 무르지 않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움찔하는 후지사키의 행동에 아키라가 정말이지, 한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좋아. 행사가 줄어서 만족스러워. 어젯밤에는 게임CD 하나 켠김에 왕까지 다 깼다. 신난다! 물론 시간이 많아졌다는 핑계로 도우야와 신도우 녀석이 들들 볶아대서 전보다 바둑을 더 많이 둬야하는 것만 빼면, 그리고 얘네들이 부담스럽게 날 챙기는 것만 빼면! 완전 신난다. 하하…. 근데 너네…….

 

 “후지사키. 담요라도 줄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악! 엄마가 챙겨주신 덕분에 엄청엄청 따듯하게 입어서 가뜩이나 더워죽겠는데 도우야가 갑자기 나를 보며 추워보인다면서 담요를 덮어주었다. 신도우가 옆에서 아주 뜨거운 차를 따라 내게 건넸다. 얼굴까지 훅하니 열기가 끼쳐왔다.

 

 “자, 마셔. 후지사키.”

 

 “별로 안 마시고 싶은데.”

 

 “열이 나잖아.”

 

 “아니, 그건 땀이 나서.”

 

 “식은땀이 나는 거니? 담요를 하나 더….”

 

 “됐어.”

 

 더워. 덥다고. 뜨거운 거 싫어, 이 자식들아. 거의 강요하듯 쥐여주는 담요와 찻잔을, 차마 잘못 밀어서 사단이라도 날까봐 제대로 밀어내지도 못하고 억지로 받아들었다. 썩은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작심하고 마셨다. 빨리 마시고 치워버리자.

 

 콜록, 앗뜨거. 급하게 마셨더니 사레들리고 입안이 다 데인 느낌에 기침하며 인상을 썼다.

 

 “거봐. 무리했다니까. 기침이 심하잖아.”

 

 “내일이 기성전 첫 대국날인데. 괜찮겠어, 후지사키?”

 

 아픈 건 아니지만 안 괜찮다. 그렇게 아픈 거 같으면 불러내질 말았어야지. 너넨 내가 아픈 거보다 바둑이 먼저지? 물론 진짜 아픈 건 아니지만. 뚱하니 입을 비죽이며 꿍얼댔다.

 

 “진짜 안 아프다니까.”

 

 아무도 안 믿었다. 또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만.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프니?”

 

 그래. 아프다. 너네 때문에, 이것들아.

 

 

 

 

 신도우가 굳은 표정으로 내게 마주 인사해왔다.

 

 “몸은 괜찮아?”

 

 응. 괜찮지. 어제도 엊그제도 그리고 앞으로도 아플 거 같지 않은걸.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녀석을 힐끔 보았다. 누가 봐도 엄청 긴장한 모양새였다. 맞다. 저번에 아키라가 크게 긴장하지 않아서 깜빡했는데, 얘네는 타이틀전에 본격적으로 도전자로 대국하는 건 처음이었지.

 

 뭐라고 응원해야지? 역시 이게 좋겠다.

 

 “꼭 이겨.”

 

 나는 꼭 지도록 노력할 테니까. 두 손을 불끈 쥐고 신도우 녀석에게 말했다. 녀석이 두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이상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너도 꼭 이겨, 후지사키.”

 

 뭔데 내 진심을 맞받아치는 거야. 아니, 무엇보다 난 별로 이기고 싶지 않은데. 반박하려다가 대국 시간이 다 되었다는 소리에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어야했다. 여기서 더 말하면 대국진행자가 엄청 싫어할 게 뻔했다. 저번에 영감님, 아니 구와바라 선생님이 뭐라고 하니까 엄청 싫어하더라. 그런 미움은 별로 받고 싶지 않아서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겨라, 신도우 히카루. 꼭꼭 이기는 거다. 너의 의외성을 믿는다!

 

 

 

 

 실패다. 이번에도 져버렸다. 누가? 상대가. 아. 눈가를 짓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길 수가 없네.”

 

 아니, 그렇게 말하면서 웃지만 말고 이겨달라니까 왜 포기하듯이 얘기하냐. 울컥한 것을 삼키고 그 말을 맞받아쳤다.

 

 “아냐,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다. 어? 그렇게 생각해야지. 어? 그래야 진짜로 어, 막 나를 이기고 어? 그러지!

 

 “알겠지?”

 

 알겠다고 해. 지그시 녀석을 노려보았다. 포기하지 마라. 나를 이겨라, 이 자식아. 속으로 씩씩대며 못다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신도우 녀석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고마워….”

 

 녀석은 뭔 말을 하려다 말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쑥스럽게 웃었다.

 

 “언젠가는 네게 이길 수 있겠지?”

 

 머쓱한 건가.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아. 좋은 자세야. 어서어서 나를 이겨주렴.

 

 

 

 

 나를 이기기 위해서 열띤 토론을 하는 도우야와 신도우의 모습에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언제부터인가 거기에 오가타 선생님도 참가해서 나를 무섭게 했지만 일단은 나를 이기겠다는 취지 자체는 좋았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후지사키, 한 판 두자.”

 

 괜찮기는 개뿔이 엄청 무섭다. 금방이라도 칼을 들고 찌를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직시하는 안경너머의 눈동자에 스리슬쩍 고개를 회피했다. 왜 두던 거 마저 안 두시고 저한테 오세요. 따지고 싶었지만 후환이 두려워서 금방이라도 말이 튀어나갈 거 같은 입가를 쥐고 바둑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거절은 없다.”

 

 거절은 거절한다. 뭐 그런 건가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나한테 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수를 미리 보는 거냐고 하는데… 생각을 안 하면 됩니다. 그냥 막 둔 거라고? 나한텐 실력 같은 거 없다니까. 그치만 또 그냥 뒀다고 하면 환장할 정도로 이상한 오해를 할 거 같아서 입도 뻥긋 못하고 한참을 있었다. 그랬더니 녀석들이 저들끼리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과정이 없으니까 설명할 길이 없겠지?”

 

 “그래. 후지사키는… 그냥 둔다고 했으니.”

 

 “감으로 두는 걸까?”

 

 “그렇지 않을까? 아니면 정말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는 걸 수도 있어.”

 

 “어떤 거니, 후지사키?”

 

 감이요? 먹는 감이라면 제가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만 그게 아닌 거 같으니 잠자코 있겠습니다. 자기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다가 갑자기 나한테 물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녀석들의 시선이 닿아 따끔거리는 볼을 긁적였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대충 알아서 생각해. 지금까지 그랬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내 의견을 묻는담.

 

 

 

 

 처음으로 이상한 일이 있었다. 기성전 세 번째 대국에서 신도우 녀석과 대국할 때였다.

 

 녀석이 돌을 놓고 나서, 나는 멀뚱히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참을 두지 않자 상대편에 앉은 신도우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졌습니다, 하고. 그런데 무언가 찜찜했다. 잘못해서 어설프게 졌다고 돌을 던지면 진짜 큰일 나니까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다음 수를 두었다.

 

 “졌습니다.”

 

 신도우의 고개가 숙여졌다. 이로써 3연승. 한 번만 더 이기면 완벽한 방어로 기성전이 끝난다. 망했다. 안 망한 날이 있을까? 모든 게 못마땅해서 끙 신음을 삼켰다. 물론 신음한 이유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디어 우려하던 사단이 난 것이다.

 

 아무 생각 없던 내 머릿속에 까맣고 하얀 돌이 둥둥 떠다녔다.

 

 완전 절여졌어. 바둑에. 내 뇌가. 나는 이마를 감싸쥐며 절망했다.

 

 “힘들다….”

 

 괴로워. 피곤해. 그만 두고 싶다. 울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도우 녀석이 화들짝 놀라서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 역시 몸살기가 아직 남은 거지? 기침은 멈춘 것 같지만… 무리하지 마, 후지사키.”

 

 안 아프다니까, 이 자식이. 아니, 안 아프지는 않은가. 머리가 아프고 속이 상하니까. 왜 또 이긴 거야. 참담함에 얼굴을 쓸었다.

 

 “됐어, 저리 가.”

 

 너 나 이길 때까지 친한 척 하지 마. 임마. 울쩍한 목소리로 녀석을 밀어냈다. 신도우가 머뭇거리며 물러섰다. 이씨, 그런 표정 지으니까 마음이 약해지잖아.

 

 “감기가 옮을까봐 그래? 괜찮아! 나 지금까지 잔병치레 한 번 없었어!”

 

 아니. 안 약해졌어. 걱정 말라는 듯이 말하는 녀석을 뚱하니 흘겼다. 나도 잔병치레 없었거든?

 

 

 

 

 잠깐 생각해보았다. 어제 바둑 뒀고, 엊그제도 바둑 뒀고, 그리고 그 전날도….

 

 맙소사. 절망스럽게 머리를 짚었다. 내가 내 스스로 게임에 대한 걸 잊다니? 이제 행사도 거의 없다시피한데? 충격을 받아서 멍하니 있는데 어느새 익숙하게 내 곁을 차지하고 있는 신도우와 도우야가 말을 걸어왔다.

 

 “왜? 또 머리가 아파?”

 

 “좀 쉴까?”

 

 이럴 수가. 언제 익숙해진 거지? 안 돼. 이러다간 진짜 큰일 날 거야. 그래. 지금 당장 게임을 하러 가자. 굳은 결심을 세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야겠어.”

 

 “어딜?”

 

 어딜 가기는. 게임하러 가지. 되묻는 녀석들을 뒤로하고 도우야네 기원에서 뛰쳐나왔다.

 

 

 

 

 ***

 

 

 

 

 신도우 히카루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기성전에서 자신이 완전히 패배했지만서도 히카루는 상대였던 후지사키 키요시가 걱정이 되었다.

 

 ‘힘들다.’

 

 히카루 자신과 두던 도중에 굳은 얼굴로, 드물게 곧장 다음 수를 두지 않았던 후지사키가 대국이 끝나고 나서 내뱉었던 말이다. 힘들다고? 히카루는 철렁했다. 후지사키의 좋지 않은 표정에 역시 여전히 몸이 좋지 않은 건가 생각했으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도우야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히카루는 답해주지 못했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바로 어제, 며칠이 지나도록 심각한 표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후지사키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대로 된 말도 없이 기원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오늘은 아예 기원에 나오질 않았다.

 

 “신도우, 후지사키에게 이상한 점은 없었니?”

 

 “이상한 점이라면….”

 

도우야의 물음에 히카루가 머뭇거리며 입을 떼었다. 말해도 될까? 그치만 말을 하고 이야기를 나눠봐야 해결될 것 같았다.

 

 “얼마 전에 기정전 제 3국에서 후지사키가 한참 안 뒀던 거 기억해?”

 

 “기억하지. 그때 놀랐어. 네가 둔 수가 참 좋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후지사키에게 그렇게나 위협이 될 정도의 수였나싶어서 더 놀랐었지.”

 

 히카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신도 동의한다. 지금껏 오가타 선생님이나 도우야와 함께 한참을 고민해서 후지사키의 수를 파훼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 결과물로 생각해낸 수였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라 기대치는 않았었다. 후지사키의 실력은 그만큼 뛰어났으니까. 그러나 왜였을까? 그날의 그는 그 수에 일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왜였을까… 어쩌면,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거라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슬럼프…?”

 

 히카루가 작게 중얼거렸다. 도우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슬럼프? 되묻는 그에게 히카루가 말했다.

 

 “후지사키가 그날 대국이 끝나고 ‘힘들다’고 했거든.”

 

 도우야가 크게 숨을 삼키고 충격받은 표정으로 히카루를 보았다. 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엇이 후지사키를 힘들게 했을까? 정말 슬럼프인 걸까? 그렇다면 그 슬럼프를 극볼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주어야할까?

 

 “역시 바둑을 더 많이 두게 해서 얼른 떨쳐버리는 게 낫겠지?”

 

 턱을 괴고 고심한 결론을 이야기하는 도우야에, 히카루는 머뭇거리며 입을 떼었다.

 

 “음… 좀 쉬게 해주는 것도…….”

 

 “아니야. 이럴 땐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두는 게 오히려 좋을 수도 있어.”

 

 도우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았을 때 후지사키는 방치하면 안 될 타입이었다. 그러다가 바둑에서 손을 떼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도우야의 강경한 어투에 히카루가 이내 수긍했다.

 

 “그럴까? 그럼 후지사키에게 찾아가서.”

 

 “응. 그러고 보면 최근들어서는 후지사키에게 먼저 대국하자고 한 횟수가 적었지?”

 

 “맞아, 복기만 잔뜩 하고. 후지사키를 이기려고 오가타 선생님하고 토론만 줄창 했잖아.”

 

 이야기하면 할수록 도우야의 말이 맞는 것 같아서 히카루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도우야가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내렸다.

 

 “그럼 지금 가자. 가서 후지사키가 괜찮은지 보고, 그동안 대국을 둬두지 않아서 섭섭했을 텐데 대국도 실컷 해주는 거야.”

 

 “그래, 그러자.”

 

 히카루가 그제야 답을 찾은 것에 후련한 표정으로 웃었다.

 

 

 

 

 ***

 

 

 

 

 대체…. 컴퓨터를 하다말고 들이닥친 신도우야 도우야 이 두 녀석 때문에 나는 절규하며 죽어버린 캐릭터를 바라보았다.

 

 “아….”

 

 올 줄 몰랐던 두 녀석이 갑자기 와서, 화들짝 놀라서 클릭 미스로 보스에게 머리를 아주 강력하게 내려찍히고 만 것이다. 너털하게 게임을 종료하고 컴퓨터 앞에 엎드렸다.

 

 제발 날 내버려둬…….

 

 

 

 

 내 친구들이 왔다는 소식에 밝은 표정으로 다과를 내어주신 어머니께 어물쩡거리며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곤 불만스럽게 내 방에 떡하니 자리잡은 도우야와 신도우 녀석을 돌아보았다.

 

 “넷바둑을 두고 있던 거니?”

 

 “방에 바둑판이 없네. 컴퓨터로만 두나봐.”

 

 너네 남의 집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냐. 속으로 투덜거리며 녀석들 앞에 다과상을 내주었다.

 

 “먹고 가. 난….”

 

 난 게임 할 거니까. 탁소리가 나게 상을 내려놓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향하려는데 신도우가 턱하니 내 팔을 잡았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무심했지?”

 

 무심했냐. 조금만 더 무심했다가는 바둑에 파묻혀서 죽겠다. 질색하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녀석의 손을 떼기 위해서 손가락을 한가닥씩 쥐어 떨어뜨리고 있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도우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맞아. 우리끼리만 대국하고, 너하고는 타이틀전을 핑계로 전보다 많이 못 두었잖아.”

 

 뭐라고? 그 말을 하는 저의가 뭐야? 설마…. 불안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내 눈이 흔들린 것도 같다. 그걸 보고 뭐라고 생각했는지 녀석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라, 너네.

 

 “오늘부터는 다시 실컷 대국하자.”

 

 내 이럴 줄 알았다. 창백한 안색으로 신도우의 손을 뿌리쳤다. 됐고, 다 나가.

 

 

 

 

 공식도 공식이지만, 사석에서 매일같이 대국하는 신도우와 도우야 녀석들과는 달리 오가타 선생님은 녀석들과 잘 두지 않았다. 물론 아예 안 두었다는 건 아니다. 어쩌다 한 번 두고, 그러다 이기면 몰라 열에 한 번 진다치면 엄청나게 기분 나빠했다. 아닌 척해도 그게 다 보여서 좀 웃겼다. 여튼 그걸 알아서 그도 공식이 아니면 그 둘과 제대로 두지 않는 것이겠지만.

 

 근데 왜 나한테는 이렇게 자꾸 두자고 하는데요.

 

 “후지사키.”

 

 톡톡 바둑돌이 담긴 통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통에 나는 불만을 품으면서도 주춤주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 두면….”

 

 “안 돼. 녀석들이 말하는 걸 보니까 슬럼픈지 뭔지. 엄청 두기 싫어한다면서.”

 

 두기 싫었던 건 처음부터입니다. 왜곡하지 말아주세요.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를 보는 눈이 무서워서 조용히 돌그릇을 열었다.

 

 

 

 

 도우야가 말했다.

 

 “팔짱이라도 끼고 두어보는 건 어때?”

 

 신도우가 말했다.

 

 “그치만, 가뜩이나 건방지다고 다들 오해하는데 팔짱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두 녀석이 내가 어떻게하면 바둑을 천천히 둘 수 있는지 토론하는 소리다. 너네가 왜. 내가 어떻게 두든 무슨 상관인데. 묻고 싶었지만 솔깃하는 내용이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러면 상대방이 위축되어 제대로 두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줄어들거야. 후지사키, 너는 그게 싫었던 거지?”

 

 뭔가 좀 다르지만 일단 어느정도는 맞았다. 내게 위축되어 제대로 두지 못해 나한테서 이기지 못하고 지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둘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그것만 해결되면 슬럼프는 자연히 사라지겠네!”

 

 슬럼프는 또 뭔데. 애초에 슬럼프에 빠질 실력이 나한테 어딨냐.

 

 

 

 

 절대 돌을 먼저 들지 말아라. 팔짱을 끼고 있는건 표정 때문에 도리어 더 무서워 보이니까 차라리 돌을 쥐는 손에 뭐라도 들고 있어라. 아무리 손으로 입가를 가린다고 해도 바둑판 앞에서 웃는 티를 내지 말아라.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나는 마지막 말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으니까. 울면 울었지.

 

 연습해보자며 오가타 선생님이 상대로 나섰다. 왠지 그와 유난히 자주 두는 기분인데 이거 뭔가 음모가 있는 거 아닌가. 의심스러워서 그를 조금 노려보다가 들켜서 홱하니 시선을 돌렸다.

 

 “방금.”

 

 “아닌데요.”

 

 뭘 생각하든 그건 아닙니다. 절대 절대 얄밉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우야와 신도우가 부채를 골라주었다. 아니, 실은 팔짱 끼지 말고 돌을 쥐는 손에 부채를 들라고 그러기에 본원에 있는 가게에 들른 것인데…. 서로 이게 더 어울린다며 다투는 게 귀찮아서 걔네가 한눈 판 사이에 아무거나 근처에 있는 거 하나를 집어서 샀다.

 

 벌써 샀냐면서 들러붙기에 생각없이 부채를 펼쳤다가 바로 접었다. 엄청나게 사나운 호랑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날 떡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악몽 꿀 거 같은 그림인데. 저기, 이거 교환 안 될까요. 식은땀을 흘리며 힐끔 가게 직원분을 바라보았으나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음… 후지사키, 이거는 절대 펼치지 말자.”

 

 동감이야. 드물게 네 말에 동의하고 싶구나, 신도우.

 

 

 

 

 오가타 선생님하고는 진짜 징글징글하게 뒀는데 다시 돌아온 십단전에서 또 마주치다니 너무 억울하다. 도우야가 잊지 말라며 챙겨준 부채를 손에 꼭 쥐고 울먹이고 있는데 오가타 선생님이 무서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키 많이 컸는데 선생님 왜 아직도 저보다 커요. 언젠가 선생님보다 더 커서 나도 똑같이 내려다보고 말 테다.

 

 아니, 이게 아니라 대국 생각을 해야지.

 

 아니! 대국 생각이라니!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크게 숨을 골랐다. 맙소사. 대국 생각! 내가! 세상에! 소름이 돋은 팔을 끌어안으며 고르던 숨을 내뱉었다.

 

 다른 생각하자, 다른 생각. 게임… 그래, 게임 생각!

 

 “아키라가 팔짱 끼지 말라고 안 하던?”

 

 팔짱? 돌연 들려오는 오가타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가 아차했다. 소름이 돋아서 양 팔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그게 팔짱처럼 보였나보다. 그게 아닌데. 머뭇거리며 입을 떼었다.

 

 “소름이 돋아서요.”

 

 내 말에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러게 따듯하게 입지 그랬냐. 3월이긴 한데 밖에 나가면 아직 한겨울이다.”

 

 갑자기 웬 겨울 얘기지요. 의아함에 고개를 갸울이다 그 성격에 내가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는 것을 알아채면 화낼까봐 어물쩡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그가 근처에 있던 대국진행자에게 손짓하며 무어라고 말했다.

 

 “저 녀석한테 따듯한 차라도 좀 준비해주시죠.”

 

 아니. 전 따듯한 거 안 먹는데요. 오로지 얼음사랑파인데요. 한겨울에도 찬물로 목욕하는 사람이라고요. 질색하며 말문을 트려는데 오가타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또 감기라도 걸렸담봐라. 집까지 쫓아가서 대국하자고 한다.”

 

 하하, 따듯한 게 뭐 대수라고요. 낫또를 주신대도 먹겠습니다. 진짜로 올까봐서 당장에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아쉽다는 듯이 그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외면했다. 뜨거운 건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등 뒤가 축축하니 식은땀이 났다.

 

 “화 좀 냈기로서니 너무한 거 아니냐.”

 

 좀이 아니었잖아요. 질 때마다 성질 내셨잖아요. 아닌 척하지 마세요.

 

 

 

 

 도우야나 신도우의 말대로 부채를 들고 있다가 돌을 두다보니까 천천히 둘 수 있게 되었다. 저번에 대시합 때도 상대가 긴장을 덜 하는 것 같아보였고… 물론 그때도 이겨버렸다는 것은 다름이 없지만 말이다.

 

 어흑. 왜 이렇게 슬프지. 포기했는데도 슬프네. 눈가를 잠시 쓸다가 아직 대국 중이라는 생각에 숨을 고르고 최대한 천천히 돌을 쥐었다.

 

 이건 오목이다. 오래 두는 오목이다. 거부감을 줄이려 계속 생각해왔던 것이지만 오목을 완성해서 끝나지 않는 게 바둑이었다.

 

 이번엔 어디다 두지? 데굴데굴 눈을 굴리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곳에 돌을 얹었다. 빈 자리는 많았다. 왼쪽의 삼삼도 아직이고, 가운데 있는 건 아직 두 개 밖에 놓지 못했으니까 완성할 오목은 수두룩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다섯점이 되지 못하고 틀어막힌 것들을 바라보다가 오가타 선생님의 손이 또 돌을 놓았다. 곧장 다음 수를 두려다가 멈칫하고 생각하는 척을 했다.

 

 덕분에 바둑판의 격자무늬가 눈에 박힐 만큼 한참을 보고 있게 되었지만, 상대가 나를 이길 수만 있다면 그게 뭐 대수겠어? 아무렇게나 돌을 내려놓고서 만족스럽게 상대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딘들 두어지겠지. 지금 모양이 좋았다. 느낌이 만족스럽다고 해야하나, 그러니까 내 말은 처음으로….

 

 내가 질 수도 있겠다싶었단 말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부채를 꼭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아차. 펼칠 뻔했네. 안 되지, 안 돼.

 

 

 

 

 대체. 왜. 질 수가 없는가. 절망스러운 마음에 어두운 표정으로 반상 위에 엎어졌다.

 

 “반칙패 당한 건 난데 왜 네 녀석이 그러냐.”

 

 순순히 잘 풀린다 했다. 대국에서 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싶은 타이밍에 오가타 선생님의 옷자락에 쓸려 돌이 떨어져내렸다. 그 순간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이고 내 머리에 천둥이 치는 것처럼 좌절감이 휘몰아쳤다.

 

 “제대로 두지 못한 게 억울한가봐요.”

 

 나를 대신해서 도우야 녀석이 말했다. 어색하게 위로한답시고 내 어깨를 토닥이는데. 건들지 마라. 나 지금 엄청 기분 안 좋다. 제대로 졌다고 말 못하고 이런 식으로 선수 치인 게 정말 너무너무 억울해서 앞에 어른이 계신 것도 잊고 폭 한숨을 내쉬었다.

 

 “참 나, 누가 보면 네가 진 줄 알겠다.”

 

 졌거든요. 분명 성대한 패배 각이었거든요. 울상으로 입술을 지르물었다. 어쩔 수 없다. 다음 대국에는 꼭꼭 지는 수밖에. 이번에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선생님. 꼭꼭 이겨주세요.

 

 “뭐야, 왜 그렇게 봐.”

 

 간절한 눈으로 오가타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불쌍하다는 듯이 보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입가를 씰룩이며 그가 시선을 회피했다. 아니. 불쌍한 건 전데요, 선생님. 제 처참한 연승 기록을 보시라고요….

 

 “다음 대국에서는 꼭.”

 

 꼭. 기필코. 이겨주시길.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중얼거렸다. 오가타 선생님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흘겼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를 응원했다. 그러다 아차해서 입을 다물었다. 또 오해해서 화내시진 않겠지? 힐끔 그를 보니 여전히 이상한 표정이긴 했지만 다행히 불쾌해 보이지는 않아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득 도우야가 말했다.

 

 “후지사키, 요즘도 넷바둑을 두니?”

 

 넷바둑? 그런 끔찍한 걸 집에까지 가서 둔단 말이야? 냉큼 고개를 저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졌다.

 

 “왜?”

 

 “너무 우리하고만 두는 것 같아서. 우리는 타이틀 예선전을 치르면서 다양한 프로들과 두지만 후지사키는 이른 나이에 올랐기 때문에 도전자로 올라가는 사람이 아니면 둘 일이 없잖아.”

 

 신도우 녀석의 물음에 도우야는 장황하게 설명했다. 아, 이거. 불안한데. 이거 완전 불안해.

 

 “아버지가 가끔 두어주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가타 선생님이랑 신도우 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전부잖아.”

 

 그것만도 많은데. 무슨 끔찍한 소리가 이어질지 몰라서 초조하게 도우야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신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래서 그랬을까? 저번에 오가타 선생님이 기풍을 바꿔서 두니까 후지사키가 두는 게 느려졌잖아.”

 

 아니. 그건 너네가 느리게 두라고 부채를 쥐어줘서. 변명하려고 입을 떼는데 둘이서 연신 고개를 주억이며 이야기했다.

 

 “다른 기원이라도 가볼까?”

 

 싫어.

 

 “아니야, 후지사키네 집에 가서 넷바둑을 같이 두는 건 어때? 도우야 너 노트북 있었지?”

 

 싫은데. 누가 우리 집에 마음대로 오래.

 

 “아, 그것도 좋겠다.”

 

 좋긴 뭐가 좋아? 내 얘긴데 왜 나를 빼고 얘기해, 이 녀석들아. 나도 좀 껴줘….

 

 

 

 

 신도우의 노란 머리통과 도우야의 단발머리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내 컴퓨터와 자신의 컴퓨터를 나란히 두고 도우야는 신도우 녀석과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역시 네가 ‘sai’였구나, 신도우…!”

 

 “아니, 나는… 이건, 내 계정이 맞긴 한데. 일단 나는 ‘sai’가 아니야!”

 

 “거짓말 치지 마, 이렇게 증거가 있는걸!”

 

 아니, 싸우고 있었다. 네가 사이냐고 소리치는 도우야와 그걸 받아치지 못하고 박박 우기기만 하는 신도우 때문에 나는 짜증이 나서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두 녀석의 머리통을 꾹 눌러주었다. 그러게 로그인 할 때 그런 닉네임으로 짓지 말았어야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신도우는 ‘sai’가 아니야. 됐지?”

 

 신도우 녀석이 그렇게나 들키기 싫어했으므로 이번만은 녀석의 편을 들어주었다. 거짓말은 못해서 어색한 말투로 내뱉어지기는 했지만, 내 말에 두 녀석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도우야는 아직도 분한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음. 믿는 눈치가 아닌데. 어떻게 변명하지. 아, 그래. 이걸로 하자. 어색한 말씨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신도우, 대리계정은 영구 정지라고. 아이디를 빌려주다니, 네가 잘못한 거야.”

 

 이거면 믿겠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신도우를 보았다. 녀석이 이상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 어쩔. 그럼 네가 핑계를 잘 대던가.

 

 

 

 

 이제 완전 봄이다.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추울까. 십단 타이틀전의 두 번째 대국을 앞두고서 마주앉은 오가타 선생님께 고개숙여 인사했다.

 

 “꼭 이겨주세요.”

 

 그가 인상을 쓰고 옷깃을 탁 털어냈다. 아마 여기가 흡연이 가능한 구역이었으면 필시 담배를 꺼내어 피웠을 거다.

 

 “너는, 그냥 말을 하지 마.”

 

 험상궂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게 비꼬는 게 아니면 대체 뭐야? 진심이란 거냐.”

 

 왜 제 진심을 곡해하여 들으시는지요. 정말 진심이라구요. 울먹으며 입을 떼려는데 그가 손을 뻗어 내 말을 막았다.

 

 “차라리 그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보는 게 낫겠어.”

 

 제 표정이 어떤데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한껏 무해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오가타 선생님이 턱을 쓸며 내 얼굴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흘겼다.

 

 “당초에 무슨 표정인지. 읽을 수가 없단 말이지. 그래서 그런 소문이 돈 거겠지만. 나는 아직도 아키라나 신도우 녀석 말을 완전히 믿진 않아. 네가 착하다고? 참 나.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군.”

 

 혼자서 뭐라고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제 뇌가 지금 과부하 됐어요. 착한… 뭐요? 그런 소문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문인지…?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느려터진 입이 되묻기도 전에 대국이 시작되었다.

 

 “그럼, 시작해주세요.”

 

 선생님. 제게 시간을 조금만 주신다면은 처음부터 모조리 해명하겠습니다. 물론 말주변은 없습니다만 제발 기회를 주세요. 얼른 대국이 끝나서 기회가 오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끝낸다. 빨리. 이기든 지든 모르겠고, 이번만큼은 빨리 끝내고 해명할 거다.

 

 

 

 

 ***

 

 

 

 

 오가타가 식은땀을 흘렸다. 입가를 감싸쥐며 판세를 읽던 그는 턱하니 막혀온 숨을 간신히 내쉬었다.

 

 상대의 수가 오늘따라 거칠다. 근래들어 느려졌었던 손속도 빨라졌다. 아니, 전보다도 더 빠르고 정확한가. 오가타는 마주앉은 후지사키의 얼굴을 보았다가 다시 반상 위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험하려는 건가? 아니야, 역시 저번의 대국에서 실수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다. 오가타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고민은 길었으나 결정은 빠르게. 그의 손이 지금까지 중에 가장 빠른 속도로 수를 놓았다. 빼곡한 격자무늬 위로 내려앉는 흑과 백의 돌들은 언뜻보면 정적이었으나 지금 이곳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격렬한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후지사키의 손이 중앙을 파고든다. 아차 했을 때는 늦었다. 오가타가 이를 갈았다. 이렇게 되면 이 수를 받아쳐야하는데, 그러면 급소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 양쪽이 동시에 위험에 처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느 한 곳을 버리고 더 큰 쪽을 취해야하는데…….

 

 ‘꼭 이겨주세요.’

 

 문뜩 떠오른 후지사키의 음성에 그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런 식으로 두면서 이겨달라고? 이길 수 있을 리가. 물론 격차가 많이 줄어들기는 하였다. 처음 후지사키 키요시 그와 두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오가타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었으니까. 아주 절실히 체감하고 있다.

 

 오가타 자신도, 후지사키의 또래인 아키라나 신도우 녀석도 모두 성장했다. 가끔씩 후지사키가 멈칫하게 할 수 있을 만큼은 말이지. 오가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지사키도 마찬가지로 성장하고 있으니 그 정도만도 감지덕지인가. 쉽사리 그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시간은 자신들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후지사키에게도 흐르고 있으므로.

 

 오가타가 지켜보던 바둑판 위로, 드디어 드러난 백의 급소를 찔렀다. 여느 때보다도 선명한 한 수에 후지사키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이곳이다. 이곳이, 마지막 승부수가 될 것이다. 이곳을 삼켜낼 수 없다면 자신은 지겠지. 지금까지와 같이.

 

 자신의 안경너머로 비추어지는 후지사키의 모습을 오가타는 곧게 직시하였다. 왜였을까, 얼마 전에 기원에서 우연찮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어김없이 투닥이고 있는 아키라와 신도우를 보며 그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도 라이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지. 바둑은 둘이서 두는 거니까. 대등한 사람이 있어야 만족스러운 대국을, 함께 그려나갈 수 있을 테니.’

 

 그 말을 오가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신도우는 그렇지 않았다.

 

 ‘대등한 사람이요?’

 

 고개를 갸울이는 신도우에게 누군가 답해주었다.

 

 ‘그래, 그래야 더 재밌거든.’

 

 대등한 사람과 함께 두는 대국…. 오가타의 뇌리에 다시 한 번 후지사키의 모습이 떠오른다. 늘상 저를 보면 거짓일랑은 일절 없는 표정으로 ‘이겨달라’고 읊조리던, 그 모습이. 오가타는 결국 후지사키의 백쪽으로 형세가 기울어버린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숨을 멈추었다. 회심에 찬 승부수가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둑의 신은 외롭겠네요.’

 

 누군가의 말 다음으로 신도우가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오가타는 그제야, 후지사키의 진심을 알았다.

 

 ‘대등하게 둘 상대가 없잖아요.’

 

 멈추었던 숨을 내뱉으며 오가타가 시인했다.

 

 “졌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내리깔았던 눈을 들었다. 오가타는 반대편에 앉아 저를 바라보는 후지사키의 눈이 슬퍼보인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그래서 오가타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전했다.

 

 “꼭 이겨주마.”

 

 전처럼 빈정대는 어투도, 화를 담은 말씨도 아니다. 저에게 빈정댄 것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일들이 오가타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지금까지는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녀석의 정말 거짓하나 섞이지 않은 진실된 마음이란 것을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기도했어요. 오가타 선생님이 이기게 해달라고요.’

 

 오가타는 ‘서툴다’고 했던 아키라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과 상대할 수 있는 이를 바라고 있을 후지사키의 마음을 이해했다.

 

 “꼭 이겨달라는 말, 나중 가서 무르지 마라?”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오가타는 후지사키에게 말하였다. 설핏 웃는 오가타에게 후지사키는 지금까지 굳어있던 것이 되레 거짓인 양 부드럽게 웃었다.

 

 “진심으로, 꼭 이겨주세요.”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는 후지사키의 입술을, 한결 후련해보이는 그 표정을 바라보며 오가타가 이번엔 순순히 답해주었다.

 

 “기대해도 좋아.”

 

 이번에는 정말로, 후지사키 그의 진심을 이해했으니까.

 

 

 

 

 ***

 

 

 

 

 어떻게든 대국이 끝나고 잽싸게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다음에는 꼭 이겨주마.”

 

 전처럼 이를 갈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꼭 이겨달라는 말 나중 가서 무르지 마라.”

 

 말투가 전에 없이 차분하다. 왠지 감격스러웠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역시 텔레파시라도 닿은 걸까? 갑자기 태도가 변하니 얼떨떨하기는 한데, 오가타 선생님이 진심으로 내 마음을 알아준 것 같아서 일단 기쁘기는 했으니까 아주 환하게 웃었다.

 

 “네. 진심으로 꼭. 이겨주세요.”

 

 ‘꼭’을 강조하여 말하며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말했다. 오가타 선생님이 웬일로 화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기대해도 좋아.”

 

 물론이죠! 저를 이길 거라는 기대! 그건 아주 예전부터 왕창왕창 가지고 있었다고요. 믿어만 주세요! 신나서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나 좀 울어도 될까. 슬퍼서? 아니! 무서워서? 아니! 기뻐서! 진짜로 울어도 되겠지? 어흑, 이게… 드디어…….

 

 “졌습니다.”

 

 진짜 각이었다. 패배 각! 가빠오는 호흡으로 간신이 내뱉었다. 감격스럽다. 정말 너무 감동이다. 눈앞이 흐려졌다. 절로 깊게 들이켜진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숨이 잘게 떨려왔다. 복기하기 위해 돌을 정리하는데 덜덜 손가락이 떨려서 몇 번이고 돌을 놓쳤다.

 

 “그….”

 

 오가타 선생님이 무어라고 입을 떼었다가 말문을 닫았다. 아. 너무 느린가요. 빨리 정리하겠습니다. 슥슥 돌을 주워담고 다시 처음부터 두는데 아직도 감정이 가라앉지 않아서 손이 떨려왔다.

 

 지다니! 진짜로! 졌어! 물론 앞선 대국에서 두 판이나 이겨버려서 아슬아슬하지만, 나머지 두 판을 지면 십단 타이틀을 오가타 선생님이 회수하게 된다. 이대로 차근차근 타이틀 반납한다면 대국을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다! 바둑 두는 거에서 벗어난다니까? 된다, 된다!

 

 신나서 웃는데 내 은인이신 오가타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복기는 마쳐야하니까 손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후지사키. 너는, 그렇게…….”

 

 예? 아까 두었던 대로 그대로 따라두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는데 떨리던 손이 사단을 냈다. 아니, 이걸 놓치면 어떡하냐. 다 헝클어지잖아. 못마땅하게 다시 돌을 쥐고 흐트러진 돌을 정리했다. 대충 아까 보았던 모양새로 복원하는데, 약간 치킨 뼈 발굴하는 기분… 아니지. 먹을 거를 어디다 들이대? 어, 근데. 아까랑 모양이 좀 다른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반대편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네 녀석은 정말이지, 못 따라가겠군.”

 

 뭐라고요? 너무 작아서 안 들렸습니다, 선생님. 아차, 제 은인이신데 제가 무신경했군요! 좀 더 경청해서 듣겠습니다. 바짝 긴장한 모양새로 그를 보았더니 너털한 숨을 내쉬며 그가 손을 저었다.

 

 “됐다. 그렇게 뒀다면 네가 이겼겠지. 어필 안 해도 알겠으니까.”

 

 어필이요? 이겨요? 누가요? 그가 내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히 있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보마. 이번은 이기긴 했지만, 보아하니 다음 번 승부도 장담하진 못하겠다. 그렇게… 순식간에 성장해버리니.”

 

 성장? 제 키가요? 뭔데 장담을 못한다는 거지요. 불안한 마음에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으나 그는 그저 혀를 차며 자리를 뜰 뿐이었다.

 

 저기요, 선생님. 다음에도 이겨주실 거죠? 그쵸? 그렇게 불안한 말씀 하시고 가기 있기예요? 기대해도 좋다면서요! 울먹이며 그가 떠나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신났는데, 다음 대국일이 돌아오는 게 갑자기 무서워졌다.

 

 

 

 

 곧 있으면 내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로 가지고 싶은 게 있냐고 도우야와 신도우가 묻길래 다 필요없고 너네가 빨리 나를 이겨서 타이틀을 가져가줬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녀석들이 마구 웃었다.

 

 “욕심이 없구나, 후지사키.”

 

 욕심이 없다니 이 자식들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가지고 싶은 게임만 벌써 몇 갠데. 도우야의 말에 기분이 상해서 와락 인상을 구겼다.

 

 “웃지 마.”

 

 씩씩대며 녀석들을 노려보는데, 녀석들은 되레 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진짜 누구 놀리나.

 

 “하하, 알았어.”

 

 “안 그래도 오가타 선생님한테 들은 게 있으니까.”

 

 “선물은 필요 없으니까 우리가 빨리 너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대등한 실력이 되면 좋겠다는 거지?”

 

 잘은 모르겠으나 일단 나를 이겼으면 좋겠다는 점에서 아주 틀리지는 않았으므로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한데. 그치만 이미 대답해버렸고, 그건 무를 수가 없었다.

 

 “내일 오가타 선생님과의 대국, 기대할게.”

 

 녀석들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뭔데. 뭐야. 기대하는데 왜 그런 음흉한 눈으로 보는데.

 

 

 

 

 ***

 

 

 

 

 오가타 세이지, 그는 대국자 명단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바라보다가 대국실로 들어섰다. 십단전 제 4국. 여기서 진다면 오가타는 도전자로서의 대국을 마무리 짓게 된다. 고로 이겨야만 다음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겨야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 외에도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그게 자꾸만 마음에 걸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번 대국에서 보았던 상대 후지사키 키요시의 모습이 눈앞을 떠나질 않았다.

 

 잘게 떨리며 내뱉어지던 호흡과 돌을 제대로 쥐지 못할 정도로 흔들리던 손끝, 그리고 제 길을 찾지 못한 채 연신 바둑판 위를 방황하던 눈동자.

 

 오가타로서는 그런 후지사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진 것은 그에게 처음이었던가? 오가타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긴, 일부러 져준 것 두어 번을 제외하고는 없었지.

 

 이겨달라고 했으면서, 그런 모습을 보일 것은 뭐냐. 오가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타들어갔다.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오가타 또한 져본 경험이 수두룩이 있다. 하지만, 후지사키 키요시에게는?

 

 단언컨대 그토록 진심으로 져본 적은 없었을 테다.

 

 그러니까 그렇게나 ‘이겨달라’고 했던 것일 테니. 슬픔이었을까. 분노였을까. 괴로움이었을까. 아니면, 기쁨이었을까. 오가타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가타 선생님.”

 

 “그래.”

 

 뒤늦게 들어온 후지사키가 오가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가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본디 가진 실력도 엄청나지만, 그 성장속도 마저도 경악스러울 만큼의 천재.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온 오가타였지만, 후지사키와 비교하면 한없이 평범하였다. 그렇기에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날 후지사키 그가 받았을 충격과, 감정들이.

 

 무감한 표정의 후지사키가 바둑판을 바라보다가 오가타를 보았다. 마주한 시선에 오가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한참이나 보았음에도 후지사키 그는 시선을 회피하지도, 얼굴을 찡그리지도, 그렇다고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입을 열어 여느 때와 같이 말했다. 하지만 조금 더 들뜬 것처럼 들린다면 착각일까.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해달라. 아무래도 그런 의미겠지. 오가타는 후지사키의 진심이 담겼을 그 음성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고? 그건 오가타 자신이 해야할 말이었다. 그날 놀라웠던 것은 그가 보였던 반응뿐만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으로 꿋꿋이 바둑판을 노려보면서, 돌도 제대로 쥐이지 않는 손으로 복기하던 그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오가타는 그 순간 그가 보여주었던 것들을 기억했다.

 

 찰나, 대국을 다시 검토하기 위해 돌을 치워야만 했던 그 짧은 찰나에 그는 생각해낸 거다. 자신이 졌던 이유와, 이길 수 있었던 방법을. 마치 알면서 두지 않은 것처럼, 그 찰나의 순간에 말이다.

 

 엇갈린 수순 하나만으로 뒤바뀌는 형세, 순식간에 우열을 점하였던 후지사키의 돌들.

 

 오가타는 그 순간 마주쳤던 후지사키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으리라. 지금껏 본 적 없던 열의에 불타는 그 눈동자, 무표정하던 그 얼굴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던 그 눈을. 그 속에 담긴 진심어린 마음을.

 

 너는 그렇게나, 바둑에 진심이었구나.

 

 그날 그에게 전하지 못하였던 말을 오가타는 오늘에야 다시 속으로 되뇌었다. 마주한 후지사키의 눈이 어떠한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기에.

 

 오가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대가 되는 것은 후지사키뿐만이 아니었다. 바둑에 진심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오가타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로 후지사키 키요시 그와 둘게 될 대국이…….

 

 “잘 부탁드립니다.”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

 

 

 

 

 이겼다. 또. 내가…. 얼굴을 감싸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터져나오는 비명을 속으로 내질렀다.

 

 끼야아아아악!

 

 제발, 좀, 나 좀 지게 해줘! 이건 진짜 진짜다. 진짜 오가타 선생님이 일부러 진 거다.

 

 씨근덕대며 바둑판을 노려보았다. 차마 오가타 선생님을 노려볼 수는 없으니까 그가 둔 까만 돌을 아주아주 빤하게 노려보았다.

 

 “…그래, 이 수가 패착이었지.”

 

 뭐요? 뭔진 모르겠지만 걔가 잘못했다는 거군요. 꽉 주먹을 쥐며 분노의 욕을 한사발 날려주었다. 물론 속으로. 우씨. 드디어 패배의 길을 봤는데, 너어…! 너, 돌 이 녀석…! 씨근덕대는 내 어깨를 누군가 툭 쳤다. 흠칫하고 고개를 드니 조금 전만해도 이 수가 패착이니 뭐니 중얼거리던 오가타 선생님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어, 이 각도에서 보니까 좀 무서운데요. 기 죽은 모양새로 힐끔힐끔 올려다보는데 그가 생각보다 화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 신도우나 아키라도 1층으로 내려올 테니 같이 가서 먹으면 되겠구나.”

 

 뭐야. 엄청 화내실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요즘은 져도 크게 화를 안 내시는 거 같다. 폭풍전야인가. 설마. 아니겠지. 내가 뭘 했다고… 하긴 했네. 이겨버렸네. 울상으로 푹 고개를 숙였다.

 

 “만족스러운 대국을 두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예? 뭐라고요? 내가 잘못 들었나.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니 그가 무언가를 가늠하듯이 가늘게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그래, 다음 기전인 혼인보전은 이치류 선생님이시니, 미리 준비하는 것도 좋겠지. 아무리 후지사키 너라도 그분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전 기성이시니까.”

 

 혼자서 무어라 말하고 고개를 주억이는 그 모습에 나는 잠깐 넋이 나가있다가 질겁했다.

 

 그말은 즉, 먹여놓고 실컷 대국시키겠다?

 

 “됐습니다. 안 먹을래요.”

 

 질린 얼굴로 거절하자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라. 그럼 간다.”

 

 아니, 이렇게 쿨하게 간다고? 더 불안한데. 미련없이 떠나는 오가타 선생님을 안절부절하며 바라보다 큰마음을 먹고 입을 떼었다.

 

 “메뉴가 뭔데요.”

 

 일단 뭘 먹는지부터 물어보자. 비싼 거면 먹고… 그래, 우선은 먹고! 다음 일을 생각하자! 고개를 주억이다가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오가타 선생님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초밥을….”

 

 그 목소리가 나오는 것보다도 빨랐다고 자부할 수 있다. 성큼 걸어서 그를 따라나섰다. 초밥이면 뭐, 고민할 것도 없지. 바둑 두죠, 까짓거.

 

 

 

 

 “그러고보니, 후지사키 너는 왜 북두배에 안 나가니?”

 

 북… 뭐? 북두배? 작년인가 재작년에 신도우 녀석이 자기가 주장하고 싶다고 떼썼던 그거?

 

 “내가 거길 왜 가.”

 

 말이 되는 소리를. 제 발로 바둑을 더 두러 가고 싶지는 않았다. 전에 도우야 녀석과 함께 필수 행사가 아니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아서 그런지 저런 웬만한 일정은 생기지 않았다.

 

 “하긴, 타이틀전 때문에 바쁘지. 신인사자전이라도 나가면 좋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안 했을 거 같은데. 그리고 뭘 또 나가란 거야. 도우야가 고개를 주억이며 하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싫다, 이 악귀야. 훠이. 내 속도 모르고 신도우가 맞장구쳤다.

 

 “그렇구나. 자라나는 새싹을 밟을 수는 없다는 거겠지.”

 

 새싹이라니. 새싹이라기엔 너네 너무 크지 않았냐. 무엇보다 내가 밟힐 것 같은데. 걔네 눈빛이 작작 살벌해야지. 할 말이 많지만 받아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무슨 말만 하면 곡해해서 들을 텐데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댔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생일 선물로 바둑판을 받았다. 입이 떡 벌어졌다. 누가. 생일 선물로. 이런 비싼 거를 주냐? 신도우와 도우야가 돈을 모아 샀다며, 마음에 들길 바란다고 저번에 우리 집에 왔을 때 바둑판이 없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쑥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니….”

 

 나는 집에서 바둑 두지도 않는데? 완전… 무슨 나무? 뭐? 얼마? 기겁을 하며 녀석들을 보았다. 기껏해야 게임CD나 신발 같은 걸 선물해줄 줄 알았지! 호다닥 도망가란 의미에서 신발을 선물해주면 더 고맙고. 아니, 이게 아니지. 일단 이걸 추궁해야했다.

 

 “이건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

 

 “그래, 같이 두자고 선물하는 거니까! 그렇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구.”

 

 아니. 미안하고자시고. 너네 다음 생일 챙겨야할 생각에 아득해진다. 받았으면 줘야하잖아.

 

 “너네 생일은 언제야?”

 

 복수한다. 복수하리라. 나도 너네가 싫어하는 거 잔뜩 보내버릴 테다. 불타는 눈으로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도우야와 신도우가 머리를 맞대고 키득거렸다.

 

 “우리는 네가 대국만 해주면 좋겠는데.”

 

 “그런.”

 

 그런, 끔찍한 소리를. 차마 욕은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제길, 분하다. 생각나는 게 없어. 안마의자 같은 거를 선물해줘야하나. 직접 때리진 못하니까 걔가 너네를 마구마구 때려줄 것이다.

 

 어? 좋은데?

 

 

 

 

 혼인보전에서 전 기성이었다던 말로만 듣던 이치류 선생님을 뵈었는데….

 

 “잘 부탁한다, 얘야.”

 

 애 취급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선생님이라는 말이 부담스러웠던 내게는 반가운 소리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눈부셔. 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그의 머리를 바라보다 그게 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질끈 눈을 감았다.

 

 어떡하지. 눈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는데. 아, 하긴. 원래 그냥 보이는 데다가 뒀으니까 상관 없지 않을까?

 

 아니, 아무것도 뵈질 않아. 이치류 선생님 맨살… 아니, 머리카락 없이 텅 빈 머리만 보인다고.

 

 눈가를 가리고 최대한 정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인사를 했으면 받아줘야지, 예의하고는.”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분명 보자마자 시선을 피했는데 그의 민둥머리가 눈앞을 아른거려서 정신이 혼미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때빼고 광냈는지 유리로 된 바둑알보다도 반짝거렸던….

 

 생각하지 말자. 휘휘 고개를 저었다. 유전자는 어쩔 수 없지. 아무렴. 불안한 마음에 머리를 쓸었다가 안도하며 손을 내렸다. 다행히 내 머리는 숱은 아직 무사했다.

 

 좋아. 빨리 져서 저 분께서 고개 숙이는 일이 없게 하자. 고개를 주억이며 뒤늦게 인사를 드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엎드려서 절받기도 아니고.”

 

 궁시렁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작아서 하마터면 되물으며 그를 바라볼 뻔했지만 꾹 참았다.

 

 

 

 

 대국이 시작됐다. 그런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집중해서 둘 실력따위는 없지만 적어도 돌을 둘 수는 있어야지 않겠어? 그런데….

 

 또르륵 흐르는 땀이 선명히 보였다. 바둑알… 아니, 이치류 선생님의 머리에서. 순간 입이 씰룩거려서 부채로 입가를 막았다.

 

 눈이 파르르 떨려와서 부릅뜨고 바둑판을 노려보다가 무심코 상대편을 바라보았다.

 

 휘둥레진 그의 눈동자에 아차했다. 맞다, 이 부채 펼치면…! 다급히 부채를 오므리고 손에 꽉 쥐었다. 시선은 바둑판으로 얼른 내린 채 빨리 이 대국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실례다. 웃으면 실례. 굳은 표정으로 열심히 슬픈 생각을 했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핫도그 사준대놓고 낫토를 사줬던 생각. 컴퓨터가 운명했던 생각. 엄마가 부탁하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인터넷으로 도우야 명인과 대국하고, 덕분에 게임 캐릭터가 죽어서 아이템이… 그리고 나중에는 계정까지 사라진…….

 

 갑자기 겉잡을 수 없이 슬퍼져서 우울한 얼굴로 돌을 쥐었다.

 

 

 

 

 ***

 

 

 

 

 이치류 기성,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기성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었는데. 도우야 고요가 순식간에 빼앗아버리질 않나 그가 은퇴하고 난 뒤에는 어린 애송이가 차지해버리질 않나. 이치류는 심기가 좋지 않았다. 최근에는 도우야 아키라… 그 애송이와 신도우 히카루, 그 꼬맹이들도 치고 올라오고 있고. 아무리 한끝발 차이라도 진 것은 진 것. 분한 마음에 타이틀전 도전자로 새로이 도전하길 수 회, 드디어 맞붙게 된 어린 녀석에게 이치류는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괘씸해서 이죽거리듯 말을 건넸다.

 

 “잘 부탁한다, 얘야.”

 

 비웃듯이 인사했는데 저보다 한참은 어린 녀석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저를 힐끔 보기만 하였을 뿐이다.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후지사키 키요시, 아직 어린 그 소년의 모습에 뿔이 난 것은 되레 이치류였다.

 

 인사를 했으면 받아줘야지, 예의하고는. 밥 말아 먹었나. 이치류가 중얼거리자 그제야 건방진 애송이는 답하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선도 주지 않고 대충 고개를 대충 흔들 뿐인 그 인사에 이치류가 더 화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따끔한 맛을 보여주마. 이를 갈며 까득 들고 있던 부채에 힘을 주었다. 그의 시선에 후지사키의 손에 들린 까만 부채가 들어왔다.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딴에 타이틀 보유자라고 멋을 부리고 싶었나보지? 가소로운 표정으로 이치류는 자리에 들어섰다.

 

 그래봤자 애다. 아직은 완전히 애 티를 벗지 못한 이제 갓 18살이 된 꼬맹이한테 노련함 따위 있을 리 없었으므로 당황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그것은 이치류의 큰 착각이었다.

 

 대국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름은 자연스럽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녀석 쪽으로 흘러갔다. 당황하게 만든다? 노련함으로 밀어붙여? 헛소리. 이치류가 쥐고 있던 부채를 습관적으로 입에 물었다. 까드득 잇새로 그의 부채가 너덜너덜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노련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녀석의 수많은 기보를 보며 분석해왔지만 실제로 두었을 때 그에 대한 대책들은 단 하나도 들어먹질 않았다.

 

 마치 둘 때마다 성장하는 무한한 재능의 천재처럼.

 

 후지사키 키요시에게는 약점은커녕 누구든 저지를 수 있는 단 한 번의 실수조차 내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야한다. 마른침을 삼키며 바둑판의 전체를 훑어보았으나 길이 없다. 아니, 분명 있을 테다. 분명… 그래, 단 하나의 길도 없을 리가 있을까.

 

 힐끔 시선을 들어 후지사키를 본 이치류가 그대로 굳었다. 새카맣던 부채를 펼치고 금방이라도 찌를 듯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부채 속에 그려진 사나운 호랑이의 기세가 마치 녀석의 기세라도 되는 양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이치류를 몰아세웠다.

 

 이치류의 손이 떨려왔다. 숨이 턱하니 막히는 것만 같다. 이치류는 순간 인정하였다. 실력만이 아니더라도….

 

 “졌습니다.”

 

 기세에서 밀린 기사는, 패할 수밖에 없다. 숙여진 이치류의 머리맡에 누군가의 짧은 웃음이 내뱉어졌다. 후지사키 키요시, 그 녀석이겠지. 그것이 대국 시작 전에 있었던 일을 무언으로 비꼬는 행태 같아서 이치류는 마른침을 삼켰다.

 

 혼인보전은 8시간에 걸친 장기전 대국이다. 그래서 중간에 봉수라는 것을 하여 이틀에 걸쳐서 대국을 진행하는데 오늘은 그런 것 따위, 택도 없었다. 아마 이례적일 것이다. 이렇게 커다란 혼인보 전에서 이리도 빨리 패배를 승인하고 만 것은. 분명 다른 이들은 너무 쉽게 돌을 던졌다고, 시시한 대국을 두었다며 욕을 해댈 것이 뻔하였지만 이치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 일찍이 포기하여, 앞으로 남은 대국동안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하는 것만이 그나마의 승률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절절히 체감하였으니까.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제대로 된 복기도 하지 않고, 이치류 자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떠나가는 후지사키의 모습에 이치류는 떨리는 손으로 부채를 부러뜨릴 듯이 움켜쥐었다. 그 힘을 버티지 못한 부채는 살을 내보이며 처참하게 부수어졌다. 마치 이치류의 산산조각이 난 자존심처럼 말이다.

 

 

 

 

 ***

 

 

 

 

 혼인보전은 절망스러운 건지 다행스러운 건지 연승 중이라서 금방 끝날 것 같았다. 하하. 상대를 더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이기고 싶지는 않은데. 울쩍한 마음으로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음료수를 깨작댔다.

 

 “후지사키. 어때?”

 

 응? 뭐가? 호로록 음료수를 마시다 도우야의 물음에 멈칫했다. 두 눈을 깜빡이며 다음 말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북두배가 끝나면 고영하와 홍수영이 일본 본원을 구경시켜달라고 했어. 그때 시간 괜찮은가해서. 너를 보고 싶다고 하더라. 역시 혼인보전 4국 전날이라 부담스러울까?”

 

 뭐라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난 또 왜 보고 싶은데? 고영하? 홍수영? 그게 누구람. 음료수가 묻은 입가를 쓸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전에 내가 나갔던 북두배인지 뭔지에서 주장하고 삼장을 했던 애였나. 신도우가 주장하고 싶다고 해서 결국 녀석의 바람대로 주장으로 대국했던 고영하…하고, 홍수영은 나랑… 그래. 내가 질 수 있게 틈을 만들어준 착한 아이!

 

 드디어 기억이 떠올라서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 괜찮아? 홍수영이 좋아하겠다. 너와 다시 대국하고 싶다고 했는데. 물론 신도우와도 두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지만… 신도우랑은 그래도 몇 번 두었으니까.”

 

 괜찮냐고? 뭐가 괜찮아? 어리둥절하게 도우야의 말을 듣고 있는데 신도우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맞아. 후지사키 너와는 그때 멋대로 돌을 던진 것 말곤, 제대로 둔 건 딱 한 번 밖에 없었다며? 홍수영이 엄청 분해했는데.”

 

 킥킥대며 웃는 신도우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람. 멋대로 돌을 던지다니 내가 북두배 때 얼마나 힘겹게 졌는데?

 

 “나는, 그때.”

 

 언제 어떻게 졌다고 말해야 잘 졌다고 소문이 날까 눈치를 엄청 봐가면서 아주아주 힘들게 말한 거였는데! 흥분해서 입을 떼었다.

 

 “알아. 네가 먼저 ‘1패를 한다고 생각하고 두라’고 했잖아. 그 얘기를 해주기는 했는데, 그래도 분했던 모양이야.”

 

 “한 번 두기는 했지만, 다시 두겠다고 엄청 벼르고 있더라. 그 후에 행사에서 한 번, 큰 차이로 졌잖아.”

 

 그러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도우야와 신도우가 연달아 말하는 바람에 내 말문은 딱 틀어막혔다. 입술을 지르물며 씨근덕댔다. 이씨. 이 자식들이. 또 내 말을 먹었어.

 

 

 

 

 이글이글 불타는 또래아이의 눈을 슬쩍 회피하면서 도우야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도와달라니까 자애롭게 웃는다. 역시 악마야. 어쩔 수 없다, 신도우 너만 믿는다. 다시 눈을 돌려 신도우 녀석을 쳐다보니 환한 얼굴로 나를 나보다 조금 더 작은 또래의 바가지머리에게 밀었다.

 

 아니? 밀다니? 나를 버렸어! 울상으로 일그러진 입술을 깨물며 배신감에 치를 떠는데 나보다 한두살 적어보이는 또래의 아이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때, 기억하고 있겠지? 내 이름은 홍수영이야. 너와 다시, 제대로 두고 싶다! 이번엔 이기겠어!”

 

 아, 홍수영이라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능숙한 일본어로 한국에서 온 그 아이는 제 의지를 꿋꿋이 전하였다. 우와… 부럽다. 나도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바둑 두기 싫다! 싫어!

 

 “싫어.”

 

 아니, 잠깐. 나 지금 입밖으로 내뱉었냐. 서둘러 입을 감싸쥐고 얼굴을 구겼다. 이, 이이 멍청한 입 가트니라구.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에 나는 어쩔 줄 모르며 눈을 굴렸다. 나를 향해 이글거리는 눈길을 보내오던 홍수영이라는 아이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싫다고…?”

 

 그런 아이의 뒤에서 그보다 훨끈 큰 키의 아이…가 아니라 소년? 청년? 여튼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많아보이는 남자애가 나와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듣겠다.

 

 “그렇다면, 나와 두는 건 어때.”

 

 한국말이었거든. 아니, 저기. 나는 일본말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거든…. 머뭇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가 도움 요청을 위해 눈을 굴렸다. 본의 아니게 마주친 홍수영이 내게서 시선을 떼고 그 남자애에게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영하 형!”

 

 “통역해줘.”

 

 “형, 그치만….”

 

 “어서. ‘나랑 두자’고 통역해.”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불길한 내용이란 것은 알겠다. 분한 얼굴로 홍수영이 영하인지 뭔지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를 노려보았다.

 

 “알았어, 형. 그럼… 후지사키 키요시.”

 

 나 지금 내빼면 안 될까. 마른침을 삼키며 홍수영의 입에 시선을 집중하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로 연신 내뱉어지던 홍수영의 음성은 어느새 제법 능숙한 일본어를 내뱉었다. 아까처럼 신기해할 새는 없었다.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 말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으나….

 

 “영하 형이, 너랑 대국하고 싶대.”

 

 글렀다. 완전히. 얼굴을 감싸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후지사키는, 내일부터 이틀간 대국이 있어. 이따 저녁에 전야제도 가야하는걸.”

 

 도우야 아키라 이 녀석은 병을 주고 약 주는 게 아주 상습적인 것 같다. 말려준 건 고마워서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혼인보전 때문에 체력 비축중이었구나. 바로 내일이라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도우야의 말에 홍수영이 얼추 납득하고는 입을 비죽였다. 그 곁에 서있던 고영하라는 사람도 충분히 납득한 것 같지는 않지만 대국하자는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그럼, 넷바둑은 하지? 나중에 아이디라도 알려줘. 인터넷으로라도 대국하자.”

 

 아니, 발등에 떨어졌던 불을 잠깐 늦추기만 한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홍수영의 말에 이번에 도우야와 신도우는 말리지 않고 오히려 부추겼다.

 

 “아, 그거 내가 알려줄게. 후지사키 아이디는 ‘sad’야.”

 

 아니! 그 낯부끄러운 닉네임을…! 이 자식, 신도우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내가 도우야 녀석한테 들켰을 때도 그렇게 커버를 쳐줬는데 이러기냐? 배신감에 치를 떨며 신도우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응? 왜 그래, 후지사키?”

 

 눈이 마주친 신도우가 고개를 갸울였다. 옆에 있던 홍수영이 떨떠름하게 나를 삿대질했다.

 

 “근데, 너네는 저 눈이 안 무서워…?”

 

 뭐라고? 잘 못들었는데 나를 두고 한 말 같아서 의아한 눈으로 홍수영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뭔데. 왜 말하다 말아. 궁금하게. 고구마 먹다가 눈앞에서 생수를 빼앗긴 기분으로 뚱하니 혀를 찼다. 쳇, 지들끼리 말하고 지들끼리 정하겠다 이거지?

 

 “나 간다.”

 

 삐졌다, 이것들아. 너네끼리 재밌게 놀아라.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와중에 잘 가라며 인사만 하고 잡지는 않아서 진짜 섭섭해져서 폭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것들.

 

 

 

 

 혼인보전은 결국은 이겼다. 이겼는데 역시나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번 대국은 어땠느냐, 복기하지 않겠느냐 나를 붙잡는 도우야와 신도우를 뒤로한 채 집으로 향했다. 이틀에 걸친 대국이었으니 피곤할만 하다며 순순히 놓아주면서도 녀석들은 아쉬워보였다. 평소같았으면 어쩌면 마지못해 복기까지는 해줬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혼인보전이 끝나고 취재를 한다며 달려드는 기자들에게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바둑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그건 바둑알 초콜릿을 먹다가 할아버지에게 끌려와서였고.

 

 “어린 나이에 계속해서 6관왕을 유지하게 된 소감은요?”

 

 그건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패스.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바둑에 임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당장에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으니까 두말할 것 없다. 그래, 별별 질문 다 있었지만 내게는 마지막 질문이 제일 충격이었다.

 

 “바둑을 두지 않을 때는 무얼하고 지내시죠?”

 

 세상에. 바둑을 두지 않을 때! 아득해졌다. 언제? 언제였지? 언제 내가 바둑을 두지 않았었지?

 

 맙소사. 까마득해. 몇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숨을 들이켰다. 너무 충격이라 그 순간 아무것도 답해주지 못했는데, 그 자리를 벗어난 지금까지도 충격이 여전하였다. 믿기지 않았다. 행사도 줄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진짜로. 타이틀전 말고 일정을 꼽자면 한 손에 다 들어갈 정도란 말이다.

 

 그런데 왜, 기억속에는 온통 바둑뿐이지?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원인을 찾아헤맸다.

 

 쉬는 날마다, 틈이 날 때마다 도우야와 신도우가 찾아오거나… 나 스스로 끌려갈까봐 도우야네 기원엘 제 발로 찾아갔지.

 

 자기 전에 자꾸만 바둑판이 눈앞을 아른거린다면서 괴로워하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이제는 잠에서깨자마자 바둑알이 눈앞을 동동 떠다녀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거짓말. 완전 묵은지가 됐어. 믿기지 않는 현실에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바둑과 관련된 곳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으나,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울상을 지었다.

 

 

 

 

 ***

 

 

 

 

 도우야 아키라는 저 멀리, 뛰듯이 걸음을 옮기는 후지사키 키요시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래?”

 

 신도우의 물음에 아키라는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지금껏 생각만 해오던 것이다. 과한 해석일 수 있지만, 오늘 보인 행동과 안색을 보면….

 

 “후지사키는, 버거운 걸까?”

 

 “버겁다구?”

 

 “응. 타이틀전 대국이 끝나면 매번 피곤해보였잖아. 아직 성인도 아닌데 6

관왕이라는 게, 부담스러운 건 아닐까 해서.”

 

 아키라의 중얼거림에 신도우 히카루는 이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키라가 그 반응에 다시 한 번 고민을 해보았다. 역시 후지사키를 너무 과소평가한 거겠지? 하지만 매번 타이틀기전을 승리로 이끌고 난 뒤에 보였던 표정들은 늘상 밝지만은 않았다. 물론 표정을 읽기 힘들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진중한 표정으로 턱을 괸 아키라를 보면서 신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닐 걸? 저번에 오가타 선생님이, 라이벌로 인식할 만한 상대가 없으니까 쓸쓸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했잖아. 그거 때문 아닐까?”

 

 “그런가.”

 

 아키라는 어느 정도 납득하며 다시 한 번 후지사키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에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뒤쫓을 상대가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의 기대와 시기, 질투에도 시선을 줄 여력이 없었고, 그렇기에 그에 흔들리지 않고 앞만을 바라보며 버틸 수 있었다. 아키라의 시선이 잠시 신도우를 향했다. 자신과 함께 대등하게 둘 수 있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아키라에게는 있었지만….

 

 과연 그런 것이 후지사키에게는 있었을까?

 

 저와 같이 어린 나이에 프로기사가 되어, 듣기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시작된 그의 생에는.

 

 그 누구도 호적수가 되지 못하였던 그의 생에는.

 

 아키라는 무뚝뚝한 후지사키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가끔 짓는 표정은 작게 웃거나 살짝 인상을 쓰거나… 그 정도였다. 정말 가끔 또래처럼 보일 때가 있기는 했다. 전에 뭐랬더라, 자길 이기면 게임을 준다고 했던가.

 

 ‘네가 이기면 내 게임CD 하나 줄게….’

 

 그날의 기억이 스쳐서 아키라는 설핏 웃었다가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그를 지탱하고 있는 걸까? 어떻게 그는 저와 같이 어린 나이에, 지금과 같은 큰 부담감을 견디고 있는 걸까? 어두운 표정의 아키라에게 신도우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문을 텄다.

 

 “별 거 아닐 거야, 도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먹고 싶은 거라도 생긴 게 아닐까? 후지사키는 먹을 걸 은근히 좋아하니까. 너도 기억하지? 저번에 오가타 선생님이 말씀해주셨는데 녀석이 초밥 얘기를 꺼내자마자….”

 

 아키라는 신도우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빈틈이 없어보이는 후지사키의 유일한 약점을 알아낸 것처럼 둘은 속닥대며 키득거렸다.

 

 “맞아. 후지사키는 은근히 먹는 거에 약했지.”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생각하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후지사키에게는… 그러니까 그에게는 어쩌면…….

 

 바둑이, 세상의 관심이 버거운 걸 지도 몰라.

 

 만일 후지사키나 신도우가 없었더라면 아키라 자신 또한 그랬을 거 같다고 문득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못내 신경이 쓰이고 가슴 아팠기 때문에.

 

 아키라의 머릿속에서는 후지사키의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

 

 

 

 

 혼인보전이 끝났다. 다음 있을 타이틀전은 9월이니까 드디어 두어 달의 여유시간이 생긴 것이다! 이번 명인전은 무려 신도우였기에 신기하기도 하고 도우야의 반응이 복잡미묘하기도 해서 나까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맨날 도우야나 오가타 선생님께 지기만 했던 신도우인데, 벌써 명인전 도전자가 되다니.

 

 얼렁뚱땅 명인 타이틀을 지니게 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도우야의 상태를 살폈다.

 

 “우리 집에 가서 컴퓨터라도 할래?”

 

 기분이 나쁜 건지 어쩐 건지 모르겠어서 슬쩍 얘기했더니 도우야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았다.

 

 “정말? 가도 돼?”

 

 “그러고 보니 먼저 초대한 건 처음이네. 어제 혼인보전이 끝나서 피곤해할 줄 알았는데 웬일이야, 후지사키? 가자! 가자, 도우야!”

 

 도우야가 밝은 얼굴을 했고, 신도우도 환하게 웃으며 도우야의 팔을 이끌었다.

 

 약간 찝찝하긴 한데, 가서 게임이나 시켜주면 기분이 풀리지 않을까? 신나하는 둘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데 도우야가 세기의 발견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 가서 저번에 고영하와 홍수영에게 못다한 바둑을 두자고 하자. 어떠니?”

 

 잠깐. 그건 게임이 아니잖아.

 

 

 

 

 잊고 있었다. 왜 잊었지. 맨날 당한 건데. 퀭한 눈으로 컴퓨터 화면을 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고영하는 공식 대국 때문에 자리를 비웠고 홍수영이 마침 접속할 수 있다고 했댄다. 그래서 그 녀석과 두기로 했는데… 상대가 신도우나 도우야가 아니라 내가 됐다.

 

 아니, 도우야 기분 풀어주려는데 왜 내가 둬?

 

 뚱하니 가상의 격자무늬를 바라보다가 마지막 점을 찍고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됐어, 끝. 끝이야. 이제 도우야 네가 둬.”

 

 난 오늘치 바둑은 끝이다, 이것들아.

 

 “하지만, 여길 봐. 홍수영이 다시 두자고 청해왔어.”

 

 “걔는 자기가 이길 때까지 하자고 할 거 같은데.”

 

 도우야와 신도우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다시 앉히려 들었다. 아니. 내 생각엔 내가 졌다고 해도 납득 못하고 계속 두자고 할 거 같은데. 기겁하며 얼른 손사래를 쳤다.

 

 “오늘은 그냥 게임할래.”

 

 기껏 초대해줬더니 또 바둑이야. 꿍얼대며 방 한 구석에 몰아놓은 게임CD를 주섬주섬 꺼내왔다.

 

 “어? 이거 한정판이네?”

 

 신도우가 내 게임CD 중에 하나를 들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녀석도 게임을 아는 구나! 반가운 마음에 흥분해서 입을 떼었다.

 

 “너도 아는구나. 이것도 봐, 이것도 저번에 나온 건데 내가 하려고 다 모아놨어. 그런데….”

 

 신나게 얘기하다가 갑자기 우울해졌다. 바둑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사 놓은 게임의 반의 반의 반도 못했다.

 

 “같이 할까? 이거 2인용이지?”

 

 같이! 게임을! 환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제대로 하는구나! 친구랑 하는 게임이라니…! 감격해서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멈칫했다.

 

 얘네, 내 친구 맞나? 나를 바둑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인 악마들 아닌가. 문득 내가 게임을 제대로 못하게 된 계기가 이 녀석들이라는 게 떠올라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신도우와 도우야 녀석을 흘겼다.

 

 “왜?”

 

 왜긴 왜야. 고개를 갸울이는 도우야에게 투덜거리듯 꿍얼댔다. 병주고 약 주는 너네가 참 대단하다 싶어서다, 임마. 다행히 녀석들은 못 들었는지 여전히 눈만 끔뻑이며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젓고 다시 컴퓨터로 향했다.

 

 “…후지사키.”

 

 그런데 갑자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불안하게 왜 그렇게 불러. 소름이 끼쳐서 조심스레 도우야 녀석을 돌아보자 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바둑을 어떻게 생각하니?”

 

 뭐라고? 갑자기 웬 뜬금포. 어떻게 생각하냐니. 완전 싫지. 썩은 표정으로 답해주었다.

 

 “당연히.”

 

 “당연히 좋아하는 거 아냐? 뭘 물어보는 거야?”

 

 내 말을 잡수신 신도우 선생께서 황당하다는 듯이 되묻는다. 얌마, 내 말 내놔. 신도우 녀석을 지그시 노려보는데 도우야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냥… 가끔 보면.”

 

 가끔 보면? 돌연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문 녀석에게 신도우가 코웃음을 치며 그 뒤를 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그거야? 부담스러운 거 같다고?”

 

 어라. 뭐야. 맞는데 틀려.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싫은 거라고, 그렇게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이 수다스러운 신도우 녀석이 또 내 말을 막았다.

 

 “후지사키도 한 고집 하잖아. 타이틀…은 부담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진짜로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우리랑 어울릴 리가 있겠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난 싫다고 하려고 했는데 너네가 자꾸 어영부영 나를 끌고다녀서 그런 거잖아. 답해봤자 지금까지처럼 소용없을 것 같아서 인상을 벅벅 쓰며 머리를 헤집었다.

 

 “새삼스럽게.”

 

 마음대로 생각해. 여태까지 그랬으면서 뭘 묻는담.

 

 

 

 

 간만에 실컷 게임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신도우 녀석도 은근히 게임을 잘해서 몇 시간 걸리지도 않고 보스까지 클리어해서 더 더 신이 났다.

 

 다음에는 무슨 게임을 하자고 해볼까?

 

 두근두근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CD장을 살피는데 할아버지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험험, 키요시. 간만에 할애비랑 바둑 한 번 어떠냐?”

 

 앗… 아앗… 이건… 거부할 수가 없는데. 오늘은 아까 홍수영이랑 넷바둑 둔 걸로 바둑 끝 하려고 했는데…….

 

 “네….”

 

 시무룩하니 답하고는 저번에 신도우와 도우야에게 선물받은 바둑판을 아주 느릿느릿하게 셋팅했다.

 

 바둑… 싫으다…….

 

 

 

 

 천사 같은 신도우의 도움으로 쌓아두었던 게임을 차근차근 클리어해갔다. 물론 대가로 도우야와 신도우 녀석들과 엄청나게 대국해야했지만 그게 문제냐. 그건 맨날 그랬으니까 이젠 타격도 없다 이거야.

 

 명인전까지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흑, 이제 당분간은 또 게임할 시간이 없겠지? 슬픈 마음에 울쩍하게 돌을 쥐는데 맞은편에 앉은 오가타 선생님이 톡톡 돌을 두드렸다.

 

 “무슨 생각 하냐, 대국 중에.”

 

 앗. 딴 생각한 거 들켰나.

 

 “내일 있을 명인전을 생각하는 거냐? 아니면… 다음 수 둘 데가 없는 건 아닐 테고. 어디에 둬야 나를 엿먹일 수 있는지 생각하는 건가?”

 

 못마땅한 어투로 그가 돌을 던지듯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노려보는 눈빛이 무서워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곁에서 대국하고 있던 도우야와 신도우가 그런 오가타 선생님의 말을 들었는지 내 쪽을 바라보며 웃긴 표정을 지었다.

 

 “오가타 선생님을 상대로 그럴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후지사키.”

 

 “맞아, ‘sai’도 그러지는 못했을… 아.”

 

 아? 도우야가 웃으며 말하다가 이어진 신도우의 말에 딱딱하게 굳었다. 내 앞에 앉아있던 오가타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신도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신도우 히카루, 역시 네가 ‘sai’와….”

 

 무섭게 신도우를 노려보며 아주아주 사나운 눈으로 녀석을 보는 오가타 선생님의 모습에 신도우는 바들바들 떨었다. 클났다, 나의 영웅이…! 내 게임 동지가 위기에 처했다! 서둘러 머리를 굴려 좋은 핑계거리를 생각해냈다. 아, 그래!

 

 “‘sai’와는, 계정을! 공유하는! 사이였지? 그치, 신도우.”

 

 “그, 그래! 맞아! 그, 그 녀석은! 이제… 이제, 바둑을… 못 둬요…….”

 

 뭔데. 뭔데 갑자기 침울해지는데. 마치 아침드라마처럼 우울해지는 급작스러운 분위기에 나는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수라도, 가져올게요.”

 

 심하게 우울해하는 신도우와 그런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옴짝달싹도 않는 도우야와 오가타 선생님에게서 벗어난 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렇게 슬퍼한담.

 

 

 

 

 “후지사키, 너는 알고 있었나? ‘sai’가 신도우와 아는 사이라는 걸.”

 

 갑자기 삼자대면이 되었다. 당사자인 신도우 녀석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니 그 화살이 내게 돌아왔다. 콕콕 박혀드는 도우야와 오가타 선생님의 시선에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저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어… 묵비권을 어? 네. 그렇습니다. 모르겠지만 답할 권한이 제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 계정은 신도우 녀석 거니까 불어도 신도우가 불어야지.

 

 “그래, 알고 있었군.”

 

 왜 말하지도 않았는데 확신하시죠. 살벌한 오가타 선생님의 시선에 질끈 눈을 감았다. 신도우 이 자식아, 나만 버려두고 가기 있냐. 어흑, 무서워.

 

 

 

 

 신도우의 ‘sai’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신도우가 말할둥말둥하면서도 끝끝내 제대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인전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대국. 이겼다. 두 번째 대국도, 이겼다. 세 번째 대국. 이번엔 진짜 제발 이겨주라, 신도우. 너 많이 세졌잖아. 왜 엉망진창얼렁뚱땅 수를 못 받아치는 건데.

 

 “졌습니다.”

 

 또 고개를 숙인 신도우의 모습에 나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네 번째 대국에서 내가 한 번만 더 이겨버린다면 진짜 내년을 기약해야한다. 물론 지금 동시에 치르고 있는 천원과 왕좌전에서 도우야 녀석에게도 기대를 품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번 명인전에서만큼은 꼭 좀 이겨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다음엔.”

 

 울먹이며 말했다.

 

 “꼭 이기겠다며.”

 

 원망을 한사발 담아서 신도우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시무룩한 얼굴로 돌을 쓸어담았다.

 

 “미안. 역시 아직….”

 

 아니, 포기하지 마. 왜 포기하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길 수 있어. 나와 비겼던 도우야마저 꺾고 여기까지 올라온 거잖아.”

 

 포기하려는 녀석을 설득하기 위해 허겁지겁 말했다. 녀석은 그제야 수그렸던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믿어라, 너는 나와 함께 십수 개의 게임을 클리어했던 용사다. 이길 수 있다. 보스를 무찌르듯 나를 무찔러달란 말이야.

 

 “난 네 안에 있는 가능성을 믿어.”

 

 단호하게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이 울컥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왜 울어, 갑자기? 말을 너무 애둘러서 했나? 그래서 막막해서 서러운 건가? 머뭇거리며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잃어버렸던 걸 찾은 것처럼, 이번에도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 ‘sai’도 찾았는데 나를 이길 방법도 못 찾겠냐.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는데, 녀석은 왠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을 빵 터트렸다. 아니아니, 울지 말라고 얘기한 건데 왜 더 울어버리냐고.

 

 

 

 

 “안녕. 후지사키.”

 

 도우야가 인사했다.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 도우야. 잘 부탁해.”

 

 나를 이겨줘! 엊그제 천원전은 내가 한 판 이겨버려서 가능성이 줄었지만 왕좌전은 이제 시작이니까.

 

 착석해달라는 대국진행자의 말에 도우야와 마주보고 앉아서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잘 부탁드립니다.”

 

 살짝 숙여진 시선 아래 익숙한 바둑알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보기만 해도 손안에 바둑알이 쥐인 느낌이었다.

 

 

 

 

 격자무늬에 하나씩 놓이는 돌을 보다가 내 돌, 그러니까 흰색의 동그라미를 한 곳에 얹었다. 몇 분 뒤 도우야가 흑색 돌을 내려놓고 나니 멋진 엉망진창의 오목이 완성되었다.

 

 이건 좀 모양이 예뻐서 더 두고 싶지 않은데.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이 정도면, 내가 졌다고 해도 도우야도 납득하겠지. 처음으로 오가타 선생님한테 졌다고 했을 때는 정말 감동의 폭풍이 휘몰아쳤는데 이번에는 그저 만족스러울 뿐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다행인가, 손을 떨지 않아도 되니까.

 

 “잠깐, 후지사키. 왜….”

 

 낌새를 보아하니 도우야의 입에서 왜 그만 두느냐고 말이 나올까봐 얼른 말을 끊었다.

 

 “다음 수를 둘 수가 없었으니까.”

 

 너무 모양이 마음에 들어서. 다음 수를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이쯤 두었으면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것으로 미루었을 때 졌다고 시인해도 욕먹지 않을 선이었고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만족스러웠어.”

 

 고맙다, 이 자식. 이번 모양은 내가 평생 기억한다. 진짜 모양 예뻤다. 다음에도 이 정도만 되면 좋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치워지는 돌들을 바라보았다.

 

 아쉽다니? 퍼뜩 든 생각에 몸서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아쉽다는 거야? 옮아간다. 신도우와 도우야에게 씌인 바둑귀신이 내게도 붙는 게 아닐까?

 

 히익. 소름이 돋아서 호다닥 대국실을 빠져나왔다

 

 

 

 

 망했다. 왕좌전 첫국에서 무사히 진 것이 거짓이었다는 듯이 천원전과 포함하여 연달아 승리했다. 명인전에서 신도우 녀석이 진 것도 두 말할 것 없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니 도우야가 머뭇거리며 사과를 해왔다.

 

 “미안.”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사과하는 거냐?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을 뿌리쳤다.

 

 “아니야.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

 

 

 

 

 ‘기대한 내가….’

 

 모든 대국이 끝나고 작게 중얼거렸던, 체념한 듯한 후지사키의 음성이 떠올랐다. 아키라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신도우도 명인전에서 내리 졌고, 자신 또한 천원과 왕좌전에서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졌다. 심지어 그 한 번 마저도 왜 진 것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나중에 오가타 선생님이 복기해주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저는 보지 못했던 수많은 수들 가운데 후지사키는 자신의 패배를 본 것이다. 그리고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아키라 저가 볼 수 있을 리 없으므로, 그러므로 그나마의 가능성이 있을 때에 돌을 던진 것일 테지.

 

 기대한 것이다. 자신을 꺾어주기를. 오가타 선생님이 그러했을 때처럼. 하지만…. 아키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한 거다. 그날 후로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입안이 썼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또다시 기성전의 방어전이 시작될 것이다. 이번에 후지사키는 만족스러운 대국을 둘 수 있을까? 단 한 번이라도, 오가타 선생님이 이겼던 그 때처럼. 아키라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 힘들겠지. 오가타 선생님의 실력도 상당히 성장했다고, 스스로 말씀하셨지만 후지사키의 성장속도에 비할 수는 없었다.

 

 오가타 선생님께 한 번 패한 그 바로 다음 대국에서 확연한 차이로 이겨버린 것을 보면 말 할 것도 없다.

 

 여전히 자신의 상대를 찾지 못한, 뒤쫓을 이 없이 외로운 후지사키의 마음이 어떠할지 아키라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를 짐작하기 힘든 것은 오가타도 마찬가지였다. 저번 십단전 세 번째 대국을 이겼을 때 보였던 후지사키의 모습을 기억한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그대로 내보이던 그 표정은…. 가만히 눈앞에 그를 그려보던 오가타는 피우던 담배를 짓이겨 끄며 아키라에게 읊조렸다.

 

 “이번 기성전에서, 기대하라고 해.”

 

 “네?”

 

 그 잔잔한 음성에 아키라가 되물었다. 오가타의 입에서 짓씹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대로 이겨주겠다고 말이야.”

 

 어떻게든 원하는대로 짓밟아주겠다고 오가타가 중얼거렸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단단히 준비해야겠지. 여태까지보다도 더. 새로운 담뱃가지를 물어 불을 붙이며 오가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가보마.”

 

 기성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만 빠듯했다. 후지사키 키요시가 원하는 대로, 녀석에게 진짜 만족스러운 대국을 치르게 해주려면 말이다.

 

 

 

 

 ***

 

 

 

 

 “‘sai’라면… ‘sai’라면 어떻게 뒀을까…….”

 

 신도우가 무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랑 대국하는데 최근들어서 저렇게 중얼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시큰둥하게 턱을 괴고 있다가 녀석과 내가 둔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꾸벅 졸았다.

 

 앗차. 너무 오래 걸려서 그만. 한겨울에 따듯하게 난방을 쐬며 도우야네 집 다다미방에서 앉아있으려니 졸음이 쏟아졌다.

 

 “피곤하니? 하긴, 요즘 무리했지. 타이틀전 세 개를 병행했으니까.”

 

 응? 아니, 그냥 너무 따뜻해서…. 감기는 눈을 번쩍 뜨며 변명하려는데 도우야가 걱정스럽게 말하며 내게 담요를 건넸다.

 

 “옷도 얇게 입었네. 춥겠다. 저번에 보니까 감기도 잘 걸리는 것 같던데.”

 

 아니, 그건 감기 아니었다니까. 기겁하며 고개를 젓는데 신도우 마저 바둑을 돌을 두다 말고 내게 다가왔다.

 

 “아, 후지사키. 추워? 난로를 그 쪽으로 더 밀어줄게.”

 

 아니, 안 추워! 더워! 더워서 잠온다고! 뜨거울 정도로 가까워진 난로에 창백한 표정으로 녀석들을 밀어냈다.

 

 “필요 없어. 너네나 챙겨.”

 

 왠지 모르겠는데 녀석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뭐야. 왜 그렇게 봐. 한참을 나를 빤히 보던 녀석들이 둘이서 고개를 주억이며 속닥댔다.

 

 “저것봐, 얼굴색이 안 좋잖아.”

 

 “온도에 민감하구나, 후지사키는.”

 

 아니라고! 오늘도 찬물로 목욕하고 온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막말이야! 다급히 말을 하려다가 침을 잘못 삼켜서 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역시 추웠던 거야. 따듯한 차를 더 내올게.”

 

 아니야. 난 얼음물이 좋아. 얼음 동동 띄운 오렌지주스 같은 게 좋다고! 말이 되지 못한 내 비명은 입 안에서만 멤돌고 녀석들에게 닿지 못했다.

 

 콜록. 아까 침을 잘못 삼켜 사레 들린 것이 여전히 목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아오, 망할 기침.

 

 

 

 

 신도우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서 넷바둑을 켰다. 고양인지 고영한지 그 사람이 드디어 시간이 났다며, 나보고 그 사람과 대국을 하라는 거였다.

 

 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녀석들은 아랑곳않고 나를 내 컴퓨터 앞에 앉혔다. 이것들이 집에 한 번 초대했더니 이제 아주 자기네 집 안방이지?

 

 투덜거리며 마우스를 잡았다. 두는 건 난데 애들 표정이 아주 심각해졌다.

 

 두기 싫다. 두기 싫어. 이대로 컴퓨터가 꺼져버렸으면. 훌쩍이며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어?”

 

 “아….”

 

 신도우와 도우야가 탄식했다. 와, 대박.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순식간에 새카매진 화면을 바라보다가 크게 숨을 삼켰다. 컴퓨터야, 너 내 마음을 알아줬구나! 이건 바둑 두지 말라는 신의 계시나 다름없었다. 역시 신은 내 편이었어. 대국중에 돌연 꺼져버린 컴퓨터를 향해 환호성을 지르려다가 문뜩 떠오른 사실에 딱딱하게 굳었다.

 

 잠깐만. 네가 나가면 안 되지. 컴퓨터야.

 

 다급하게 전원버튼을 눌렀으나 위잉 소리를 내며 덜덜거리던 컴퓨터가 금세 숨을 거두었다.

 

 “안 돼…….”

 

 내 컴퓨터가 또. 울먹이며 자판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요즘엔 자주 켜줬잖아. 게임을 너무 무리해서 돌린 걸까. 원인을 찾아보다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포기하고 통곡했다. 아, 제발. 내 인생에서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바둑가트니라고…!

 

 

 

 

 ***

 

 

 

 

 ‘난 네 안에 있는 가능성을 믿어.’

 

 신도우 히카루는 후지사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타이틀전에서 졌을 때, 실망하는 히카루에게 그는 저를 이겠다고 하지 않았냐며 투덜거리다가도 말을 바꾸어 히카루를 위로했다.

 

 ‘잃어버렸던 걸 찾은 것처럼 이번에도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만큼의 대국을 치르지 못하여 저 또한 많이 상심했을 터인데, 진실로 믿는다는 듯이 이야기해주었던 후지사키의 모습을 히카루는 눈앞에 그리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이….”

 

 자신의 바둑 안에는, 그토록 찾아헤매던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 후지와라노 사이가 잔존해있었다. 감상에 젖어있던 히카루는 이내 고개를 저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지금은 그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sad’라는 닉네임으로 대국을 하고 있는 후지사키를 다시 집중하여 보았다.

 

 무려 ‘고영하’와 ‘후지사키 키요시’가 인터넷으로 대국을 하고 있었으니까.

 

 승기는 확실하지 않았다. 적어도 히카루가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거침없는 후지사키의 손속에, 그리고 점차 느려져가는 상대 고영하의 착수속도에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후지사키가 이길지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고영하가 두는 속도만큼 후지사키의 착수속도도 많이 느려졌기에. 후지사키가 고민하며 수를 두는 경우는 드물다. 생각에 잠긴 것 같은 후지사키의 모습에 히카루는 조금 놀랐다.

 

 어쩌면, 어쩌면 고영하와의 대국에서 후지사키는……. 생각을 잇던 찰나였다.

 

 “아.”

 

 히카루와, 도우야 아키라, 그리고 후지사키가 동시에 탄식했다. 잘 두고 있던 대국창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컴퓨터 화면이 갑자기 나가버린 것이다. 당황한 히카루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후지사키를 돌아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예상대로 후지사키가 이번 대국을 진심으로, 호적수라 생각하며 기대하고 두었던 거라면 분명 무척이나 낙심할 것이 뻔했으므로.

 

 아니나 다를까. 절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히카루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 등을 토닥였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야.”

 

 머뭇거리며 말을 뱉었으나 그 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절망한 음성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히카루는 슬쩍 도우야와 눈을 맞추고는 후지사키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또, 고영하나 홍수영에게 부탁해서 대국하게 해달라고 해야겠다. 히카루가 쓰게 웃었다.

 

 언제쯤 자신은 그의 외로움을 떨쳐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아득하여 히카루는 고개 숙인 후지사키에게서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1월이 되었다. 첫눈이 내려서 신난다 했는데 도우야나 신도우 녀석에게 온도에 민감하지 않느냐는 헛소리를 들으며 절망스럽게도 눈뭉치 한 번 뭉쳐보지 못하고 실내에 짱박혀있어야했다. 우씨. 녀석들 없을 때 몰래 나가서 눈사람 만들어야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전해에도 바빠서 눈의 니은자로 신경을 못 썼었단 말이다.

 

 근데 얘네가 맨날 날 끌고 다니잖아? 안 될거야…. 훌쩍. 슬픈 표정으로 집에 날아온 우편물을 뜯어냈다. 본원에서 온 우편이었다. 아마 기성타이틀방어전 소식이겠지.

 

 뜯어보니 시간 널널한 내가 아니라, 이번 상대가 된 오가타 선생님의 스케줄에 맞춰졌을 대국시간표가 나왔다.

 

 음. 헬게이트의 시작이군.

 

 한숨을 쉬며 그 종이를 들고 부모님께 가서 알렸다.

 

 “오, 이번 방어전도 무사히 치를 수 있겠구나. 오가타 씨라면 저번에도 방어에 성공했었으니 말이다.”

 

 “많은 타이틀을 방어하는 것도 힘겨울 텐데, 포기하지 않는 모습 보기 좋구나.”

 

 아니요, 사실은 안 하고 싶은데요. 부모님의 따스한 말씨에 오해가 한참은 들어가 있어서 머뭇거리며 그들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인가! 지금이 바로 내가 포기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타이밍인가…! 떨리는 마음으로 크게 입을 열었는데 그대로 숨을 삼켰다.

 

 “어디 보자, 우리 키요시. 이번 방어전 일정이구나! 하하, 이번에 옆집 영감한테 가서 내가 자랑을 한참 했지! 우리 키요시가….”

 

 네, 놓쳤습니다. 기회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언제 오셨는지 모를 할아버지가 크나큰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내 등을 퍽퍽 토닥였다. 좀 아픈데요, 할아버지. 어흑. 근데 등보다 마음이 더 아파. 훌쩍.

 

 

 

 

 “내일이 기성전 첫 대국인데, 기분이 어때?”

 

 도우야가 머뭇거리며 소감을 물었다. 엄청 새삼스럽다. 이상하단 표정으로 녀석을 보았더니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녀석이 말을 이었다.

 

 “전에 오가타 선생님이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어.”

 

 오가타 선생님이? 고개를 갸울이자 녀석은 잠깐 고민하더니 나를 마주보고 작게 숨을 골랐다.

 

 “요즘 잘 안 나오셨잖아.”

 

 그게 왜? 무슨 일 있나보다 했지 별 생각 없었던 나는 도우야의 말에 그저 의아한 마음만 들었다.

 

 “제대로 이겨주겠다고, 기대하라고 하시더라.”

 

 그런 내게 도우야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전했다. 눈을 깜빡이며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반색하며 되물었다.

 

 “제대로?”

 

 제대로 이겨주겠다고? 진짜로? 밝아진 얼굴로 도우야 녀석을 보았더니 녀석은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진짜 기대해도 되는건가! 드디어 하나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거냐고! 두근두근하는 마음에 숨이 벅차올랐다. 기성전은 잘못해서 승부가 엇갈리면 어느 한쪽이 4번 승리할 때까지 총 7번이나 치러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이틀을 반납할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만약 뵙게 되면.”

 

 내게서 단박에 4연승을 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정황상 분명 그건 힘들 테니까. 하지만 나는 잔뜩 기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마주한 도우야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정말 기대하겠다고 전해줘.”

 

 드디어. 설레는 마음으로 녀석을 따라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오히려 저번에 오가타 선생님이 나를 한 번 이겼던 것이 떠올라서, 그날의 감동이 그대로 되새겨져서 잘게 떨며 숨을 내쉬었다. 왠지 이번엔 진짜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진짜 진짜……. 양손을 꼭 쥐고 입술을 지르물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나를 진심으로 떨리게 했다.

 

 

 

 

 기성전 첫 번째 대국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국실로 향했다. 오가타 선생님이 기대하라고 하셨댔지? 룰루랄라 본원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와 딱 마주쳤다. 바로 이번 대국상대, 오가타 선생님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냥 반기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었다.

 

 “안녕.”

 

 기대하라고만 했지 이렇게 무서운 얼굴로 올 거라고는 안 했잖아. 서슬퍼런 눈초리에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눈빛이 아주 형광색처럼 빛났다.

 

 간신히 고개숙여 인사하고 그와 나란히 대국실로 향하는데 옆이 아주 싸늘했다. 바둑이 아니라 기세로 압승하실 거 같은데…. 확인 차 다시 한 번 힐끔 그를 보았다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돌렸다.

 

 무서워어어어어!

 

 

 

 

 이틀 째였다. 그러니까 첫 번째 대국의 이튿날이라는 말이고, 그러니까 바로 오늘 오가타 선생님과 나, 둘 중에 승패가 갈릴 거라는 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가타 선생님이 두는 속도는 확연히 느렸어서 대국의 진도는 반도 채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까진 그 무엇도 확실했던 것이 없었는데…….

 

 떨리는 숨으로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핏기가 가신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폈다. 고개를 숙여야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이보다 확실하게 느꼈던 때가 없다.

 

 기대하라는 말, 진짜였구나.

 

 크게 호흡을 고르고 돌을 던졌다.

 

 “졌습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번에 졌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이상한 감각이 마음속에서 몰아쳤다. 동시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와.

 

 입가를 감싸쥐고 몇 번이고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진짜 제대로 진 것이다.

 

 놀랐다. 어느 정도냐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을 정도로 놀라서, 바둑이라면 치를 떠는 내가 패배를 시인하고서도 한참이나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정도로.

 

 “후지사키?”

 

 오가타 선생님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얼떨떨한 내게 그가 만족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만족스럽겠지?”

 

 만족스럽냐고? 당연한 거 아닌가. 졌는데. 진짜 제대로 져버렸는데 말이다. 내 고개가 당연스럽게 끄덕여졌다. 오가타 선생님은 씩 웃으며 돌을 치웠다.

 

 “이번엔 제대로 검토해보자고. 지금까지처럼 대충하지 말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예? 검토? 복기말씀하시는 건가요? 제대로? 굳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우니까 일단 하잔대로 해야겠다….

 

 

 

 

 도우야와 신도우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어땠냐고? 완전 좋았지. 신나서 나도 웃었다. 공포의 복기 시간이 끝나고 오가타 선생님이 뭐 먹고싶냐고 묻길래 단언컨대 초밥이라고 했다.

 

 “후지사키는 초밥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바둑보다 더 좋아하는 거 같은데.”

 

 도우야와 신도우 녀석들이 동시에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초밥을 좋아하냐는 말만 듣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고기도 좋아.”

 

 “응?”

 

 “근데 어제 먹었어.”

 

 “아. 그래….”

 

 떨떠름한 녀석들을 뒤로하고 앞서가는 오가타 선생님을 호다닥 쫓아갔다. 선생님 성격에 말을 무르지는 않겠지만 늦으면 짤 없을 거 같았다. 초밥은 아직 내 용돈으로 먹긴 비싸다고. 나도 막 먹고 싶다. 용돈 늘려줘요, 엄마….

 

 

 

 

 두 번째 대국 바로 직전날, 신도우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긴장을 하지는 않았나며, 이번에는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위로랍시고 건네는 말에 울컥했지만 녀석이 가져온 게임CD를 보곤 울컥한 것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거, 이번에 나온.”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자, 녀석이 웃으며 답했다.

 

 “엊그제 후지사키 네가 저번 주에 있었던 기성전 1국 치르느라 한정판 게임 못 샀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 게임 좋아하지? 이번에 꼭 이기라는 의미에서, 힘내라는 의미에서 선물해주고 싶었어.”

 

 헉. 허억… 대박.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알았지? 너는 정말……. 감동받은 얼굴로 신도우를 바라보며 감사를 전했다. 이기라는 둥의 말은 제치고 건네받은 게임CD를 꼭 손에 쥐고서 말이다.

 

 “고마워, 신도우. 은인…이 아니라 히카루라고 불러도 돼?”

 

 하마터면 내 평생의 은인이라고 실제로 내뱉을 뻔한 말을 삼키고 아무 말이나 던졌다. 다행히 녀석은 은인 어쩌구하는 내 부끄러운 말을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다만 신난 얼굴로 무어라고 답했다.

 

 “그럼 나도 키요시라고 부른다?”

 

 어. 얼떨결에 이름 부르게 됐네. 이게 게임의 힘인가. 아무렴. 게임은 위대하지. 그리고 내 영웅께서 이름을 부르시겠다는데 거절할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우가, 아니 히카루가 신나서 우리집을 나서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 바로 해볼까. 아니야. 아끼자. 내일 오가타 선생님을 상대로 패배하면 기념으로 플레이해야지. 히카루 녀석을 배웅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내 방으로 올라갔다.

 

 

 

 

 두 번째 대국, 첫날은 별 것 없었다. 저번과 같이 승패를 가르기 힘들었다는 것 정도. 이튿날이 좀 힘들었다. 고심하는 오가타 선생님에게서 지려면 어떻게해야할까 한참을 생각해야했기에.

 

 자꾸만 보이는 것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고 뇌에서 격한 신호가 내려져와서 손을 멈추었는데, 왜인지 멈추었다고 생각했던 손이 제멋대로 돌을 바둑판 위에 얹어버려서 멈칫했다. 아차싶어서 잠시 그러고 있다가 손을 물렸다.

 

 큰일났다. 상대를 힐끔 보았다. 그 표정은 어두웠다. 안 돼. 아직, 다음 수가 있을 거라고요. 저기 삼삼쪽을 어떻게 해보면…….

 

 “졌습니다.”

 

 아. 오가타 선생님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타까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내가 말을 꺼내기에는 그의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아보였다.

 

 “하.”

 

 오가타 선생님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무서워서 두 손을 꼭 마주쥐었다가 서둘러 돌을 정리했다. 오늘은 복기 빨리 하고, 빨리 집에 가야겠다. 도우야나 신도우… 아니, 히카루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헐레벌떡 귀가해야지.

 

 

 

 

 세 번째 대국에서는 장렬히 패배했다. 즉 두 번 지고, 한 번 이겼다. 두 번만 더 지면 끝이란 말이다. 고지가 코앞이야! 신나서 숨을 들이켰더니 눈앞이 펭 돌았다. 이렇게나 내 몸도 기뻐하고 있구나.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감싸쥐고 웃었다.

 

 “감사합니다.”

 

 기쁨을 담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이나 내 눈을 바라보더니 나와 같이 마주웃었다. 저번 대국에서는 기분이 안 좋아보였는데 오늘은 역시 이겨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보인다.

 

 음… 그러니까 오늘은 뭔가 얻어먹어도 되겠지? 기대감에 빤히 그를 바라보았더니 그것을 눈치챈 것처럼 그는 옷가지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오늘도 저녁 안 먹고 갈 거냐?”

 

 “먹을래요.”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아싸! 저번 두 번째 대국에서는 눈치가 보여서 거절했지만 이번엔 즉답했다.

 

 

 

 

 ***

 

 

 

 

 이로서 자신의 2승 1패. 오가타는 상대편에 앉은 후지사키 키요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저것은 기쁜 것일까, 아니면 분한 것일까. 미묘하게 일그러진 그 표정에, 그것을 가늠하듯 오가타의 눈이 후지사키의 모습을 가늘게 훑어내렸다.

 

 ‘이만하면 충분히 만족스럽겠지?’

 

 첫 번째 대국에서 녀석에게 패배를 안겨주고 저가 했던 말이다.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러며 바둑판에서 떼지 못하고 흔들리던 녀석의 시선. 오가타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후지사키 본인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자신과 대등하게 둘 수 있는 존재를 바랐던 녀석이니, 지금 이 상황이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반면에 지금껏 몇 번 져보지 못한 사람이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기란… 어떨까. 힘겹겠지. 어쩌면 괴로울지도 모른다. 그 괴리감에 녀석은 혼란이 온 것일 수도. 생각에 빠져있던 오가타의 귓가에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오가타는 행동을 멈추었다. 눈을 치켜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웃고 있는 후지사키가 있었다.

 

 진실로 즐거워보이는, 그러한 표정이 그 얼굴에 드러났다.

 

 그런가. 괴로움보다 기쁨이란 거로군. 아직까지는. 오가타가 불편했던 마음을 고쳐먹고 슬쩍 웃었다. 글쎄, 그 기쁨이 언제까지 갈지. 손을 꽉 쥐었다펴면서 말을 이었다.

 

 “다행이군그래. 지고 나서 정신 못 차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과연 앞으로도, 그 얼굴을 유지할 수 있을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럴리가요.”

 

 전에 없이 어떤 감정이 담긴 눈으로 후지사키가 저를 바라본다. 마주한 그 눈빛에서 오가타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거, 다행이네.”

 

 녀석이 처음 졌을 때는 어떠했더라. 지그시 눈을 감고 그날의 후지사키를 떠올리다가,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저를 향한 눈빛은 어떠한 감정으로 저를 담고 있었다. 어떠한 감정. 다른 이들에게서는 익숙한 것이지만 후지사키에게선 처음으로 비추어진 그것은 분명, 호승심이었다.

 

 “가자. 오늘도 초밥은 아니겠지?”

 

 “어….”

 

 장난스럽게 녀석의 등을 두드리며 오가타가 걸음을 옮겼다. 농담처럼 던진 자신의 말에 후지사키가 드물게 머뭇거렸다. 오가타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초밥귀신이 붙은 것도 아니고 여러 의미로 대단한 녀석이다.

 

 

 

 

 ***

 

 

 

 

 히카루를 불러서 게임을 하기로 했다. 어제 진 내 기분을 풀어주겠다는 둥 이상한 말을 하길래 그런 건 됐다고 하고, 게임이나 하자고 말했다. 바둑을 두는 것도 아닌데 우리 집까지 함께 따라온 도우야가 그런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또 바둑을 두자고 하려는 거면….”

 

 그러면 관두라고 하려고 했는데 도우야는 고개를 젓고 웬일로 바둑의 ‘바’자도 들어가지 않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 빼고 언제 이름을 부르기로 한 거야?”

 

 뭐야, 그 얘기냐. 별 거 아니었네.

 

 “그럼 너도 불러.”

 

 “…키요시?”

 

 녀석이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대충 대답해주자 녀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도 아키라라고 불러줘.”

 

 으응. 얼마든지 불러줄 수는 있는데 눈이 좀 부담스럽네. 슬쩍 시선을 회피하며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아키라.”

 

 뻘쭘하게 답하고 히카루의 팔뚝을 콕콕 찔렀다. 얼른 게임이나 하자는 무언의 행동이었으나 히카루는 도우야, 아니 아키라와 대화를 하느라 바빴다.

 

 “그럼 나도 아키라라고 부른다?”

 

 “그래. 나도 히카루라고 부를게. 우리가 안 지도 벌써… 12살에 처음 만났었지?”

 

 “그러게. 지금… 곧 성인이 되니까. 정말 오래됐구나, 우리.”

 

 뭘 추억회상을 하고 있어. 한숨을 내쉬며 뚱하니 녀석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너네 대화 언제 끝나니. 게임 좀 하자.

 

 

 

 

 히카루가 기성전 끝나고 치러지는 다음 타이틀 십단전 도전자는 저가 될 것 같다며 방긋방긋 웃으며 자랑을 했다.

 

 응. 얼른 올라와서 내게서 타이틀 좀 가져가주라. 근데 아직 기성전 끝나지도 않았거든. 이번에 4국이랑 다음에 5국까지 연패해야 하거든. 만약 한 번이라도 이기면, 아니 진짜 만에 하나라도 두 번을 이기면… 끼야아악! 끔찍한 상상을 했다. 두 번 이겨서 7국까지 가버리는 아주아주 끔찍한 상상을 말이다.

 

 물론 세 번 이기지는 않겠지. 하하.

 

 히카루를 따라 아무 생각없이 웃다가 싸하게 굳었다. 촉이 왔다. 아니, 오지 마 이런 촉. 울상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참, 아직 기성전이… 이번 주 수요일이지? 힘내. 꼭 이겨.”

 

 아니. 이기고 싶지 않아. 이기라고 하지마. 불길하니까.

 

 

 

 

 히카루의 입을 때려줄 것이다. 손으로 마구마구 괴롭혀줄 것이다.

 

 말이 씨가 됐잖아, 이 자식아.

 

 우울한 표정으로 바둑판을 바라보다 한숨을 삼켰다. 1국 패, 2국 승, 3국 패, 4국 승. 패승패승… 이렇게 된 이상 최소 2번이나 더 대국해야한다. 앞으로 오가타 선생님한테 한 번이라도 이기면 마지막의 마지막인 7국까지 간다는 얘기다.

 

 괴로워…….

 

 꾹 눈을 감았다가 뜨며 한창 복기를 시작하려는 오가타 선생님께 말했다.

 

 “다음 대국에서….”

 

 꼭 이겨주세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삼켰다. 저번에 ‘너는, 그냥 말을 하지 마’라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꼬는 것처럼 들린다고 했으니까.

 

 “아닙니다. 복기 계속해요.”

 

 지친 목소리가 절로 나갔다. 힘들어. 역시 그만 두는 게 답인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맨정신아. 마른세수를 하고 혼미해지는 넋을 붙잡고 바둑판을 응시했다.

 

 까만 무늬 위에 그려진 많은 돌들이 어제와 오늘 연달아 두어진 그 수순대로 다시 두어지고 있었다. 가만히 오가타 선생님의 손끝을 바라보다 돌을 쥐었다.

 

 빨리 끝내고 쉬러 가자. 일단 그게 먼저다! 고개를 주억이며 빠르게 손을 뻗었다. 앗. 아까랑 다른 곳에 둬버렸다. 자꾸 신경이 쏠려서 그만.

 

 “…그래, 그 수도 좋아. 만일 내가 그렇게 두었다면 어쩌면. 오늘의 승패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군.”

 

 뭔진 모르겠지만 좋다니 다행이네요. 네. 그러니까 좀만 더 빨리 끝냅시다, 선생님. 오늘 저녁에 엄마가 고기 구워주신댔거든요. 벌써 입안에서 군침이 돌고 있거든요…! 쓰읍, 입맛을 다셨다.

 

 

 

 

 아키라와 히카루의 표정이 상반되었다. 십단전은 리그전이 아닌 토너먼트전인데, 마지막에 붙었던 둘의 대국에서 아키라가 이기는 바람에 최종 도전자가 아키라로 낙정된 것이다.

 

 시무룩한 히카루에게 나는 어색하게 위로를 건네었다.

 

 “우리집에 가서 게임할래…?”

 

 히카루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엊그제 있었던 기성전 4국을 복기하던 바둑판을 힐끔 내려다보다가 히카루에게 말했다.

 

 이씨, 이건 진짜 내키지 않는데.

 

 “그럼, 나랑 대국하자.”

 

 히카루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울며 겨자먹기로 돌을 치우고,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녀석에게 재차 말했다. 못 들은 것처럼 녀석이 멀뚱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식이 아니라도, 두면 되잖아.”

 

 물론 두기 싫지만. 껄끄러운 마음에 불유쾌한 표정으로 바둑판을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히카루에게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대국하자, 키요시!”

 

 응, 그래…. 나날이 내 무덤을 파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이미 절여진 거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아니, 안 괜찮은 것 같다. 울먹이며 돌을 쥐었다. 벌써부터 싫어.

 

 

 

 

 다섯 번째 대국이었다. 오늘 여기서 더 이기면 진짜로 마지막 대국까지 연패로 가야한다. 멍하니 수놓아진 돌들을 바라보다가 기묘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늘 그랬다. 상대는 늘 진지했고, 장난하나 없는 표정으로 저렇게 바둑판을 노려보거나 나를 노려보았다. 상대 오가타 선생님의 시선을 따라 바둑판에 눈길을 주었다.

 

 형태는 애매했다. 하지만 오가타 선생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울였다.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냥 여기서 멈추면 된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멈추면 되는데….

 

 이번 판은 타이밍이 완전히 없었다.

 

 이즈음에서 고개를 숙이면 사람들은 납득할까? 내가 졌다고 하면 상대는, 그리고 사람들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까? 지금까지 늘 하던 고민이었다. 머뭇거린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오늘은 진짜 제대로 된 타이밍이 없었다고.

 

 “졌습니다.”

 

 상대편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돌을 놓았다. 그렇대도 이번에 이긴 것은 내가 망설여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개숙이길 망설여서.

 

 아니, 그런데 틈이 없었잖아? 자칫하면 진짜 욕 먹는다고. 그냥 막 둔 거 들킨다니까? 비죽 솟는 입술을 억지로 집어넣으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는, 그리고 또 다음에도 꼭 이겨주세요! 꼭이요! 마음을 담아서 오가타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왜 불안하게 한숨을 쉬세요. 그러지 마세요.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이기겠다고 해주셔야죠…!

 

 

 

 

 여섯 번째 대국이다. 징글징글해. 그만 두고 싶다. 으윽. 괴로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이번엔 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거다.

 

 비록 바둑판이 빼곡해질 정도로 채워지고 나서야 기회가 오기는 했지만. 어릴 때 색칠공부를 열심히 했던 탓인가 자꾸만 거슬리는 빈 공간을 채우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지만 여기서 더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새삼 손끝을 매만지며 까끌거리는 굳은살을 꾹꾹 짓눌렀다. 여기서 돌을 던지면 되겠지. 그런데, 딱 한 수만 더 두어보고 싶다.

 

 하나만 더.

 

 그렇게 생각했다가 숨을 멈추었다. 어느새 손에는 돌이 쥐여져 있었다. 그걸 꽉 그러쥐었다가 툭하니 놓았다.

 

 나 뭐하는 거야.

 

 지금, 뭘 고민하고 있는 거지?

 

 

 

 

 ***

 

 

 

 

 도우야 아키라는 저희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도 맞추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후지사키 키요시의 모습에 멈칫했다.

 

 “키요시. 잠깐…!”

 

 아키라의 곁에 있던 히카루의 부름에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벌써 저만치 멀어진 그를 보며 둘이 떨떠름하게 있을 때였다.

 

 “내버려 둬.”

 

 오가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분명 이겼음에도 오가타는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다.

 

 “마지막 수.”

 

 까득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오가타의 입새로 짓씹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분명 둘 거라고 생각했는데, 두지 않았어. 검토할 때라도 보여줄 줄 알았는데. 빌어먹을.”

 

 아니, 진짜로 욕을 했다. 당황한 아키라가 오가타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히카루도 마찬가지였다. 오가타는 짜증스럽게 담배를 꺼내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는 조금 전 대국에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굳어있던 후지사키 키요시를 떠올렸다.

 

 한 번은 봐준다, 이건가? 아니면….

 

 아니면 대체 뭐야. 오가타가 결국 짜증스럽게 꾸욱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설마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한 번 더 두고 싶다던가,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

 

 멈칫, 입가에 물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부여잡았던 머리를 놓고 후지사키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당연스럽게도 텅빈 공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

 

 

 

 

 기성전 제 7국. 방어전의 마지막 대국을 앞에 두고, 마주한 안경너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번 대국에서 승부가 나겠구나.”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골랐다. 착석하라는 대국 안내자의 말에 자연스럽게 대국석에 앉는 내 모습이 이제는 익숙했다. 혼란스러우면서도,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저번의 여섯 번째 대국에서 망설였던 것이 바보 같았다. 아니, 바보같지 않다.

 

 아이러니하지. 처음에는 우연이었는데 말이다. 먹고 있던 초콜릿을 쏟았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기억한다. 우왕좌왕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렇게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바둑판 앞에 앉아있었다. 내 또래애들이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까맣고 하얀 돌을 수많은 칸이 그려진 나무판 위에 얹어놓는데.

 

 보였다. 그냥 왠지 여기에 두면 될 것 같았고, 그러면 내가 원하는 모양대로 나무판 위를 그려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두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나한테는 당연했으니까.

 

 ‘키요시 네 실력이라면…….’

 

 그런데 사람들 눈에는 그렇지 않았나보다.

 

 ‘네 실력을 보여주자꾸나.’

 

 할아버지는, 그리고 사람들은 그걸 실력이라고 불렀다.

 

 

 

 

 여섯 번째 대국에서 패배를 바로 시인하지 못하고 고민했던 것을 떠올렸다. 왜? 왜 그랬을까? 마지막 대국이 치러지는 오늘 아침까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처음에는 나를 향한 기대가 부담스러웠고, 변하는 환경이 당혹스러웠고, 닥친 현실이 무서웠다. 그 후에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만약 여기서 내가 이긴다면 어떨까?

 

 심장이 떨어져내린다. 두려웠다. 부담스러웠고, 싫었다. 어린 날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감정들이었다. 근데, 그 와중에 느껴진 또하나의 감정이 아주 익숙한 것이라서, 나는 차마 더 이상 부정의 마음을 잇지 못하였다.

 

 그게 무엇인지 이제 알 것만 같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어렴풋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의 끝자락은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결론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갔다. 원치 않았으면서도 어쩌면 원하였던 결론에.

 

 그래.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무서워서 부정했을 뿐이란 것을 나는 이제사 완전히 깨달았다.

 

 

 

 

 그때도 오가타 선생님이었을 거다. 그날 처음으로 제대로 졌을 때, 기뻤다. 동시에 숨이 벅찼다. 그것 또한 기쁨의 한 일종이었을까? 그 뒤에 곧장 그에게 이기고 말았을 때 기분은 어땠지? 분했나? 화가 났나? 왜?

 

 나를 이길 수 있는데,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 장난하나 싶어서? 아니면 상대의 실력이 아슬아슬하게 내게 못 미친 것이 거슬려서? 그도 아니면 싫어하는 바둑이 오래 걸려서? 대체 무엇이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하고 싶지 않은 물음이었다. 순간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으나 더 외면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므로, 억지로 묶어두었던 마음을 한꺼풀씩 풀어내었다.

 

 지금껏 품고 있던 마음을 새로이 고쳐먹고, 부정하던 사실을 인지했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진심으로 포기하지 못하고 이끌려온 진짜 이유’ 같은 것 말이다.

 

 

 

 

 사실은 즐거움이 없지 않았다.

 

 바둑은 눈앞에 펼쳐진 반상 위에 까맣고 하얀 별을 새겨넣는 것처럼, 마냥 신기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게 조금은 즐거웠던 것 같다.

 

 싫었던 것도 진짜였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자 했지만, 반대로 무수한 가능성이 떠오르는 것이 싫었다. 그것이 하나의 수가 되어 선택되지 못한 다른 가능성을 막는다는 게 싫었다.

 

 그저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곳에, 그 무엇도 두어지지 않는 것이 좋았다. 수놓이기 전의 함부로 가정할 수 없는 무수한 상상이, 아무것도 정답이 내려지지 않은 그 자체로의 완성이 좋았다.

 

 그렇기에 수가 두어질수록 줄어드는 유한함이, 생각함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가능성이 싫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바둑을 두는 것이 괴로웠고 그렇기에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인정하고자하는 것은.

 

 시작은 본의 아닌 것이었지만 끝은 결국 내 의지였으니까 즐거웠기에 포기하지 못한 것이고 그 자체가 내 선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버거운 생각들에 숨을 고르고 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머릿속을 정리해나갔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되짚어보자.

 

 두 가지 사실이 있다. 나는 바둑이 싫다. 나는 바둑이 즐겁다.

 

 그 둘을 조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여러 이유로 인해 바둑이 싫다. 그러나 그 수많은 이유들을 예로 들었음에도 완전한 변명이 될 수 없을 만큼.

 

 잠시 멈춘 생각에 고개를 저어 두려움이란 익숙한 감정을 털어냈다. 망설이지 말고 이제는 정말로 인정해야한다.

 

 아주아주 사실은. 정처없이 빠져버린 것이 두려울 정도로 내 인생을 모조리 물들인 그것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여전히 피하고 싶을 만큼 두렵고 무서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린 그것이. 그러니까 그 ‘바둑’이란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 사실이 무어 그리 새삼스런 것이냐는 듯 당연스레 느껴졌다. 머리로는 부정하였으나 마음은 벌써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가 바둑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되레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바둑을 좋아한다.

 

 이제 완전히 인지한 그 사실을, 부정할 길은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이미 나보다도 먼저 그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나 홀로 부정하고 거부하였던 것을 받아들인 것이니까. 이제부터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즐길 일만 남았다. 숨겨지고 숨겨져있던, 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더는 숨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인정하였다.

 

 이번 대국은 나 스스로를 외면하지 않고 두는, 처음으로 온전히 내 의지로 두는 제대로 된 대국이 될 거란 말이다. 조금,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즐거워졌다. 설령 다다른 결말이 패배일지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 대국이 나의 첫 진심이 될 테니까.

 

 

 

 

 마주한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숨을 내쉬었다. 돌을 쥐는 손에 처음으로, 온전한 마음을 담았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나를 들뜨게 했다. 기성전 마지막 방어의 성패를 가르는 제 7국. 여기서 진다면… 그래,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내 마음을 속이지 않기로 했으니까, 깊은 곳에 외면하고 숨겨두었던 나의 진심을 꺼내어 바랐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마음을 인정하고, 지금까지의 거짓이라 믿었던 진실을 나는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덧씌웠던 지금까지의 모든 감정들이 사실은 무엇이었는지. 나 스스로를 속여가며 숨기고, 숨기려던 그것은. 앞으로 내가 착각하고, 부정하지 않을 감정의 이름은.

 

 ‘설렘’이었다.

 

 벅차는 호흡으로 나는 지금 느끼는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였다.

 

 “이길 겁니다.”

 

 마주한 현재와,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고서 그 어떠한 것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는 처음으로 진심을 내보였다. 상대는 나와 같이 웃으며 분명 나와 같을 눈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래. 하지만 녹록지 않을 걸.”

 

 안경너머로 마주한 오가타 선생님의 눈은 내것처럼 빛이 났고, 그 음성은 내 입에서 나온 것과 같은 음색으로 세상 밖에 흘러나왔다.

 

 “나도 제대로, 이길 작정이니까.”

 

 그 빛과 그 색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곧장 답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바둑을 사랑하는 이들의 것이었으므로.

 

 

 

 

 

 

 -[完]-

 

 

 

 

 #외전 - 계속되는 착각, 어떠한 착각은 자유.

 

 

 기성전 마지막 대국이 끝났다. 와, 정말, 진심으로, 새하얗게 불태웠다. 한숨을 내쉬며 돌을 정리하고 검토하는데 오가타 선생님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역시 한 번 더 두고 싶어서 일부러 진 건가.”

 

 예? 아, 여섯 번째 대국 말씀하시는 걸까. 어, 아뇨, 일부러 졌다기보다는 이기려고 하지 않았던 건데. 아니, 그게 그건가. 아닌데, 좀 다른데. 뭔가 좀 이상해서 입을 떼었다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오가타 선생님이 홀로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뭐, 상관없지. 마지막 대국은 만족스러웠으니 됐다. 지긴 했지만….”

 

 뭐지? 그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게 다행인지 아닌지 미묘해서 고개를 갸울였다. 멀뚱멀뚱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는데 그 표정이 갑자기 엄청 사나워졌다. 곧 아주아주 무서운 눈이 희번뜩하며 나를 향했다.

 

 “아니, 안 되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괘씸해.”

 

 히익. 뭐, 뭐가 괘씸하다는 말씀이신지…. 움찔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슬쩍 일어나서 도망가려는데 그의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조금 전의 대국을 복기하던 것을 모조리 치우고서 다시 무언가를 놓고 있었다. 아, 저거 저번에 두었던 제 6국이잖아.

 

 제 6국의 이튿날, 내가 두다말았던 그 부분까지 차근차근 눈앞에 그려지는 것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아차했다. 으악, 오가타 선생님이 돌 놓고 있을 때 도망갔어야하는데! 나도 모르게 바둑판에 정신을 팔아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얼굴이 엄청나게 따끔거려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안경너머로 빔을 쏘듯 찔러드는 그의 눈빛을 슬그머니 회피하며 도망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나를 눈치챈 것처럼 그가 말했다.

 

 “자… 여기서 이어서 둘까 아니면 자리를 옮길까. 후지사키. 선택은 네 몫이다.”

 

 무섭다. 무서워. 역시 바둑은 무섭다. 아니, 선생님이 무서운 거겠지. 울먹이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래도 이제, 싫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게 싫은 마음만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깨달았으니까. 떨리는 마음을 외면하지 못하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자리를.”

 

 “그래. 그럴 줄 알았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절하면 억지로라도 데려가려고 했는데, 번거로운 일이 줄었군.”

 

 역시 거부권은 없는 거였어. 참담한 기분으로 얼굴을 쓸고 터덜터덜 그를 따라갔다.

 

 “굶기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싫은 티 내지 마.”

 

 앗. 들켰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오가타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아셨지? 내가 밥 못 먹을까봐 시무룩했던 걸. 신기하게도 또다시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가 답했다.

 

 “나랑 밥 먹는 게 싫은 거면 알아서 먹고 다시 만나도 되고.”

 

 아니, 이번엔 틀렸다. 완전 완전 잘못 짚으셨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밥을 먹는 게 무척이나 좋답니다. 해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그가 혀를 차고 저 멀리 가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여지껏 사줬네.”

 

 아니아니, 선생님. 절대 아닙니다. 고개를 저으며 그를 붙잡으려는데 아직도 한뼘은 차이나는 키 때문에 쉽게 따라잡질 못 했다. 이놈의 키는 왜 이렇게 안 커! 설마 한뼘이 전부 다리길이는 아니겠지. 그럼 좀 슬퍼지는데… 이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다급히 오가타 선생님을 불렀다.

 

 “선….”

 

 “각자 저녁 먹고, 본원으로 다시 와.”

 

 오해입니다, 선생님. 제가 얼마나 선생님을 좋아하는데요?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저 지금 말하려고 했거든요? 입 벙긋 했단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가버리기 있기예요? 너무 급해서 제대로 소리도 못 지르고 허공에 입을 벙긋대다가 헛숨만 삼켰다.

 

 그대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에 나는 좌절했다.

 

 제게 해명할 기회를 주세요. 저는 선생님의 지갑을 좋아하… 아니, 선생님을! 아주아주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뒤늦게 외쳐봤지만 그는 이미 떠난 뒤였으므로 소용이 없었다. 울쩍하게 길을 나섰다. 입이 방정이지. 맨날 이놈의 입이 문제야. 훌쩍.